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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부흥을 이끈 거룩한 순교자들 



폴 칼슨이쓴 "장로교유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체류하는동안 쎌베투스(삼위일체부인 .의사)를 비롯 58명이처형(주:칼빈은 훗날 뉘우친 듯 했다) 되었고, 76명이 추방된 반면 로마 카토릭 제판소의 책임자 도르퀘마다(Torquemada)가 로마 카토릭교의 종교재판소의 책임자로 있던 18년동안은 10220명이 화형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했다. ........교회사 가운데 가장 어두엇던 날중하나는 1572년 8월24일 이였는데 , 이날 휘그노(Huguenots)라고 알려진 수천명의 불란서 칼빈주의자들이 , 카토릭 군대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성 바돌로매축제일의 대 확살이라고 불리게된 사건이었다. .........성 제르맹(Germain)대 사원의 커다란 종이 8월24일세벽이되기전에 울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즉 불란서 전역을 휩쓸게될 대 확살의 신호였던 것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중 하나는 존경받던 위그노의 지도자 가스파르드 콜리니(Gasprd Coligny)장군이었는데, 그는 성경을 연구 하고,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물리치다가 ,칼빈이 친히 권유하는 것을 받아 드린후, 종교개혁의 신앙을 신봉한 사람이었다. 암살자는 먼저 칼을 던저 콜리니의 몸에 꽂았다. 그리고시체는 창문밖으로 내 던졌다. 마지막으로 그가 죽은 것을 확실하게하기위하여 프로테스탄트의 위대한 지도자인 그의 머리를 베었다.


성 바돌로메의 날의 대 확살 사건에서 종교와 마찬 가지로 정치가 큰 역할을 하였다는데는 의의가 거의 없었다. 왜야하면 ,위그노교도들은 ,스코틀랜드 사람과 다름없 이 군주정치위에 지방자치 단체 두는 것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대확살의 대한 소식이 로마에 알려지자 카토릭 성직자들의 기뻐날뛰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로레인(Lorraine)의 추기경은 소식을 전해준 사신(使信)에게 일천개의 면류관으로 포상하였고, 성 앙겔로(St.Angelo)의 대포는 천둥소리를 내며 기쁨의 예포로쏘았으며,모든 교회당의 뾰죽탑에서는 종소리가 울 려 나왔고, 그레고리 8세는 추기경들과 다른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을 대동하고 로레인의 추기경이 테대움(Te deum), -고대라틴어 찬송으로 감사예배때 불렀음-역자주-)을 부르고 있는 성 루이스(st.Louis)교회를 향하여 긴 행열을 지어 가고 있었다. "...........


불란서의 쟈크 르페브르(Jackues Lefevre)라는 저명한 인문주의자는 감히 이렇게 기록했다. "오직 은혜만으로써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인정해주는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르페브르역(譯) 성경은 불에던저 태워 버렸다. 물론 카토릭측에서 ,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르페브르의 학생중 한사람은 칼빈을 제네바로 돌아오게하는 역할 을 감당한 윌리암 파렛이었다. 


불란서에서 400만명이나되는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갔거나 순교를 당한 것으로 추정 된다.(폴 칼슨). 또한 1523년 7월에 헨리 푸스(Henry Voes) 와 요한 에스 (John Esch)는 프로테스탄트신앙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브리셀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의사요 장로교 치리자였던 마이커스 휘트만(Marcus


