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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표기도 하는 법 

찬양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몸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 !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은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수 있는 지

혜를 주신 주님께 찬양을 드리옵나이다.

 

  감사

   주님이 아니었던들 아직도 사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저희 나약한 존재들을 사랑하시어

사망의 늪에서 건져 생명 길로 이끌어 주시고 또한 오늘은 일주

일간 세상에서 살면서 상처받은 심령들이 쉴 수 있도록 주님의

거룩한 전으로 불러내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옵나이다.

 

  회개

  주님께 이처럼 큰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저희는 욕심에 사

로잡혀 은혜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축복을 받으려고

발버등치며 내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형제와 다투고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죄인들이옵니다. 주님, 이런 저희의 입술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주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읍

니가? 하지만 주게서 저희를 모른다고 외면하시면, 저희는 의

지할 곳이 없나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 넓으신 아량으로저희

에게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고 참회하는 심령을 

 

  성도간의 화합을 위하여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

고 말씀하신 주님 ! 저희들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저희자

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형제를 미

워한 적이 없읍니까? 내 눈속의 들보는 빼내지 않고 형제의

티를 나무라고 비방하지는 않았융니까? 형제의 일이 잘 되어가

는 것을 보고 시기하지는 않았읍니까?

   주님, 저희는 형제의 상처받은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제 멋대

로 비방하며 나무란 적이 너무도 많습니다. 저희는 제 자신의잘

못을 돌이켜 보기 보다는 형제를 비방하고 내 잘못을 은폐시키

기 위해 형제에게 책임을 전가하곤 하는 죄인들이융니다.

   이 시간 주님께 회개하고 저희들이 미워한 형제에게 마음 속

으로나마 용서를 빌 수 있는 기회로 삼아주시옵소서. 그리 하여

저희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몸된 교회

에 충성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융소서.

   주님, 저희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주님께 헌신하며 형제를 사

랑하는 일에 이해타산을 따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멸망

 당할 자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따름 으

 로써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읍소서.

   주님, 저희는 부족한 죄인들인지라, 무의식중에 형제에게 상처

 를 입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괴로와하고 있는 형

 제의 상처를 치료하여 주셔서 건강한 심령으로 목청껏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이제 저희가 그동안 불화하였던 모든 일들을 십자가에 장사지

내고, 미워했던 형제에게 용서를 빌고 그동안의 잘못된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화합하여 교회에 덕을 끼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님, 믿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의 일을 해 나가

지 않고 서로 미워하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와 흘리신 피가 헛

된 것이 되어버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갈래갈래 찢기는 상처

를 받게 되는 것임을 저희들이 깨달아 먼저 화합함으로 주님의

몽된 교회를 건강하게 지켜 나가는 믿음의 권속들이 될 수 있도

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가 싸치야 할 상대는 세상의 악한 권세이니 저희들

이 받은 바 은사에 합당하게 자기의 처지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

며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몸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늘 지켜

주시옵소서.

 

   목사님을 위하여

   주님, 오늘도 애타게 저희 양들이 서로 화합하며 서로 사락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기를 간절

히 바라며 간구하시는 목사님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셔서 저희 교

회에 사랑이 넘치며 형제끼리 서로 상대방을 섬기는 귀한 은혜가

충만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직도 심령이 쪼개지지

않은 성도들 있으면, 주님께서 목사님의 말씀가운데 능력으로 임

재하셔서 그들의 심령을 쪼개어 주시고 아직도 자기의 잘못

을 깨닫지 못하는 싱령이 있으면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들의 마음속에 지혜의 영을 더하여 주셔서 자기의 잘못을 깨

닫고 주님 앞에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주님께서 목사님을 사랑하셔서 주님의 장막에 거하

 는 축복을 내려주시고, 건강을 지켜주시고 가정을 지켜주셔서

 육신과 세상의 근심에 시달리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만 의지하

 는 주님의 귀한 사자님이 되게 하옵소서.

    예배를 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 저희들이 한 마음으로 드리는 이

 예배를 받아 주시고  저희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찬송에 귀를

  기울여 주석서, 저희 심령을 주님의 크신 은혜로 채워주시옵소서.

