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아더 핑크 목사님의 좋은 글로서, 왜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백하게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읽고 많은 유익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일부분을 발췌한 것으로서 전체를 보셔야 하는데, 이 글은 옛적길 출판사에서 나온 개혁주의 주일성수와 십일조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꼭 책을 사셔서 보세요. 좋은 책입니다.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아브라함이 충성된 자의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멜기세덱의 원형인 그분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주의 백성이 성실하게 십일조 하는 곳에는, 어떤 부족함이나 빚에 빠지지 않는다. 십일조가 무시되는 곳에는 거의 항상 부족과 적자가 있으며, 경건치 않은 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들을 동원한다. 십일조를 탐욕의 해독제로 정하셨다. 복권 문제, 돈이 우상이 되어 있다. 십일조는 우리를 탐욕으로부터 구하고, 우리의 본성적인 이기심을 물리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복을 위해 기획된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같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정해진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모든 재정적 문제의 해결로서 정해졌다.
존 번연
여기에 한 사람이 있네. 어떤 이는 그를 미쳤다고 하네. 그가 더욱 많이 드릴수록 그는 더욱 많이 가졌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셨을까? 그렇지 않다고 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다른 모든 동물들을 암수 한 쌍씩 지으신 하나님이 오직 사람만 짝없이 지으시진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는 피조물이기에 아담으로 하여금 자신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따라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을 때 그 소중함과 감사함을 알며 서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관계를 형성하고 산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서로 관계를 맺고 살지만 그들보다 더 깊고 차원 높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가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고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는 역시 가족관계이다. 따라서 가족관계는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제도가운데 맨 처음 만드신 것은 가정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공생애의 첫 발자국을 가정이 시작되는 가나의 혼인잔치로 옮기셨다는 점은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족관계가 화목할 때는 심리적 안정을 이루어 매사에 자신을 가지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가정은 인생의 출발점이요 모든 싸움을 싸우고 마지막에 돌아와 쉴 수 있는 안식처이다. 까닭에 화목한 가정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한 사람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직장에서나 일을 하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결과는 자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또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든든한 후원자들이 집에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자신 있게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다. 특히 밖에서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정성껏 저녁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며 귀여운 아이들이 아빠를 반기며 뛰어나온다면 하루의 피곤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가정의 화목은 곧 심리적 사회적 안정과 직결된다.
1. 화목하지 못한 가족관계가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
첫째, 소극적인 사람은 가족들과 만나기를 기피하는 등 우울증의 증세가 나타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보이지 않고 어떤 문제건 기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대화하는 것을 꺼리며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매사에 용기를 잃고 부딪히는 환경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특히 지금은 옛날과는 달리 온 가족이 방을 각각 따로 쓰고 있고 식사시간도 서로 달라 웬만큼 화목한 가정이 아니면 함께 모여 오순도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 이럴 경우 가정이 병들면 어른은 어른대로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집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고 일단 집에 돌아오면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꼭 닫아버린다. 그리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컴퓨터 게임과 같은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게 된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한 지붕에 사는 가족이지만 내막을 보면 남과 같이 ‘나 홀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연세대 여성연구소 손승영(孫承瑛) 전문연구원은 “우리 사회는 가족 구성원들이 가정에서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 사회 안에서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한다. 예컨대 수험생들은 집보다 또래집단이 모이는 독서실을 선호했고, 남편은 집에서 술을 마시기 보다 술집에서 먹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등이다” 라고 하였다(중앙일보 1996. 11. 11 기획기사 참조).