Whitman)박사는 오리겐주의 인디안들에게 의료혜택과 복음을 전해주려는 욕망에 충동을 받아 오래곤 황야의 오솔길을 넘어 1843년까지 일천명의 이주민들을 데려 갔다. 이주민들은 록키산맥을 지났을 때 ,휘트만 박사부부는 홍역이 전염되고 있는동안 인디안 들에게 살해되었다. 죤 후스(Jean Hus)는 속죄권은 불법이라고 교황에게 대항하다가 순교한 보헤미야의개혁자이다. 1369년 그는 프라그대학을 나온뒤 ,1404년 동 대학의 총장이되어 일찍부터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를 사모하고 , 그의 저술을 연구하면서 대학에서 개혁사상을 강의 했다. 1412년에 십자군동원의 유설대가 유럽을 돌아다니며 교황의 속죄권판매선전이 있자 후스와 함께 개혁사상을 가진 동지들은 크게 격분하여 공개토론회를 열고 반박을 하면서 "교황이나 감독은 칼을 잡을 권리가 없다."하고 "돈은 사죄의 조건이 될 수가 없다.다만, 회개만이 사죄의 조건이며 ,구원 얻을자는 택함을 받은자 뿐임으로 교황도 이것을 알 수는 없다. 더구나 교황에게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주장은 참람하다."고 공격하며 , 군중들은 대 감독의 저택앞에서 시위르르하며, 교황의 명령서를 불에태워 버렸다. 황제는 군중들에 로마교황에게 모욕적 행위를 금지시키고,세 청년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후스는 그 시체를 거두어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안에 장사했다.이로인해 황제가 후스에게 퇴거명령을 내리니 후쓰는 "대심판자 그리스도에게 고소함"이라는 저서를 쓰고, 각지로 다니면서 군중들에게 설교하고 [교회론]라는 큰 저술도 내 놓았다. 교황청은 1414년 12월 에 후쓰를 체포하여 교회론에대하여 심문을 했다. 1915년 7월6일 ,마침내 후스는 이단자로 단정되고 저서는 불태워지고 ,순교장에서 후쓰는 무릎을 꿇고 자기를 사형 하는 적을 위해 기도했다.그들은 "우리는 그대의 영혼을 악마에게 넘겨주노라" 하자 후스는 대답하기를 "나의 영혼은 거룩한 주예수께 맡기노라."했다.


쇠사슬로 목을 매어 끌어내어 형틀에 올려놓고 불을 질르면서 그 주장을 취소하라고 강요했지만 그는 거절 했다."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순교했다. -좁은길로 간사람-에서




◎엔다너쓰는 신앙의 지조 때문에 새들의 먹이가 된 영원한 성녀이다. 초대교회박해가 격심하던때 예수믿는 여자들중에 자기의 신앙의 지조와 함께 육신의 순결을 끝까지 지킨 '영원한 처녀'라부르는 동정녀들이 많았다...... 교회 박해때 이런 여성들이 많이 순교 했다. 시도포리스의 에다너쓰 처녀도 그 중에 한사람이다. 그가 잡혀 서 재판에 끌려가서는 마게시쓰라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악평의 호민관에게 말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옷을벗겨 나체로 끌고다니면서 가죽 채찍으로 매질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자기 신앙지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재판관들은 결국 화형에 처하라고 했고 ,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그것을 기뻐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자들의 시체는 매장되지 않고 들 짐스으이 밥이 되도록 들에 버리게 했다.그래서 들 짐승들이나 개들이 뜯어먹고 , 송장의 손과 발들이 여기저기 흩으러져 굴러 다녔다.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던 불신자들조차 그 잔인한 행동을 증오했다. 


이런 박해가 계속되던 어느때 , 하루는 온 하늘이 유달리 명랑해 지더니 허공에 둥근 기둥같은 것이 보이더니 거기서 눈물같은 물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비오는 것은 아닌데 옷은 젖는 듯 했다.


포악 무도한 박해자들 행동에 우주가 참을수 없어 슬피 우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 기록을 쓴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말하기를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 니라 확실한 사실이다."하고 말했다.


- 좁은 길로 간 사람들-에서












*◎*여수반란사건과 손동인 형제의 순교


1948년 10월20일 공산주의 난동이 여기저기서 있었다. 저들은 기성 집단체가되어 있는 교회와 신도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왜정때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고 7년 옥고를 치르고 나온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 ,손동신 형제를 미워하여 푸락치들이 체포하여 인민제판(人民裁判)에 회부 하였다.


"너희들은 예수믿는 놈들이지!"


"네 ,우리는 예수교인들입니다. ."


"너희애미애비도 예수믿는 놈이지!"


"네,아버지는 목사입니다."


"너희들은 학교에서 언제나 공산주의를 비난 하였다지?"