     주님,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서, 육신의 질병으로 인하여서, 흑

  은 출타중이어서 주님의 제단에 오르지 못한 심령들 있읍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들과 동행하여 주석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심

   령들에게는 상처를 싸매시는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육신의 질병

  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심령들에게는 주님의 권능의 오른팔로 병

   을 고쳐주시며, 출타중에 있는 심령들에게는 주께서 그 곳까지

   동행하셔서 무사히 돌아을 수 있도록 그 길을 예비하여 주시옵

   소서 .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기쁨과 사랑이넘치는 잔치가 되게 하

   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며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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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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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이기는 삶 / 마태복음 625- 34

마태복음 936절을 보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는 믿지 않고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구경하기 위해서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무리들이라고 하시며 이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기진하다라는 말을 사전을 찾아보면 극도로 쇠약해지다, 기력이 다하여 힘이 없어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는 다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목자로 신뢰하지 못하여 인생을 맡기지 못하고 돈 때문에, 건강 때문에, 사업 때문에, 사람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사람을 우리 주님은 목자 없는 양으로 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보시며 우리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를 영어로 ‘Com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함께라는 의미의 ‘Com’느끼다.’는 의미의 ‘passion’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로 함께 느낀다.’ 혹은 함께 고통스러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예수님께서 양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양의 방황을 자신의 방황으로 함께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양의 눈물을 자신의 눈물로 함께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키울 때 자녀가 중요한 시험을 준비한다든가, 또는 진학에 실패했다든가, 사춘기 방황을 하면서 힘들어 한다든가 하면 그런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함께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이것을 ‘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를 목자로 신뢰하지 못하여 마치 목자가 없는 것처럼 양들이 방황하면, 양들이 두려워하면, 양들이 슬퍼하면, 양들이 좌절하면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아파하신다는 것을 여기서 한 단어로 불쌍히 여기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염려가 충만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당장 제 자신만 보더라도 큰 걱정거리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북부에 있는 로키산맥공원의 높은 봉우리 중 하나인 높이 4,348m롱의 봉우리라는 곳에는 지금 현재 400살이 넘는 거목이 하나 쓰러져 있다고 합니다.

이 거목은 지난 400년 동안 자라면서 벼락을 14번이나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던 나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에도 꿋꿋이 버텨온 나무라고 합니다.

그런 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원인을 살펴보니까 언제부터인지 조그마한 딱정벌레들이 이 나무에 기어 들어가 나무의 속을 갉아먹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 나무는 그 조그마한 딱정벌레들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안에서부터 병들고 썩게 만드는 대표적인 원인을 성경은 염려라고 합니다.

염려를 영어로 ‘worry’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물어뜯다.’, ‘목 졸라 질식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임팔라 같은 초식동물을 잡을 때 보면 목을 물어서 질식시킵니다.

염려가 이렇게 우리를 질식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려를 많이 하면 숨을 쉬어도 마치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그 중에 7절을 보니까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뜻을 물어보니까 예수님께서 18절로 19절에서 그 말씀의 뜻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여기서 말하는 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가시떨기라고 하는 염려가 함께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염려가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기운을 막아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질식시키고 마비시켜 버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염려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마귀의 공격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때로는 핍박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고난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유혹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들이라고 우리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공격이라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의 삶을 가장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염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몽둥이로 맞으면 겉으로 표시가 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상처가 심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질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숨을 못 쉬는 것입니다.

이 질식은 겉으로 아무런 표시가 없기 때문에 죽어야만 압니다.

그렇지만 몽둥이로 한 대 맞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질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마귀는 염려로 사람들을 질식시켜서 우울증에 걸리게도 하고 공황장애가 오게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염려는 가장 조용한 암살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염려에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염려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계십니다.