둘째, 파괴적인 사람은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어떤 부부에게 의견 차이가 생겼다. 처음엔 조용조용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다가 언쟁으로 번졌고, 종래에는 격해져서 남편이 아내를 때리려 하자 그 아내는 욕질을 하면서 문을 박차고 도망쳤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은 남편이 뒤따라 좇아가다가 부인이 보이지 않자 문 밖에서 놀라 눈이 둥그래진 아들에게 “야 이놈아, 그년이 어디로 갔니?”하고 묻자 겁에 질린 아들은 “예! 그년이 저쪽으로 도망쳤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얼떨결에 오고간 순간적이고도 매우 짤막한 대화(?)이긴 하지만 화목하고 단란해야 할 가정에서의 폭언과 폭력은 이미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 여성의 전화’가 지난 1995년 한해 동안 받은 15,300건의 전화상담 중 구타와 관련된 상담이 3,200건(21.1%)이나 되었는데(동아일보 1996. 5. 13) 1996년에도 총 23,753건 중 5,808건(24.5%)으로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이다(1997. 5 22 중앙일보). 따라서 여성계에서는 ‘가정폭력 방지법’ 제정을 위한 노력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폭력과 폭언은 자녀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아동학대 보호법’이 잘 발달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내 자식 내가 때리는데 누가 말리느냐’는 유교적 사고방식이 강하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자녀 학대는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셋째, 반항적인 사람은 가정을 이탈하게 된다 경찰청은 지난 1995년에 전국 5백97개 학원가에서 6만 7천여 명의 학원폭력배를 적발, 이 가운데 1만 8천여 명을 구속하고, 약 5만 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학생폭력서클도 1천여 개에 이르고, 이들에게 돈을 털리거나 폭행 등을 당한 피해 학생이 전학생의 7.2%인 61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1996. 2. 15 중앙일보). 이 학생들은 대부분 원만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학생들이며, 이런 가정에 불만을 품고 집을 뛰쳐나온 가출 청소년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학생들은 대부분 또래집단을 형성하여 폭력서클을 만들고 용돈과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학생들의 돈을 빼앗거나 남의 집 담을 넘어 훔치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문제로 비화하게 된다. 요즘에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소설 ‘브이(V)세대’는 이런 가출 청소년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가출은 비단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가정의 불화를 참지 못하고 가출을 하는 주부들도 적지 않다. 지난 1996년 10월 결혼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새살림을 시작한 동소문동의 서모씨(필자의 교회 교인)는 시부모와의 갈등, 종교적 갈등(가족은 모두 기독교인이며 본인은 남자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을 이기지 못하고 친정으로 발길을 옮기기를 수차례, 6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에는 가출을 해 버리고 말았다.
넷째, 극단적인 사람은 이혼을 하거나 심지어 자살이나 살인을 하는 등 자포자기하게 된다. 통계청이 세계 가정의 날(1993. 5. 15)을 맞아 발표한 ‘가정현황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20년간 이혼이 4배 가까이 증가하면서 이혼부부들의 평균 동거기간이 결국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짧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혼자 사는 가구가 15년간 3.6배나 증가, 1백만 가구를 넘어서고 소년소녀 가장도 지난해 7천3백22명으로 8년전보다 50%나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1992년의 경우 5만 7천쌍이 이혼, 72년(1만2천쌍)보다 3.75배 증가했다. 또 우리 나라 이혼부부의 평균 동거기간은 8.4년으로 미국(9.1), 일본(10.8년), 프랑스(13.4년) 브라질(16.9년)등보다 훨씬 짧은 것으로 나타나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지는 ‘냄비사랑’이 만연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쉽게 파탄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옛날에는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돌아오면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다시 시댁으로 돌려보냈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친정부모들이 “그렇게 속썩이고 살 필요가 있느냐? 그냥 집으로 들어와 버려” 하고 오히려 이혼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을 하거나 상대방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빈발하다는 것이다. 지난 1996년 4월 자신의 딸(丁美淑, 48세)이 동거중인 남자(吳원종, 50세)에게 매맞고 사는 기구한 삶을 보다 못해 살해 한 노모(李相姬, 72세)가 있어 세인의 관심을 끈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딸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수를 하였으나 17일만에 어머니가 진범으로 밝혀져 쇠고랑을 차야 했다. ‘내가 진범’이라며 서로 살인혐의를 뒤집어쓰려 했던 ‘비운의 모녀사건’은 새삼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였다. 짐승 같은 사위의 폭력 앞에서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모성은 살인을 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놓고 서울대 이용식(李用植)교수 등 다수의 국내 형법학자들은 李할머니를 벌할 수 없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연약한 부녀가 남편의 거듭되는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살인을 택할 수밖에 없을 때 정당방위를 인정하던가, 계속되는 위난(危難)앞에 생명․신체에 대한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동은 다소 과잉수단을 선택하더라도 책임 지울 수 없다는 소위 면책적 긴급피난(免責的 緊急避難)이론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런 법논리에 더해 李할머니가 72세의 고령이란 점까지 참작한다면 李할머니는 불구속상태에서 재판 받도록 하는 것이 일반정서에 합치된다는 생각이었다(1996. 5. 10 중앙일보). 결국 재판부는 李여인을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여 풀어주었다. 또한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동안에도 19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지금까지 18년동안 매질을 일삼아온 남편(崔東富․41․노동)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윤선화(尹善花․37․서울 관악구 신림동)씨는 지난 21일 새벽(1997.5.21)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이 항상 그랬듯이 신을 신은 채로 방에 들어와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두르다 잠이든 남편의 가슴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것이다(1997. 5. 22. 중앙일보)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지난 1989년 7월 17일 오후6시쯤 경북 성주군 선남면 성원리 정연택씨(34) 집 안방에서 정씨의 장녀 미희양(당시 성주중앙초등학교 6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이 잦은 것을 비관 “엄마는 제발 아빠와 싸우지마. 아빠는 술 먹지 마”라는 메모를 남기고 음독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 크신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저희가 되겠습니다.