" 나쁜점을 좋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 무엇이 나쁘더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 나쁩니다. "


"이제라도 예수를 버리면 살려줄 터이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오 ,생명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면 나는 죽슺니다. "


"그러면 예수를 믿겠다는 말이지?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이리하여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하였다.


- 한국기독교 해방10년사-에서 



◎**손 양 원 목사 순교:


손양원목사는 문둥이 들을 돕던 자이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자를 양아들로 삼을 정도로 천진무후한

신앙의 사람이었건만 공산당은 그를 꼭 죽이기 까지 해야 했던가? 이에 더욱 고발심이 더해간다.


손양원 목사는 부친을 따라 경남 함안 출생이다. 그 동생도 목사이다. 손목사는 부친을따라 6세부터 교회에 다녔고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홀리네스파 노방전도에 큰 감동을 받고 교역에 큰 뜻을 두었다. 여수 애양원 나환자들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일생을 목회했다. 동인 동신이 두 귀여운 자식을 공산 푸락치에게 순교당하고 6.25난리가 일어나 인민군들이 여수,순천 지방에도 밀어닥치니 ,손목사는 자기 목회하는 애양원 나환자 양떼를 버리고 혼자 피난 갈수 없다고 순교의 각오를 세웠다. 


애양원 나환자들에게도 좌우익이 생겨 손 목사를 고발하는 나환자가 있어 잡혀 갔다. 


1950년 9월 28일 여수 미평 둔덕재에서 조상학 목사등과 함께 순교 했는데 ,손목사의 입술은 인민군 개머리 판에 맞아 깨저 있었다고 한다. 


-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외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목사의 순교


프로테스탄트선교사로써 이땅에 왔다가 순교한 목사는 오직 토마스(Robert Jenemain Tomas 1840-1866)선교사 뿐이다. 그는 1840년 9월7일 웨일스 리야드(Wales Rhayade)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대학의 뉴 칼레지를 졸업하고,63년 6월4일 고향인 한조베(Hanover)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24세 청년으로 신혼 신부를 데리고 만리 이역인 중국선교차와서 기후와 식사와 생활형편이 맞지 않아 부인은 풍토병에 죽고 말았다. 그것은 토마스에겐 이겨내기 힘든 슬픔이었으 나 바울처럼 기도로서 선교의 일을 다시 가다듬었다. 


이때 천주교인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崔善一)두 사람을 맞나 천주교인들이 큰 박해를 받고 있으며 ,선교사의 내도를 갈망한다는 말을 듣고 한국인이 한문성경(漢文聖經)을 읽는것도 알게되자 한국 선교를 결심 했다. 1865년 9월4일 중국 산동성을 떠나 13일에 한국 서해안에 있는 창린도(昌麟島) 자라리 근포리에 도착, 두달 반을 있다가 일단 돌아 갔다가 이듬해 미국 상선 '제너랄셔먼(Gemeral Sheman)호를 타게 됬는데 한강을 거슬러 올라 갈 계획이었는데 한국 지리에 서툰 나머지 ,대동강 하류인 강서군 초리면포리(江西郡 草里面 浦理)에 닻을 내리고 , 좀더 올라가 석호정과 만경대에 상륙하여 100여경의 성경을 주민에게 나눠 주었다. 8월 25일 봉황진 에 이르렀다,원채 큰배가 그만 모래사장에 박히게되어, 이로인해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셔만호는 관군에 불타 버리고 토마스는 겨우 육지에 올라 끝까지 많은 성경을 주민에게 뿌리다가 조선땅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참수형(斬首刑)을 당하여 9월 2일저녁 그의 나이 27세에 순교를 당하였다.후인 들이 그 한을 어찌 고발하지 안 겠는가? - 토마스목사전기에서 -


◎최초의 한국 개신교 순교자 한경희 목사


천주교는 한국에 선교하면서 선교사 들이나 교인들이 많은 피를 흘려 순교자가 속출하였다. 거기비하면은 개신교는 비교적 순탄한 선교를 하였다고 본다...........