방금 읽었던 이 짧은 본문 가운데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와 여러분 중에 염려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으니까 염려하는 것이지 염려하는 것이 좋아서, 염려하는 것이 취미라서, 염려하고 싶어서 염려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염려하고 싶지도 않고,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도 왜 염려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대답하기를 염려는 하나의 뚜렷한 실체요, 하나의 강력한 힘이요,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가 하나의 힘이요 세력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왜 염려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염려는 마치 우리가 전에 살펴본 천로역정에 나오는 의심의 성에서 사는 절망거인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가진 뚜렷한 실체요, 하나의 강력한 힘이요,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마음을 쪼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쪼개진 마음을 야고보서 16절로 8절을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여기 보면 쪼개진 마음두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렇게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을 또한 의심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염려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이 갈라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본문 23절을 보면 갈라지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여기서 눈이 나쁘면이라는 말씀의 원문을 보면 초점이 여러 개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분이 여기 서 있는 저하고 저쪽 끝에 있는 신디를 동시에 한 번 보세요.

 

하나라도 잘 보입니까?

 

눈이 사시(斜視)가 되어서 하나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가 바로 눈이 나쁜 상태’, 다시 말해서 초점이 여러 개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마음의 초점이 여러 개로 나누어지면 그것이 염려의 원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염려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내 힘만으로는 이 염려를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맞아! 이제부터는 염려하지 말고 살아야지그런다고 염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염려의 문제, 이 걱정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살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 나오는 내용이 원인이 되고 뒤에 나오는 내용이 결과가 될 때 사용됩니다.

 

그러면 앞에 나오는 본문 24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즉 우리는 돈의 신인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25절에서 그러므로라고 하고는 결과를 설명합니다.

 

즉 우리는 돈의 신인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너희 앞에 있는 그 물질의 신 맘몬과 여호와 하나님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겨야만 한다. 만약에 지금처럼 하나님과 맘몬 신을 겸하여 네 삶의 주인으로 선택한다면 너희는 평생 염려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가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데는 근거가 있습니다.

 

본문 30절 뒷부분을 보면 염려가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제가 생각하기에는 염려가 많은 것은 소심한 성격 때문인 것 같은데, 마음이 약하고 여려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 소심한 자들아!” 또는 이 마음이 약하고 여린 자들아!”라고 책망하셔야 맞는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적을 때 염려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염려의 문제를 믿음의 문제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돈의 신인 맘몬을 선택할 때 생기는 것이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염려로부터 100%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100% 염려로부터 자유 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매 순간 순간마다 환경에 짓눌리고, 염려가 나를 찾아올 때 그것들을 그대로 방치해 놓고 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염려가 생길 때 이 염려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방법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염려를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죽어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구원의 확신을 말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재물의 신인 맘몬 신을 더 따르고 섬길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 염려라는 감정이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때 생기는 것이라면 이 염려라는 무서운 실체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물질에 빼앗겼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31절로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다 보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기의 능력, 자기의 경험, 자기의 힘, 자기의 주먹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우리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려움이 찾아오고, 위기가 찾아올 때 이 모든 것들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항상 불안합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하지만, 겉으로는 큰소리치지만, 겉으로는 웃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늘 환경에 짓눌려 사는 게 이방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힘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사는 사람인 우리의 삶의 태도가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과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5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여기서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는 말씀을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because he cares for you.”

 

여기 보면 ‘care’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마치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아기 엄마가 온 정성을 다하여 돌보는 것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고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돌보고, 우리를 ‘care’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과 똑같이 염려할 수가 있느냐고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 없는 고아 아이가 내일은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무엇을 입을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그 아이 옆에서 여러분의 자녀가 나도 내일 뭘 먹을 수 있을까? 내일 입을 옷이 있을까?” 그러고 똑같이 고민하고 있다면 그 모습을 보는 부모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답답하고, 화나지 않겠습니까?

 

염려하고 있는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염려의 반대말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에게 이런 자존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까짓 것 물질 좀 없다고, 그 까짓 것 환경 좀 어려워졌다고, 그 까짓 것 몸이 좀 아프다고, 그 까짓 것 사람이 나를 좀 떠났다고 자기 자신을 너무 초라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안다면 우리가 이런 하찮은 것 가지고 평가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본문 28절로 3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가지는 긍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그다지 잘생긴 것도 아니고, 내가 유능한 것도 아니고, 내가 남보다 성격이 탁월하게 좋은 것도 아니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꾸 여러분의 미래가 걱정스럽고 불안하십니까?