주님, 한 주간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 고백하며 회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주님 안에서 맑고 밝은 마음으로 살아갈 힘을 주세요.
이 시간 모든 쓸데없는 생각들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저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께 능력과 지혜를 더하여 주세요. 늘 주님을 생각하며 꿈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린이 예배 대표 기도문
사랑하는 하나님, 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 하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세요.
예배를 통해 주님을 더욱 가까이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비록 어리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며 순종하는 마음은 쑥쑥 자라서 큰 일꾼되게 해주세요.
00월 00일에 친구초청잔치가 있습니다. 나오지 않는 친구들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 날에 손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올라가시면서 명령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전도하는 일에 힘을 쓰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세요. 성령님, 친구들에게 예수님 전하는 일이 기쁨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 믿고 따르는 일이 그 어떤 것보다 즐거운 일임을 깨닫게 해주세요.
감사하는 마음을 모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립니다. 다른 생각이나 졸음은 다 몰아내고 하나님께 집중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심을 기억합니다. 이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사랑하는 가득 담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어린이 예배 대표 기도문
하나님아버지 한주동안 저희들을 주님의 사랑안에서 지켜주심을 감사합니다. 무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지만 저희들을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주동안 저희들이 지은 죄들을 모두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아직 오지 못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친구들을 일깨워주셔서 교회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예배 시간에 졸지 않고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수 있게 도와주세요 말씀전하시는 목사님께 힘을 주셔서 더욱더 능력있는 말씀을 전할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오늘배운 말씀을 생활속에 나아가 적용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돌릴 수 있는 친구들이 될수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어린이 예배 대표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저희의 예배를 받아주세요. 한주간 동안 지은 죄들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따르지 못한 것, 친구에게 나쁜 감정을 가졌던 것을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께 건강과 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저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국에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란 사람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다가 3,000년 된 미라에서
곡식단지를 보았는데, 그 안에 완두콩이 있는 것을 보고 한 웅큼 가져다가 영국에서 심었더니,
한 달쯤 지나서, 돌같이 굳어졌던 그 콩이 싹이 나고 잎이 나더니, 콩 열매를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년생 식물도 3천 년 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열매를 맺었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100년 미만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겠는가?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은 후 사후의 세계를 보고 체험했습니다.
반드시 사후에 영원한 두 세계가 존재합니다.
성경에서는 3층천 하늘을 말하는데,
첫째 하늘은 sky 하늘, 새들이 날아다니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대기권의 하늘이고,
둘째 하늘은 Space 하늘,즉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우주 하늘이고,
셋째 하늘은 Heaven 하늘, 즉 해와 달과 별빛이 필요 없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있는 하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핍박하던 사도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때로는 돌로 쳐 죽이는데 가담하기도 했는데,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하늘에서 강한 빛을 보면서 말에서 떨어졌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180도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하늘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Heaven) 이끌려가서” 천국을 직접 보고 왔습니다. 지옥도 반드시 있다. 지옥을 보고 온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들여보낼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으나,
지옥은 본래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위해서 만든 곳이라고 했습니다.(마 25:41)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공의의 하나님도 되신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을 때에는,
심판하여 형벌을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서 18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살후 1:7~9), 베드로도(벧후 2:4), 사도요한도(계 21:8), 다 지옥이 있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였던 죠지 캐리(Dr. George Carey)는(여왕 다음으로 높은 분) “Give Hell" "성직자들이여, 교인들에게 지옥을 가르치라, 성직자들은 세상의 종말과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선포해야 한다”라고(The Times 98. 7. 23) 말했습니다.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라고 하셨다. 무신론자 토마스 스코트경(Sir Thomas Scott)은 죽으면서 “나는 이때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둘이 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전능자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멸망으로 돌아간다”라고 했습니다.
폴 칼슨이쓴 "장로교유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체류하는동안 쎌베투스(삼위일체부인 .의사)를 비롯 58명이처형(주:칼빈은 훗날 뉘우친 듯 했다) 되었고, 76명이 추방된 반면 로마 카토릭 제판소의 책임자 도르퀘마다(Torquemada)가 로마 카토릭교의 종교재판소의 책임자로 있던 18년동안은 10220명이 화형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했다. ........교회사 가운데 가장 어두엇던 날중하나는 1572년 8월24일 이였는데 , 이날 휘그노(Huguenots)라고 알려진 수천명의 불란서 칼빈주의자들이 , 카토릭 군대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성 바돌로매축제일의 대 확살이라고 불리게된 사건이었다. .........성 제르맹(Germain)대 사원의 커다란 종이 8월24일세벽이되기전에 울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즉 불란서 전역을 휩쓸게될 대 확살의 신호였던 것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중 하나는 존경받던 위그노의 지도자 가스파르드 콜리니(Gasprd Coligny)장군이었는데, 그는 성경을 연구 하고,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물리치다가 ,칼빈이 친히 권유하는 것을 받아 드린후, 종교개혁의 신앙을 신봉한 사람이었다. 암살자는 먼저 칼을 던저 콜리니의 몸에 꽂았다. 그리고시체는 창문밖으로 내 던졌다. 마지막으로 그가 죽은 것을 확실하게하기위하여 프로테스탄트의 위대한 지도자인 그의 머리를 베었다.