여기 소개하는 한경희(韓敬禧)목사는 1881년 평북 용천 출신으로 1914년 제7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전도에 헌신하였다. 총회 파송 북 만주선교사로 부임,,김창근씨등 제직 4인과 함께 눈 썰매를 타고 오소리 강변 요하현으로 가다가 1월4일 공산비적(共産匪賊)에게 잡힌바 되었다. 한목사 일해을 붙잡은 공비중에서 중국인 공비는 돈 천원을 요구했으나 ,조선인 공산당원은 목사인 것을 확인하고는 마침내 한목사를 총살하고 얼어붙은 강을 깨고 시신을 넣었다. 한 목사는 순교하기 직전 "오 주여 이 작은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세 번 외치고 순교의 제물이 되셨다 한다. - 김인서 저작전집5권-에서




◎순교의 피로 계승한 한국교회


성경에 기록된 사도야고보와 집사스데반의 순교의 피가 2000년간흐르고, 한국땅에는 토마스목사 순교의 피가 (1866.9.2)대동강변에 이르더니 ,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핍팍정책(주로신사참배)과 ,8.15광복이후 38이북에서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의 탄압으로 많은 순교자들이 났으며,특히 6.25사변을 통하여,허다한 순교자들이 배출 되었다. 순교하신 분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그 중에 기억할 다음분들을 소개합니다.







◎*김익두(金益斗)목사: 망나니였던 그가 중생을 체험하고 전국에 집회를 인도했던 능력의 종.


김익두목사는 황해도 안악구 형촌리에서 1874년 11월3일에 출생,부유한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친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16세된해에 서울로 과거보러 올라 갔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조숙한 그는 18세에 결혼한 후에도 주색에빠저 기생집에 다니는등 진짜 부랑자가 됬다. ...장날아면 장보러 오는 장꾼들이 빌기를 "오늘 장에가서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 주세요!"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27세때 친구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 서양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는데 ,그가 소안론 선교사였다.(일설엔 하치순전도인의 전도로 믿었다고도 한다.)


........김익두는 1900년 봄,회개한 그는 어느날밤에 문을 걸고 3일동안이나 기도했다. 그리고나서 자기 처가에가서 장모에게 "김익두가 죽은거 압니까? "라고 말했습니다.......중생을 체험하고 교인이 된후의 김익두는 울기를 잘하는 인간으로 변했다. 


감격의 눈물로 돌아온 그를 본 모친과 아내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 했다. 


1970년 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하루는 앉은방이를 보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그러나 앉은뱅이는 눈만 말동거리고 앉아있는 것이다. 실패했다.


망신한 그는 그후 목사가 된후 기도 또 기도 , 길 걸으면서 기도했다. 어느날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와 교회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 동리 부자집을 찾아가 부탁했더니 승낙받고 신천교회를 지었다한다. 김익두 목사는 그 이후 신유(神癒)의 은사를 받아 많은 병자를 그의 기도로 응답 받았다한다. 


1920년에는 한국 장로교 9대 총회장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 , 이어 6.25사변이 일어나 1950년 10월14일 국군이 북진하여 신천지방에 가까워 왔을 때 김익두 모사는 너무기뻐 50명 교인들과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데 , 그 때 후퇴하던 공산 인민군 몇 명이 달려들어 김익두 목사와 교인 5명을 성전 강대상 앞에 세워놓고 따발총으로 사살하고 도망첬다. 김목사가슴에는 총알 두 개가 관통해서 피에 젖어 제물이 되었다.


_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여수반란사건과 손동인 형제의 순교


1948년 10월20일 공산주의 난동이 여기저기서 있었다. 저들은 기성 집단체가되어 있는 교회와 신도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왜정때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고 7년 옥고를 치르고 나온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 ,손동신 형제를 미워하여 푸락치들이 체포하여 인민제판(人民裁判)에 회부 하였다.


"너희들은 예수믿는 놈들이지!"


"네 ,우리는 예수교인들입니다. ."


"너희애미애비도 예수믿는 놈이지!"


"네,아버지는 목사입니다."


"너희들은 학교에서 언제나 공산주의를 비난 하였다지?"