 

그러면 로마서 832절을 외우시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셨는데 그 까짓 것 내게 필요하다면 뭔들 안 주시겠나?’

 

이런 믿음과 배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평안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끊임없는 돌보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신뢰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눈동자같이 돌보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는 삶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지 않는 삶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사는 사람은 평안하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만 놓고 방치하셨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고단하고 불안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본문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내가 이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할 때 나를 짓누르는 염려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배우자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천박한 배우자를 만나면 내 생각의 중심이 그 천박한 배우자를 닮아갑니다.

 

아주 고상한 배우자를 만나면 내 생각의 중심이 그 고상한 배우자를 닮아갑니다.

 

믿음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내 믿음도 믿음이 좋은 배우자를 닮아 좋아집니다.

 

믿음이 없는 배우자를 만나면 내 믿음도 믿음이 없는 배우자를 닮아 잃어버립니다.

 

하물며 내가 세상과 짝하여 살아간다면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였고, 전에는 세상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다면 하나님의 영향을 받고 난 후에는 나의 시선과 나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현재 나의 신앙의 중심축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신앙의 중심축이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신뢰하며 사는 사람은 이렇게 찬송하는 삶을 삽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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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예배설교

여러 가지 시험

양을 키우는 목자는 염소를 함께 집어넣습니다. 양은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두면 병에 자주 걸립니다. 이런 양들 가운데 염소가 있으면 양들 사이를 헤집고 다닙니다. 이때 양들은 뿔 달린 염소를 피해 도망 다니며 저절로 운동을 해 건강해집니다.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도 자녀들을 강한 믿음으로 키우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시시각각 찾아오는 여러 시험이 바로 우리 삶 가운데 염소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이겨내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어느새 우리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그 고난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을 연단하는 은혜의 손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사도 야고보도 같은 권면을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고보서 1:2)

하나님의 모든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훈련을 위한 시험입니다. 첫째, 이런 시험이 오면 기쁘게 참고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의 유익을 위한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도움 받을 사람도 만나게 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기대하며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른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야고보서 1:12)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사탄의 유혹(야고보 1:13)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속지 말고 즉시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유혹이 찾아올 때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7)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를 타락시키기 위해 사탄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사탄은 그 사람에게 커다란 금덩이를 보여줬습니다. 그가 눈도 깜빡하지 않자 다음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냈습니다. 역시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그의 질투심을 자극했습니다. “당신의 경쟁자가 방금 자네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네.” 그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고 화를 내면서 자기 믿음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성장시켜 결국에는 큰 상을 주시기 위해 인생길에서 여러 가지 염소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굳센 믿음으로 나아가는 은혜로운 기회로 삼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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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고난 주간 예배 설교                a
 
Passion Week Worship preaching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 중 열심있는 수제자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신을 예언하실 때도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통해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우리는 약한 자입니다(롬 5:6) -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과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승리의 주님,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인 것입니다.

  ②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넘어집니다(롬 8:24,25) - 우리가 복음을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받지만 기쁭으로 인내하여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도안 겪게 될 수많은 고난에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③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고후 12:9,10) -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는 크고 작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이 사실을 더 절 아십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함으로 실패자가 되었지만, 다시 회개하고 일어나 사도직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을 향해 가다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 넘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그러면 승리의 주님이 연약한 당신을 이끌어 승리하는 삶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실패자 가룟 유다(마 27:3-8)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봄으로 주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합시다.

  ① 육신이 비참하게 주었습니다(5절) -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게 한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스스로 목매달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 얻은 은 삼십은 그가 죽은 후 그의 묘지를 사는데 쓰여졌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세상적인 욕심의 결국은 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② 명예가 죽었습니다(6-8절)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된 이름은 그의 명예를 죽일 뿐입니다. 기룟 유다의 이름은 그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해 2000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영원히 저주의 대명사로 불려질 것입니다.

