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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설교

12월 절기설교 대강절 설교 (오실 그분을 사모하라 )

by 온유랑 2018.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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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절기설교 대강절 설교 (오실 그분을 사모하라 )

 

 


제목 :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말씀 : 마11:2-6

1.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기대속에 살아갑니다. 기대가 없는 인생은 허탈과 좌절에 빠져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가을에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누가 힘들여 농사를 짓겠습니까?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어떻게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겠습니까?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하면 월급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없으면 누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기대를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열심히 살아갈 때에 삶에 활력과 의욕이 넘치게 되고, 또 그렇게 의욕을 가지고 활기차게 살아가면 그 기대도 좋은 모습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대를 가지고 의욕적으로 활기차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그래야 합니다. 혹시 세상에서는 별로 기대할 게 없다해도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가 있지 않습니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기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이같이 가슴 설레이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벧후3:1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나님의 날, 주님의 날, 예수님의 날을 사모하며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은혜와 기쁨과 감격과 기대속에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대를 가지고 사십시오. 세상에서도 긍정적이고 좋은 일을 생각하며 기대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메시야에 대한 기대, 천국에 대한 기대속에서 그날을 준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찬송도 좀 활기차게 하고, 말씀을 들을 때도 아멘아멘하면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가장 큰 기대와 소망속에 사는 사람답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기대도 기대 나름입니다. 확실한 기대, 우리가 원하는 진정으로 좋은 것을 분명히 가져다 줄 기대를 가져야 우리가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복권만 기대하고 사는 인생, 노름판에서 대박을 기대하면 사는 인생, 사기나 투기꾼이 되어 한탕을 기대하고 사는 인생에게 주어질 것은 허무와 절망과 고통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설령 그런 미련한 기대는 아니더라도 그저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에 대한 기대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기대는 결코 세상사는 동안도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고통만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대를 갖되 확실히 은혜와 기쁨을 줄 수 있는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영원히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기대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거야 말하나마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만이 우리 인생의 기대를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속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었던 만큼 메시야에 대하여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메시야에 대한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마3:10-12절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즉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것처럼 메시야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세상을 심판하여 알곡은 곡간에 모으고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그는 메시아가 속히 오셔서 지상천국을 건설해 주실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왜 그렇게 메시야에 대한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그 당시 사회상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모든 영역에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아래서 백성들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도자들도 부패하여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백성들을 무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추한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야인(野人)으로 생활하면서 메시아가 하루속히 오셔서 그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 정도면 물질적으로 풍요롭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에게 억압당하는 것도 아니고 착취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별다른 문제없이 사회는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이 사회는 지금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시대입니다. 향락의 문화가 이 사회를 썩게 만들고 있습니다. 개인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가정이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되어 있습니다. 성적순결함이 더 이상 고상한 가치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거짓이 진리인양 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이나 진리나 이런 것들보다는 그저 육체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일에 더 관심이 많고, 그래서 세상의 빛이나 소금이 되지 못하므로 세상 사람들에게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은 제아무리 물질 문명이 발달해도 안됩니다. 제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안됩니다. 제아무리 교육수준이 높아져도 안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심령이 새롭게 될 때,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될 때만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의 우리의 기대는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37:9에서는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추구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끊어질 것이고 오직 주님을 기대하며 그 안에서 행하는 자는 영원한 기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희망은 과학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권력도 아닙니다. 철학도 아닙니다. 인류의 진정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돈이나 명예나 출세나 일확천금이나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기대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 속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진정한 생명과 평안과 위로에 대한 기대속에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더욱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례요한이 이렇게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늘 우리는 그에게서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은 메시야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기다리는 메시아와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실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분을 위해 온전히 준비했더라면 그는 결단코 실망할 일이 없었을 터인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메시야가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지금 그는 실망하고 답답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 2,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오시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악의 세력들은 물러가고 정의사회가 구현될 줄 알았습니다. 