" 나쁜점을 좋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 무엇이 나쁘더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 나쁩니다. "


"이제라도 예수를 버리면 살려줄 터이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오 ,생명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면 나는 죽슺니다. "


"그러면 예수를 믿겠다는 말이지?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이리하여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하였다.


- 한국기독교 해방10년사-에서 



◎**손 양 원 목사 순교:


손양원목사는 문둥이 들을 돕던 자이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자를 양아들로 삼을 정도로 천진무후한

신앙의 사람이었건만 공산당은 그를 꼭 죽이기 까지 해야 했던가? 이에 더욱 고발심이 더해간다.


손양원 목사는 부친을 따라 경남 함안 출생이다. 그 동생도 목사이다. 손목사는 부친을따라 6세부터 교회에 다녔고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홀리네스파 노방전도에 큰 감동을 받고 교역에 큰 뜻을 두었다. 여수 애양원 나환자들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일생을 목회했다. 동인 동신이 두 귀여운 자식을 공산 푸락치에게 순교당하고 6.25난리가 일어나 인민군들이 여수,순천 지방에도 밀어닥치니 ,손목사는 자기 목회하는 애양원 나환자 양떼를 버리고 혼자 피난 갈수 없다고 순교의 각오를 세웠다. 


애양원 나환자들에게도 좌우익이 생겨 손 목사를 고발하는 나환자가 있어 잡혀 갔다. 


1950년 9월 28일 여수 미평 둔덕재에서 조상학 목사등과 함께 순교 했는데 ,손목사의 입술은 인민군 개머리 판에 맞아 깨저 있었다고 한다. 


-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노병제집사-"천사날 부르니....."찬송부르며스스로 물에 빠진 순교자 



1950년 한국의 6.25사변때 ,전남 영광군의 피해는 가장 막심했다. 군내 전체인구 10만명 가량중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된 수는 39,960 명이나 됬다. 특별히 기독교인의 피해가 컸다. 인민군 빨지산이 서해안으로 탈주하면서 피해는 더욱커.........결국 영광읍교회는 불에타 전소되고 교인 32명이 순교했다. 법성포교회는 김종인 목사와 교인24명이 순교했다.염상교회는 건물이 전소하고 김방호목사 일가족과 허장로부부와 교인 73명이 순교했다........백수교회는 53명이 순교하고 ,야윌리교회는 어린아이들까지 64명이 전멸했다. 원창권 목사는 11세아들의 손목을 피난가다가 잡혀 아들과 함께 순교했는데 ,시체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목사님의 부인은 임신 9개월이었는데 배를 갈라죽이고 ,군인으로 나간 아들 하나만 남고 가족이 전멸 했다. 염상교회의 노병재(盧炳在)집사는 함께 붙잡힌 교우들과 같이 어두운 밤중에 서해 바닷가 수문에 끌려나가 폭도들에의해 한 사람씩 가슴에 큰 돌을 안겨 줄로 매고 수문에 물이 가득 찼을 때 바다에 던져넣어 죽였다. 


노병재집사의 차례가되어 끌려나가 수문 위에 서니 폭도들은 그의 가슴에도 돌을 묶으려함으로 ,"나는 돌을 묵지 않아도 된다. 나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을테니 걱정마라."면서 수문위에 비장히서서 마지막 찬송을 불렀다. "천당에 가는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그는 마지막절 "야곱이 잠께여 ......"까지 부르고 스스로 바다에 뛰어 들어 찬란한 순교를 했다. 그가 물 속에 들어 간뒤에도 한참동안은 찬송소리가 계속 들렸다고 한다. 


폭도들은 여자들을 끌어내어 바닷가에 꿇어 않쳐놓고 한사람은 머리채를 잡아끌고 또 한사람이 일본도(刀)큰 칼로 목을 쳐서 죽였고,칼에 묻은 피를 폭도는 빨아 먹더라 한다. 