  ③ 영혼이 죽었습니다(약 1:15) -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죄는 진정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님은 그가 돌이켜 주님 앞에 회개했다면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했을 뿐입니다. 이에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잠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가다 돌이키지도 못할 인생의 영원한 실패자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을 잘 따라 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따라갑시다. 혹 세상적인 유혹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노선에서 잠시 빗나갔을지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옵시다. 승리의 삶을 주시는 주님께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사 53:4-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도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고난 주간을 맞이해 이땅에 오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① 고난 받은 예수님(4절) -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의 백성들의 더러운 죄로 인해 조롱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② 버림 받은 예수님(5절) -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인간들은 오히려 욕하며 배척했습니다. 똫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 처절한 배반을 경험하셨습니다.

  ③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6절) - 죽음은 범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아무 흠도, 죄도 없는 깨끗한 주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2000년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십자가 죽음의 사역을 믿기만 하면 모든 자들이 다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면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전화 위복(행 9:4; 고후 12:7; 빌 1:13)   

  예수님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사역을 마치신 후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감사했던 바울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깊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소경됨을 인해 영적 눈을 떳습니다(행 9:4) -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잠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울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빛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육체의 한 지체를 잃음으로 그는 영혼을 얻었습니다.

  ② 육체의 가시로 겸손을 배웠습니다(고후 12:7) -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과 크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③ 감옥에 갇힘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빌 1:13) -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이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복음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는 또다른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혼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은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감추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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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설교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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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사순절 예배 설교

제목: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본문:마 7:13,14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물 한방울을 자신의 손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습니다. 우주의 지혜를 바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이 물한방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바다에 비해 물한방울과 같은 그 지혜를 가지고 어떻게 성공하셨습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세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자신의 생활을 즐길 것, 세 번째는 삶의 여유를 가질 것 등 이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자신의 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삶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깊이 성찰해보지 못하고 그저 감정과 세파 속에 휩쓸려가기 쉽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주방기구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한 후 유명해 진 미국의 성공철학자 지그 지글라(zig ziglar)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①정직한 사람 ②인격이 좋은 사람 ③성실한 사람 ④신념이 강한 사람 ⑤충성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세계에서 가장은 많은 강연을 한 인물로 20세기말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경영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통하여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은 그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①주도적이 되라 ②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③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④상호이익을 추구하라 ⑤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⑥시너지를 활용하라 ⑦심신을 단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공의 비법이 어디 있다고 여기십니까?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단언코 믿음과 노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앞서 말씀드린 것들도 다 성공을 위한 중요한 요건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믿음과 노력이 없다면 그 위대한 것도 이루어낼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낸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으며, 설령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성공하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인간적으로 인내하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언가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의 일이나 무언가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피나는 노력을 투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매맞고 주리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힘써 결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몇 번씩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핍박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수함으로 주님의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은 이만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전구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노아 웹스터라는 사람은 웹스터사전을 집필하기 위해 36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두 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시인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시를 보통 99번씩 다듬어 완성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은 무려 10년의 세월에 걸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인생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위인이라고 불리거나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좁은 길을 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험하고 힘들어서 가기 어려운 좁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서 정말 올바르게 성공한다는 것도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일부러 골목길을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넓고 평평하게 잘 닦여진 고속도로로 다니지 말고 일부러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대로로 가지말고 음침한 골목길로 가라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씀입니까?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길을 그저 가기 쉽다고 아무 길로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하기 쉬운대로, 마음에 끌리는대로, 무사안일하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힘든 길이라도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옳은 길, 바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간섭하는 것이 성가시고, 마음에 부담이 가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진리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된 본성 때문에 그 길이 결코 가기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포기하고 그저 편하고 무사안일한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러나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좁은 길은 무엇이며, 넓은 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길을 가야만하는 것입니까?

1. 넓은 길은 육신에 이끌려 자기 마음대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13절의 말씀을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고 넓은 길은 그저 육신의 이끌림을 따라 대강대강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편한대로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길입니다. 그저 죄된 본성의 욕구를 따라 가면되는 길을 말합니다. 사람의 통제나 제재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간섭도 거부하며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가는 길을 말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입니다. 세상물결 흘러 가는대로 적당히 따라 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저 육신이 요구대로 살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않습니다. 죄된 본성의 요구에 따라 때로는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자기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편한 길이겠습니까? 그것이 자유를 누리는 길이겠습니까? 물론 당치 않은 말입니다. 그것은 편한 길도 아니고, 자유의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대로 놀아나는 길입니다. 편하고 좋고 자유로운 길 같지만 그 길은 결코 자유로운 길이 아니라 죄의 노예된 길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결국은 죽음의 길일 따름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뱀의 속삭임에 유혹되어 아담과 하와가 갔던 길인 것입니다.