성 바돌로메의 날의 대 확살 사건에서 종교와 마찬 가지로 정치가 큰 역할을 하였다는데는 의의가 거의 없었다. 왜야하면 ,위그노교도들은 ,스코틀랜드 사람과 다름없 이 군주정치위에 지방자치 단체 두는 것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대확살의 대한 소식이 로마에 알려지자 카토릭 성직자들의 기뻐날뛰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로레인(Lorraine)의 추기경은 소식을 전해준 사신(使信)에게 일천개의 면류관으로 포상하였고, 성 앙겔로(St.Angelo)의 대포는 천둥소리를 내며 기쁨의 예포로쏘았으며,모든 교회당의 뾰죽탑에서는 종소리가 울 려 나왔고, 그레고리 8세는 추기경들과 다른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을 대동하고 로레인의 추기경이 테대움(Te deum), -고대라틴어 찬송으로 감사예배때 불렀음-역자주-)을 부르고 있는 성 루이스(st.Louis)교회를 향하여 긴 행열을 지어 가고 있었다. "...........
불란서의 쟈크 르페브르(Jackues Lefevre)라는 저명한 인문주의자는 감히 이렇게 기록했다. "오직 은혜만으로써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인정해주는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르페브르역(譯) 성경은 불에던저 태워 버렸다. 물론 카토릭측에서 ,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르페브르의 학생중 한사람은 칼빈을 제네바로 돌아오게하는 역할 을 감당한 윌리암 파렛이었다.
불란서에서 400만명이나되는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갔거나 순교를 당한 것으로 추정 된다.(폴 칼슨). 또한 1523년 7월에 헨리 푸스(Henry Voes) 와 요한 에스 (John Esch)는 프로테스탄트신앙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브리셀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의사요 장로교 치리자였던 마이커스 휘트만(Marcus
Whitman)박사는 오리겐주의 인디안들에게 의료혜택과 복음을 전해주려는 욕망에 충동을 받아 오래곤 황야의 오솔길을 넘어 1843년까지 일천명의 이주민들을 데려 갔다. 이주민들은 록키산맥을 지났을 때 ,휘트만 박사부부는 홍역이 전염되고 있는동안 인디안 들에게 살해되었다. 죤 후스(Jean Hus)는 속죄권은 불법이라고 교황에게 대항하다가 순교한 보헤미야의개혁자이다. 1369년 그는 프라그대학을 나온뒤 ,1404년 동 대학의 총장이되어 일찍부터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를 사모하고 , 그의 저술을 연구하면서 대학에서 개혁사상을 강의 했다. 1412년에 십자군동원의 유설대가 유럽을 돌아다니며 교황의 속죄권판매선전이 있자 후스와 함께 개혁사상을 가진 동지들은 크게 격분하여 공개토론회를 열고 반박을 하면서 "교황이나 감독은 칼을 잡을 권리가 없다."하고 "돈은 사죄의 조건이 될 수가 없다.다만, 회개만이 사죄의 조건이며 ,구원 얻을자는 택함을 받은자 뿐임으로 교황도 이것을 알 수는 없다. 더구나 교황에게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주장은 참람하다."고 공격하며 , 군중들은 대 감독의 저택앞에서 시위르르하며, 교황의 명령서를 불에태워 버렸다. 황제는 군중들에 로마교황에게 모욕적 행위를 금지시키고,세 청년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후스는 그 시체를 거두어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안에 장사했다.이로인해 황제가 후스에게 퇴거명령을 내리니 후쓰는 "대심판자 그리스도에게 고소함"이라는 저서를 쓰고, 각지로 다니면서 군중들에게 설교하고 [교회론]라는 큰 저술도 내 놓았다. 교황청은 1414년 12월 에 후쓰를 체포하여 교회론에대하여 심문을 했다. 1915년 7월6일 ,마침내 후스는 이단자로 단정되고 저서는 불태워지고 ,순교장에서 후쓰는 무릎을 꿇고 자기를 사형 하는 적을 위해 기도했다.그들은 "우리는 그대의 영혼을 악마에게 넘겨주노라" 하자 후스는 대답하기를 "나의 영혼은 거룩한 주예수께 맡기노라."했다.