로마의 세력을 물리쳐주시고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 핍박받고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기쁨의 날이 올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오셨는데도 세상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악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당하기는커녕 도리어 저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당신께서 정말 메시야이십니까? 아니면 앞으로 다른 메시아가 올 것입니까? 저는 어떻게해야 합니까, 이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정말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와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다름으로 인하여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강력한 능력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해 주실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실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그런 기대에 전혀 못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죄와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데는 관심이 없고 고작 해야 죽은 사람 좀 살리고 병을 고쳐주고 천국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웬만한 선지자들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정말 메시아인가, 이분을 계속 따라야 되나,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되나 하면서 갈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한마디로 세례요한의 왜곡된 메시아관입니다. 그는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긴 했지만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낙심하고 절망하고 회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슨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올바른 메시아 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메시아관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저 내 생각대로, 내 욕구대로 잘먹고 잘살며 평안하게 해 주실 그런 내 입맛에 맛는 메시아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보여주신 메시야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말씀대로 믿어야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이시오, 그것만이 진정으로 구원받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는 어느 날 예수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만류하며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그러니까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이 돌아가시면 지상천국은 언제 이루구요? 안됩니다. 결코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런 말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너는 사람의 생각대로 나를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내가 이 땅에 온 의미를 설명해 주었건만 너는 네 생각대로 나를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라 마귀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에 의하여 각색되어진 메시야가 아닌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시야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길 바랍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충족시켜주는 메시야, 그저 마음 편하게 잘먹고 잘살게 해 주실 메시야, 내 입맛과 내 기호를 맞추어 줄 메시야가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을 살리는,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실 그 진정한 메시야를 만나고 그분의 은총을 기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죄와 사망과 어둠과 절망을 깨트리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그런 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정말 진정한 생명의 메시야를 만나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가 있습니까? 그 전제조건은 한마디로 자기 부인입니다. 진정한 메시야를 만나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전제조건은 바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앞서 말씀드렸던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다시한번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질문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야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이분이 정말 메시아인지 아닌지 갈등이 생겨서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네가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가 와서 당장 악의 세력들을 제거하고 지상 천국을 건설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마는 나는 그걸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든 자, 저는 자, 소경된 자들에게 치유하러 왔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의 영육을 살리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생명과 만족과 기쁨과 희망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네가 생각하고 네가 원하는 메시아만을 생각하며 고민하지 말고 회의를 품지말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메시아, 하나님이 계획하신 메시아를 인정하고 따르면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답변을 들은 세례 요한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 맞아, 분명 이분에게 세례를 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그가 메시야인줄 알라고 하셨지. 그런데 분명 이분에게 세례를 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지 않았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소리가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분이 메시야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왜 나는 이분이 하는 일들을 통하여 이분이 메시야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가, 어찌하여 이분이 하는 일들을 보면서 낙심하고 있는가? 이유는 하나다. 내가 메시아에 대하여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와 내가 생각하는 메시아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거야.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메시아와 내가 생각하는 메시아가 다르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게야. 그러면서 비로소 모든 의문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정말 내가 가는 길이 맞는가? 정말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신가? 그분이 나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 있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 정말 하나님은 계신가?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이런 고민이 있으신 분이 있습니까?

만약 이런 의문이 남아 있다면 문제는 전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둠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지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성의 한계이고, 지성의 한계이고, 경험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어둠과 의문을 사라지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자기를 부인하면 마침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우물속을 벗어나면 마침내 드넓은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캄캄한 동굴속을 벗어나면 마침내 찬란한 빛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한사코 우물속에 갇혀서, 동굴 속에 갇혀서 세상은 좁다고, 세상은 어둡다고, 세상은 어차피 이런 것이라고 여기서 살다 죽으면 띁이라고 여기며 동굴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그 찬란한 빛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기대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기대를 갖되 허황되고 허무한 기대가 아니라 올바른 기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장 확실하고 올바른 기대인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속에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께 대한 기대를 갖되 내가 각색한 기대가 아닌 주님이 알려주신 주님의 모습을 바르게 알고 그 주님이 주시는 은총을 기대하며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자신의 무지와 죄를 알고 다만 그분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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