어느날 뱀은 하와를 찾아가 속삭였습니다. 정말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자 하와가 그렇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은 다시 말합니다. 아니다.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자 하와는 점점 뱀의 꾀임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보니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결국은 죽음과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괞찮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 편한대로 해라. 네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하라.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네 인생 네가 네 뜻대로 살아라. 왜 간섭받고 사느냐? 자꾸만 이래라, 저래라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없다. 그들은 너를 얽어매려고 한다. 너는 자유인이다. 그러니 네 마음에 편한대로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한 사단의 소리입니다. 사단의 소리가 별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역하면 그게 곧 사단이요, 적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6:24절에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또 눅8:21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내 모친이요,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좁은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요구에 충실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을 길로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셨던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실때에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좁은 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하는데 너희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길이 뭡니까?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하나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길은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하게 생명으로 통하는 하나밖에 없는 외길이기에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여러 군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예수님 밖에 없는 외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또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12절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딱 하나입니다. 곧 예수님만이 생명의 문이요, 구원의 문이요, 영생의 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은 많다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굳이 외길만 고집할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남쪽에서 올라가든 북쪽에서 올라가든 아무데로나 올라가도 정상에 올라가기만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나름대로 신을 찾아 올라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소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탄의 소리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소리가 사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라고 하는데 둘이라고 하면 그것이 사탄의 소리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보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사람의 소리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사람이 연구해보니까, 내가 도를 닦아 보니까 그런 것처럼 보이더라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미 예언되어 있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대로 이땅에 오신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만이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고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주장하는 넓을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인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오직 한길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그 좁은 길은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실때에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두번째로 좁은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저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것도 쉽습니다. 죄된 인간의 본성에 따라 대강대강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세상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죽은 삶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 갑니다. 그러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힘차게 거슬러 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인생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길은 결코 녹녹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죄와 무지로 오염된 심령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의 대세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조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치와 이상과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길은 간섭받아야 하고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때로는 알기는 알면서도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우리를 자꾸만 다른 길로 내 몰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진리만이 가득하다면 저절로 진리의 길로 가겠는데 우리 안에 비진리가, 거짓된 것들이, 죄된 것들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것들이 들어있어서 우리를 자꾸만 그 길로 이끌어가려고 하니까 그것들과 싸우느라고 힘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길이고, 좁은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대 사도도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협착하다고 하셨습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어떤 제재를 받는 답답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육신의 요구와 생각과 세상에 보이는 것을 따라하면 쉽겠는데 그것들을 부정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좀 힘이들고 답답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려고 하니까 물질적으로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도 내 혈기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의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희생해야 하고,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 안되고, 힘이 들고, 그래서 가기가 어려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길이 비록 좁을 지라도 가야하고, 답답해도 가야하고, 손해를 봐도 가야하고, 희생을 당해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손해를 보아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만이 진정한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리의 길은 결코 다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둠과 연약함과 무지함 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정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전한 진정한 성공자도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생명을 원하신다면 다수가 가는 길을 좇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신다면, 우리가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면, 더욱이 여러분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기를 원하신다면 진리 편에 서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편에 서 계시기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면 열심히 좁은 길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을 부인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여 생명을 향하려 세상의 조류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모두 세상적으로나 하나님나라에서나 진정한 성공자가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3월 사순절 예배 설교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제목: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본문:마 7:13,14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물 한방울을 자신의 손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습니다. 우주의 지혜를 바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이 물한방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바다에 비해 물한방울과 같은 그 지혜를 가지고 어떻게 성공하셨습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세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자신의 생활을 즐길 것, 세 번째는 삶의 여유를 가질 것 등 이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자신의 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삶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깊이 성찰해보지 못하고 그저 감정과 세파 속에 휩쓸려가기 쉽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주방기구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한 후 유명해 진 미국의 성공철학자 지그 지글라(zig ziglar)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①정직한 사람 ②인격이 좋은 사람 ③성실한 사람 ④신념이 강한 사람 ⑤충성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세계에서 가장은 많은 강연을 한 인물로 20세기말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경영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통하여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은 그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①주도적이 되라 ②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③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④상호이익을 추구하라 ⑤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⑥시너지를 활용하라 ⑦심신을 단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공의 비법이 어디 있다고 여기십니까?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단언코 믿음과 노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앞서 말씀드린 것들도 다 성공을 위한 중요한 요건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믿음과 노력이 없다면 그 위대한 것도 이루어낼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낸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으며, 설령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성공하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인간적으로 인내하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언가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의 일이나 무언가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피나는 노력을 투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매맞고 주리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힘써 결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몇 번씩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핍박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수함으로 주님의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은 이만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전구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노아 웹스터라는 사람은 웹스터사전을 집필하기 위해 36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두 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시인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시를 보통 99번씩 다듬어 완성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은 무려 10년의 세월에 걸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인생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위인이라고 불리거나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좁은 길을 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험하고 힘들어서 가기 어려운 좁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서 정말 올바르게 성공한다는 것도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일부러 골목길을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넓고 평평하게 잘 닦여진 고속도로로 다니지 말고 일부러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대로로 가지말고 음침한 골목길로 가라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씀입니까?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길을 그저 가기 쉽다고 아무 길로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하기 쉬운대로, 마음에 끌리는대로, 무사안일하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힘든 길이라도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옳은 길, 바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간섭하는 것이 성가시고, 마음에 부담이 가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진리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된 본성 때문에 그 길이 결코 가기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포기하고 그저 편하고 무사안일한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러나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좁은 길은 무엇이며, 넓은 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길을 가야만하는 것입니까?