쇠사슬로 목을 매어 끌어내어 형틀에 올려놓고 불을 질르면서 그 주장을 취소하라고 강요했지만 그는 거절 했다."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순교했다. -좁은길로 간사람-에서
◎엔다너쓰는 신앙의 지조 때문에 새들의 먹이가 된 영원한 성녀이다. 초대교회박해가 격심하던때 예수믿는 여자들중에 자기의 신앙의 지조와 함께 육신의 순결을 끝까지 지킨 '영원한 처녀'라부르는 동정녀들이 많았다...... 교회 박해때 이런 여성들이 많이 순교 했다. 시도포리스의 에다너쓰 처녀도 그 중에 한사람이다. 그가 잡혀 서 재판에 끌려가서는 마게시쓰라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악평의 호민관에게 말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옷을벗겨 나체로 끌고다니면서 가죽 채찍으로 매질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자기 신앙지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재판관들은 결국 화형에 처하라고 했고 ,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그것을 기뻐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자들의 시체는 매장되지 않고 들 짐스으이 밥이 되도록 들에 버리게 했다.그래서 들 짐승들이나 개들이 뜯어먹고 , 송장의 손과 발들이 여기저기 흩으러져 굴러 다녔다.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던 불신자들조차 그 잔인한 행동을 증오했다.
이런 박해가 계속되던 어느때 , 하루는 온 하늘이 유달리 명랑해 지더니 허공에 둥근 기둥같은 것이 보이더니 거기서 눈물같은 물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비오는 것은 아닌데 옷은 젖는 듯 했다.
포악 무도한 박해자들 행동에 우주가 참을수 없어 슬피 우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 기록을 쓴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말하기를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 니라 확실한 사실이다."하고 말했다.
- 좁은 길로 간 사람들-에서
*◎*여수반란사건과 손동인 형제의 순교
1948년 10월20일 공산주의 난동이 여기저기서 있었다. 저들은 기성 집단체가되어 있는 교회와 신도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왜정때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고 7년 옥고를 치르고 나온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 ,손동신 형제를 미워하여 푸락치들이 체포하여 인민제판(人民裁判)에 회부 하였다.
"너희들은 예수믿는 놈들이지!"
"네 ,우리는 예수교인들입니다. ."
"너희애미애비도 예수믿는 놈이지!"
"네,아버지는 목사입니다."
"너희들은 학교에서 언제나 공산주의를 비난 하였다지?"
" 나쁜점을 좋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 무엇이 나쁘더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 나쁩니다. "
"이제라도 예수를 버리면 살려줄 터이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오 ,생명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면 나는 죽슺니다. "
"그러면 예수를 믿겠다는 말이지?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이리하여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하였다.
- 한국기독교 해방10년사-에서
◎**손 양 원 목사 순교:
손양원목사는 문둥이 들을 돕던 자이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자를 양아들로 삼을 정도로 천진무후한
신앙의 사람이었건만 공산당은 그를 꼭 죽이기 까지 해야 했던가? 이에 더욱 고발심이 더해간다.
손양원 목사는 부친을 따라 경남 함안 출생이다. 그 동생도 목사이다. 손목사는 부친을따라 6세부터 교회에 다녔고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홀리네스파 노방전도에 큰 감동을 받고 교역에 큰 뜻을 두었다. 여수 애양원 나환자들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일생을 목회했다. 동인 동신이 두 귀여운 자식을 공산 푸락치에게 순교당하고 6.25난리가 일어나 인민군들이 여수,순천 지방에도 밀어닥치니 ,손목사는 자기 목회하는 애양원 나환자 양떼를 버리고 혼자 피난 갈수 없다고 순교의 각오를 세웠다.
애양원 나환자들에게도 좌우익이 생겨 손 목사를 고발하는 나환자가 있어 잡혀 갔다.
1950년 9월 28일 여수 미평 둔덕재에서 조상학 목사등과 함께 순교 했는데 ,손목사의 입술은 인민군 개머리 판에 맞아 깨저 있었다고 한다.
-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외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목사의 순교
프로테스탄트선교사로써 이땅에 왔다가 순교한 목사는 오직 토마스(Robert Jenemain Tomas 1840-1866)선교사 뿐이다. 그는 1840년 9월7일 웨일스 리야드(Wales Rhayade)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대학의 뉴 칼레지를 졸업하고,63년 6월4일 고향인 한조베(Hanover)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24세 청년으로 신혼 신부를 데리고 만리 이역인 중국선교차와서 기후와 식사와 생활형편이 맞지 않아 부인은 풍토병에 죽고 말았다. 그것은 토마스에겐 이겨내기 힘든 슬픔이었으 나 바울처럼 기도로서 선교의 일을 다시 가다듬었다.