한 젊은 여자는 집에 먹는 아기를두고 끌려왔는데 젖이 퉁퉁불어올라 아기를 못잊으며,원한의 차서 맞아 죽는 모양은 눈뜨고 볼수 없는 장면이었다. 밤이면 으스름 달밤에 사람들을 끌고 나와 방망이로 머리를 처 죽이는 소리가 멀리서 듣기에 "퍽,퍽"하며 떡치는 소리 같았다고 한다. 


지금도 염상교회 앞 바닷가에는 순교자 들의 무덤이 가지런히 길게 뻗어 있다. 6.25때 한동안 많은 사람이 죽어서 바닷가 물빛마저 피에 젖어 붉었다고 한다.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어느 종교이던지 나름데로 순교자는 있어왔다. 기독교는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인간의 죄로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 인간은 어디서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가는 가는 길을 분명히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성경 ,예수십자가로 구원 받게된 ,이 기쁜 구원의 복음(goodnews)소식을 전하고자 사랑을 품고 선교하던 사람들을 무참히 순교시킨 사건들이 들이 역사 속에 물드려져왔다. 로마황제들에게, 각 나라 피팍자들에게, 심지어 저들도 순교를 당했지만 신교를 박해하고 순교시킨 카토릭의 교황들, 공산 주의자들, 일본제국주의 자들에게 순교한 순교자들 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무어라고 하고 있을까? 요한 계시록에서 분명히 한을 품고 있음을 봅니다."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라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분명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것이지만 , 우리에게 복음이 물려지게되고, 그로인해 주님을 알게되고 믿게되고, 주의 오시는 날(parousia)에 평안으로 맞게 되게된 은혜앞에 ,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그 한을 어찌고발하지 않겠는가!. 


이 역사 속에 전부를 밝히지 못할지라도 그분들에게까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한이 풀어지는 통쾌한 날이 이르기를 기원하면서 순교한자의 한을 고발합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메,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다데오,시몬,맛디아(가롯유다대신),사도요한은 이론이있지만 제자들은 모두 순교자였습니다. 



초대 교회 박해와 순교는 처참했다. 로마 네로황제는 로마시를 불질러놓고 그 일을 기독교인에게 죄를 덮어씨워 순교케 한 인물이다. '네로'(Nero,37.12.15-68.6.9)는 폭군의 대표자다. 로마의 제 5대황제로서 64년 7월에 로마시에다 부하 군인들을 풀어 불을 지르게하고 , 미치광이처럼 바라보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고며 광란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방화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 많은 교인을 방화혐의로 확살하고, 이때 베드로도 십자가에 거꾸로못 박혀 순교하였고, 바울은 참수형(斬首刑)을 당해 순교하였다. (로마史에서) 


성 폴리갑은 예수님이 사랑하던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로마시대 소 아시아에서는 신자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하는 이가 많았다. 서머나에서는 12명의 신자가 붙잡혀 그중 한명만 배교하고는 나머지는 모조리 사나운 짐승의 밥이되어 순교했다. 


군중들은 "폴리갑을 끌어내어 죽이라.!"고 소리 질렀다. 폴리갑이 끌려나가 원형극장에서니 재판관은 말하기를 "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를 저주하고, 로마황제를 경배하면 너를 노아 주리라. "고 했다. 폴리갑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하기를 "나는 오늘까지 80여년동안 예수그리스도를 섬겨왔습니다만 , 예수님은 단 한번도 내게 손해되는 일을 않으시고, 도리어 가지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큰 은혜받은 주님을 내가 어떻게 저주할 수 있습니까?"했다. 그리고나서는 오히려 재판관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 했다.....그러나 큰 기둥에 폴리갑의 몸을 동여매고 불을 질렀다. 그는 불타는 불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저 같은 것을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해주시고 ,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참여시켜주시는 이 날을 감사 찬송드리나이다."하고 기도 했다. 


이때 이상한 것은 불길이 폴리갑의 몸을 태우지 않고 좌우로 갈려 그의 몸을 보호하는 듯했다. 놀란병사한 사람이 창으로 그의 몸을 찌르니 피가 흘러 마치 큰 비를 맞은 듯 불이 꺼졌다. 그리고 폴리갑은 찬란한 순교를 하였다.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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