 


1. 넓은 길은 육신에 이끌려 자기 마음대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13절의 말씀을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고 넓은 길은 그저 육신의 이끌림을 따라 대강대강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편한대로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길입니다. 그저 죄된 본성의 욕구를 따라 가면되는 길을 말합니다. 사람의 통제나 제재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간섭도 거부하며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가는 길을 말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입니다. 세상물결 흘러 가는대로 적당히 따라 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저 육신이 요구대로 살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않습니다. 죄된 본성의 요구에 따라 때로는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자기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편한 길이겠습니까? 그것이 자유를 누리는 길이겠습니까? 물론 당치 않은 말입니다. 그것은 편한 길도 아니고, 자유의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대로 놀아나는 길입니다. 편하고 좋고 자유로운 길 같지만 그 길은 결코 자유로운 길이 아니라 죄의 노예된 길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결국은 죽음의 길일 따름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뱀의 속삭임에 유혹되어 아담과 하와가 갔던 길인 것입니다.

어느날 뱀은 하와를 찾아가 속삭였습니다. 정말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자 하와가 그렇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은 다시 말합니다. 아니다.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자 하와는 점점 뱀의 꾀임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보니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결국은 죽음과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괞찮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 편한대로 해라. 네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하라.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네 인생 네가 네 뜻대로 살아라. 왜 간섭받고 사느냐? 자꾸만 이래라, 저래라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없다. 그들은 너를 얽어매려고 한다. 너는 자유인이다. 그러니 네 마음에 편한대로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한 사단의 소리입니다. 사단의 소리가 별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역하면 그게 곧 사단이요, 적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6:24절에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또 눅8:21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내 모친이요,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좁은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요구에 충실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을 길로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셨던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실때에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좁은 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하는데 너희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길이 뭡니까?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하나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길은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하게 생명으로 통하는 하나밖에 없는 외길이기에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여러 군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예수님 밖에 없는 외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또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12절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딱 하나입니다. 곧 예수님만이 생명의 문이요, 구원의 문이요, 영생의 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은 많다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굳이 외길만 고집할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남쪽에서 올라가든 북쪽에서 올라가든 아무데로나 올라가도 정상에 올라가기만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나름대로 신을 찾아 올라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소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탄의 소리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소리가 사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라고 하는데 둘이라고 하면 그것이 사탄의 소리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보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사람의 소리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사람이 연구해보니까, 내가 도를 닦아 보니까 그런 것처럼 보이더라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미 예언되어 있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대로 이땅에 오신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만이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고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주장하는 넓을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인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오직 한길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그 좁은 길은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실때에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두번째로 좁은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저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것도 쉽습니다. 죄된 인간의 본성에 따라 대강대강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세상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죽은 삶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 갑니다. 그러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힘차게 거슬러 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인생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길은 결코 녹녹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죄와 무지로 오염된 심령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의 대세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조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치와 이상과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길은 간섭받아야 하고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때로는 알기는 알면서도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우리를 자꾸만 다른 길로 내 몰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진리만이 가득하다면 저절로 진리의 길로 가겠는데 우리 안에 비진리가, 거짓된 것들이, 죄된 것들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것들이 들어있어서 우리를 자꾸만 그 길로 이끌어가려고 하니까 그것들과 싸우느라고 힘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길이고, 좁은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대 사도도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협착하다고 하셨습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어떤 제재를 받는 답답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육신의 요구와 생각과 세상에 보이는 것을 따라하면 쉽겠는데 그것들을 부정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좀 