이때 천주교인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崔善一)두 사람을 맞나 천주교인들이 큰 박해를 받고 있으며 ,선교사의 내도를 갈망한다는 말을 듣고 한국인이 한문성경(漢文聖經)을 읽는것도 알게되자 한국 선교를 결심 했다. 1865년 9월4일 중국 산동성을 떠나 13일에 한국 서해안에 있는 창린도(昌麟島) 자라리 근포리에 도착, 두달 반을 있다가 일단 돌아 갔다가 이듬해 미국 상선 '제너랄셔먼(Gemeral Sheman)호를 타게 됬는데 한강을 거슬러 올라 갈 계획이었는데 한국 지리에 서툰 나머지 ,대동강 하류인 강서군 초리면포리(江西郡 草里面 浦理)에 닻을 내리고 , 좀더 올라가 석호정과 만경대에 상륙하여 100여경의 성경을 주민에게 나눠 주었다. 8월 25일 봉황진 에 이르렀다,원채 큰배가 그만 모래사장에 박히게되어, 이로인해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셔만호는 관군에 불타 버리고 토마스는 겨우 육지에 올라 끝까지 많은 성경을 주민에게 뿌리다가 조선땅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참수형(斬首刑)을 당하여 9월 2일저녁 그의 나이 27세에 순교를 당하였다.후인 들이 그 한을 어찌 고발하지 안 겠는가? - 토마스목사전기에서 -
◎최초의 한국 개신교 순교자 한경희 목사
천주교는 한국에 선교하면서 선교사 들이나 교인들이 많은 피를 흘려 순교자가 속출하였다. 거기비하면은 개신교는 비교적 순탄한 선교를 하였다고 본다...........
여기 소개하는 한경희(韓敬禧)목사는 1881년 평북 용천 출신으로 1914년 제7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전도에 헌신하였다. 총회 파송 북 만주선교사로 부임,,김창근씨등 제직 4인과 함께 눈 썰매를 타고 오소리 강변 요하현으로 가다가 1월4일 공산비적(共産匪賊)에게 잡힌바 되었다. 한목사 일해을 붙잡은 공비중에서 중국인 공비는 돈 천원을 요구했으나 ,조선인 공산당원은 목사인 것을 확인하고는 마침내 한목사를 총살하고 얼어붙은 강을 깨고 시신을 넣었다. 한 목사는 순교하기 직전 "오 주여 이 작은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세 번 외치고 순교의 제물이 되셨다 한다. - 김인서 저작전집5권-에서
◎순교의 피로 계승한 한국교회
성경에 기록된 사도야고보와 집사스데반의 순교의 피가 2000년간흐르고, 한국땅에는 토마스목사 순교의 피가 (1866.9.2)대동강변에 이르더니 ,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핍팍정책(주로신사참배)과 ,8.15광복이후 38이북에서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의 탄압으로 많은 순교자들이 났으며,특히 6.25사변을 통하여,허다한 순교자들이 배출 되었다. 순교하신 분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그 중에 기억할 다음분들을 소개합니다.
◎*김익두(金益斗)목사: 망나니였던 그가 중생을 체험하고 전국에 집회를 인도했던 능력의 종.
김익두목사는 황해도 안악구 형촌리에서 1874년 11월3일에 출생,부유한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친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16세된해에 서울로 과거보러 올라 갔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조숙한 그는 18세에 결혼한 후에도 주색에빠저 기생집에 다니는등 진짜 부랑자가 됬다. ...장날아면 장보러 오는 장꾼들이 빌기를 "오늘 장에가서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 주세요!"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27세때 친구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 서양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는데 ,그가 소안론 선교사였다.(일설엔 하치순전도인의 전도로 믿었다고도 한다.)
........김익두는 1900년 봄,회개한 그는 어느날밤에 문을 걸고 3일동안이나 기도했다. 그리고나서 자기 처가에가서 장모에게 "김익두가 죽은거 압니까? "라고 말했습니다.......중생을 체험하고 교인이 된후의 김익두는 울기를 잘하는 인간으로 변했다.
감격의 눈물로 돌아온 그를 본 모친과 아내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 했다.
1970년 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하루는 앉은방이를 보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그러나 앉은뱅이는 눈만 말동거리고 앉아있는 것이다. 실패했다.
망신한 그는 그후 목사가 된후 기도 또 기도 , 길 걸으면서 기도했다. 어느날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와 교회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 동리 부자집을 찾아가 부탁했더니 승낙받고 신천교회를 지었다한다. 김익두 목사는 그 이후 신유(神癒)의 은사를 받아 많은 병자를 그의 기도로 응답 받았다한다.
1920년에는 한국 장로교 9대 총회장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 , 이어 6.25사변이 일어나 1950년 10월14일 국군이 북진하여 신천지방에 가까워 왔을 때 김익두 모사는 너무기뻐 50명 교인들과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데 , 그 때 후퇴하던 공산 인민군 몇 명이 달려들어 김익두 목사와 교인 5명을 성전 강대상 앞에 세워놓고 따발총으로 사살하고 도망첬다. 김목사가슴에는 총알 두 개가 관통해서 피에 젖어 제물이 되었다.
_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여수반란사건과 손동인 형제의 순교
1948년 10월20일 공산주의 난동이 여기저기서 있었다. 저들은 기성 집단체가되어 있는 교회와 신도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왜정때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고 7년 옥고를 치르고 나온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 ,손동신 형제를 미워하여 푸락치들이 체포하여 인민제판(人民裁判)에 회부 하였다.
"너희들은 예수믿는 놈들이지!"
"네 ,우리는 예수교인들입니다. ."
"너희애미애비도 예수믿는 놈이지!"
"네,아버지는 목사입니다."
"너희들은 학교에서 언제나 공산주의를 비난 하였다지?"
" 나쁜점을 좋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 무엇이 나쁘더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 나쁩니다. "
"이제라도 예수를 버리면 살려줄 터이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오 ,생명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면 나는 죽슺니다. "
"그러면 예수를 믿겠다는 말이지?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이리하여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하였다.
- 한국기독교 해방10년사-에서
◎**손 양 원 목사 순교:
손양원목사는 문둥이 들을 돕던 자이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자를 양아들로 삼을 정도로 천진무후한
신앙의 사람이었건만 공산당은 그를 꼭 죽이기 까지 해야 했던가? 이에 더욱 고발심이 더해간다.
손양원 목사는 부친을 따라 경남 함안 출생이다. 그 동생도 목사이다. 손목사는 부친을따라 6세부터 교회에 다녔고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홀리네스파 노방전도에 큰 감동을 받고 교역에 큰 뜻을 두었다. 여수 애양원 나환자들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일생을 목회했다. 동인 동신이 두 귀여운 자식을 공산 푸락치에게 순교당하고 6.25난리가 일어나 인민군들이 여수,순천 지방에도 밀어닥치니 ,손목사는 자기 목회하는 애양원 나환자 양떼를 버리고 혼자 피난 갈수 없다고 순교의 각오를 세웠다.
애양원 나환자들에게도 좌우익이 생겨 손 목사를 고발하는 나환자가 있어 잡혀 갔다.
1950년 9월 28일 여수 미평 둔덕재에서 조상학 목사등과 함께 순교 했는데 ,손목사의 입술은 인민군 개머리 판에 맞아 깨저 있었다고 한다.
-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노병제집사-"천사날 부르니....."찬송부르며스스로 물에 빠진 순교자
1950년 한국의 6.25사변때 ,전남 영광군의 피해는 가장 막심했다. 군내 전체인구 10만명 가량중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된 수는 39,960 명이나 됬다. 특별히 기독교인의 피해가 컸다. 인민군 빨지산이 서해안으로 탈주하면서 피해는 더욱커.........결국 영광읍교회는 불에타 전소되고 교인 32명이 순교했다. 법성포교회는 김종인 목사와 교인24명이 순교했다.염상교회는 건물이 전소하고 김방호목사 일가족과 허장로부부와 교인 73명이 순교했다........백수교회는 53명이 순교하고 ,야윌리교회는 어린아이들까지 64명이 전멸했다. 원창권 목사는 11세아들의 손목을 피난가다가 잡혀 아들과 함께 순교했는데 ,시체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목사님의 부인은 임신 9개월이었는데 배를 갈라죽이고 ,군인으로 나간 아들 하나만 남고 가족이 전멸 했다. 염상교회의 노병재(盧炳在)집사는 함께 붙잡힌 교우들과 같이 어두운 밤중에 서해 바닷가 수문에 끌려나가 폭도들에의해 한 사람씩 가슴에 큰 돌을 안겨 줄로 매고 수문에 물이 가득 찼을 때 바다에 던져넣어 죽였다.
노병재집사의 차례가되어 끌려나가 수문 위에 서니 폭도들은 그의 가슴에도 돌을 묶으려함으로 ,"나는 돌을 묵지 않아도 된다. 나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을테니 걱정마라."면서 수문위에 비장히서서 마지막 찬송을 불렀다. "천당에 가는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그는 마지막절 "야곱이 잠께여 ......"까지 부르고 스스로 바다에 뛰어 들어 찬란한 순교를 했다. 그가 물 속에 들어 간뒤에도 한참동안은 찬송소리가 계속 들렸다고 한다.
폭도들은 여자들을 끌어내어 바닷가에 꿇어 않쳐놓고 한사람은 머리채를 잡아끌고 또 한사람이 일본도(刀)큰 칼로 목을 쳐서 죽였고,칼에 묻은 피를 폭도는 빨아 먹더라 한다.
한 젊은 여자는 집에 먹는 아기를두고 끌려왔는데 젖이 퉁퉁불어올라 아기를 못잊으며,원한의 차서 맞아 죽는 모양은 눈뜨고 볼수 없는 장면이었다. 밤이면 으스름 달밤에 사람들을 끌고 나와 방망이로 머리를 처 죽이는 소리가 멀리서 듣기에 "퍽,퍽"하며 떡치는 소리 같았다고 한다.
지금도 염상교회 앞 바닷가에는 순교자 들의 무덤이 가지런히 길게 뻗어 있다. 6.25때 한동안 많은 사람이 죽어서 바닷가 물빛마저 피에 젖어 붉었다고 한다.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
어느 종교이던지 나름데로 순교자는 있어왔다. 기독교는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인간의 죄로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 인간은 어디서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가는 가는 길을 분명히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성경 ,예수십자가로 구원 받게된 ,이 기쁜 구원의 복음(goodnews)소식을 전하고자 사랑을 품고 선교하던 사람들을 무참히 순교시킨 사건들이 들이 역사 속에 물드려져왔다. 로마황제들에게, 각 나라 피팍자들에게, 심지어 저들도 순교를 당했지만 신교를 박해하고 순교시킨 카토릭의 교황들, 공산 주의자들, 일본제국주의 자들에게 순교한 순교자들 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무어라고 하고 있을까? 요한 계시록에서 분명히 한을 품고 있음을 봅니다."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라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분명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것이지만 , 우리에게 복음이 물려지게되고, 그로인해 주님을 알게되고 믿게되고, 주의 오시는 날(parousia)에 평안으로 맞게 되게된 은혜앞에 ,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그 한을 어찌고발하지 않겠는가!.
이 역사 속에 전부를 밝히지 못할지라도 그분들에게까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한이 풀어지는 통쾌한 날이 이르기를 기원하면서 순교한자의 한을 고발합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메,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다데오,시몬,맛디아(가롯유다대신),사도요한은 이론이있지만 제자들은 모두 순교자였습니다.
초대 교회 박해와 순교는 처참했다. 로마 네로황제는 로마시를 불질러놓고 그 일을 기독교인에게 죄를 덮어씨워 순교케 한 인물이다. '네로'(Nero,37.12.15-68.6.9)는 폭군의 대표자다. 로마의 제 5대황제로서 64년 7월에 로마시에다 부하 군인들을 풀어 불을 지르게하고 , 미치광이처럼 바라보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고며 광란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방화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 많은 교인을 방화혐의로 확살하고, 이때 베드로도 십자가에 거꾸로못 박혀 순교하였고, 바울은 참수형(斬首刑)을 당해 순교하였다. (로마史에서)
성 폴리갑은 예수님이 사랑하던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로마시대 소 아시아에서는 신자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하는 이가 많았다. 서머나에서는 12명의 신자가 붙잡혀 그중 한명만 배교하고는 나머지는 모조리 사나운 짐승의 밥이되어 순교했다.
군중들은 "폴리갑을 끌어내어 죽이라.!"고 소리 질렀다. 폴리갑이 끌려나가 원형극장에서니 재판관은 말하기를 "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를 저주하고, 로마황제를 경배하면 너를 노아 주리라. "고 했다. 폴리갑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하기를 "나는 오늘까지 80여년동안 예수그리스도를 섬겨왔습니다만 , 예수님은 단 한번도 내게 손해되는 일을 않으시고, 도리어 가지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큰 은혜받은 주님을 내가 어떻게 저주할 수 있습니까?"했다. 그리고나서는 오히려 재판관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 했다.....그러나 큰 기둥에 폴리갑의 몸을 동여매고 불을 질렀다. 그는 불타는 불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저 같은 것을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해주시고 ,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참여시켜주시는 이 날을 감사 찬송드리나이다."하고 기도 했다.
이때 이상한 것은 불길이 폴리갑의 몸을 태우지 않고 좌우로 갈려 그의 몸을 보호하는 듯했다. 놀란병사한 사람이 창으로 그의 몸을 찌르니 피가 흘러 마치 큰 비를 맞은 듯 불이 꺼졌다. 그리고 폴리갑은 찬란한 순교를 하였다. ("좁은길로 간 사람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