힘이들고 답답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려고 하니까 물질적으로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도 내 혈기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의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희생해야 하고,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 안되고, 힘이 들고, 그래서 가기가 어려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길이 비록 좁을 지라도 가야하고, 답답해도 가야하고, 손해를 봐도 가야하고, 희생을 당해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손해를 보아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만이 진정한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리의 길은 결코 다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둠과 연약함과 무지함 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정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전한 진정한 성공자도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생명을 원하신다면 다수가 가는 길을 좇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신다면, 우리가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면, 더욱이 여러분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기를 원하신다면 진리 편에 서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편에 서 계시기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면 열심히 좁은 길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을 부인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여 생명을 향하려 세상의 조류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모두 세상적으로나 하나님나라에서나 진정한 성공자가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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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연약함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찬송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370장(통 455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8장 14∼17절

예수님 제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섬기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먼저 만져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면 질병에 대한 생각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 되는 이유는 다분히 위장 장애 때문만이 아닙니다. 안 좋은 소식을 들으면 소화가 잘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정신적인 것도 병에 포함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까지도 치유해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까지 인도해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만져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우리의 질병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정신까지도 회복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만져줌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손을 가만히 잡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원어로 보면 '움켜잡았다'(막 1:31)고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열병이 떠났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악한 영의 권세와 질병의 세력들, 마음의 슬픔, 괴로움과 공허감, 공포 그 무엇이라도 예수님께서 움켜잡으실 때 회복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만지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서 일어난 뒤 예수님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그냥 일어나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는 "성화되었다면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세상을 성화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에만 국한돼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병들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다면 말씀과 기도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성화되었다면 이제는 저 어두운 세상을 밝은 빛으로 비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의 자리로 인도해주신 목적입니다.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한 가지 비결은 서브를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브(serve) 즉 '섬김'입니다. 성공의 길을 가려면 서브를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부르시고, 상처를 만져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섬기며 살아갑시다.

기도 : 하나님,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지 깨닫게 하시고, 회복을 통한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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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가정예배를 권장

찬송 : ‘어려운 일 당할 때’ 543장 (통 342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22장 2~8절

말씀 : 100세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보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하는데 있어서 세 가지로 진리의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미래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순간입니까? 그러나 히 11:19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위기 때 하나님이 나갈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십시다.

둘째로, 방향을 찾아야 한다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3일 동안 하나님의 방향을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내 결혼을 축복하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방향을 찾지 않습니다. 내 아이들을 축복하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방향을 찾지 않습니다. 내 가족을 축복하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방향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향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반문화적이기 때문입니다. 섬겨라, 원수 갚지 말라, 겸손하라, 사랑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방향이 때때로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방향을 찾아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집중을 위해 힘써야 한다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닌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보다 일에 집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아이들에 더 집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재산에 더 집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출 20:3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눅 14:26∼27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막 8:34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로 집중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16∼18절에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주님의 길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을 영예롭게 해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에 처할 나무를 주님의 등에 지고서 희생의 장소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떤 위기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방향을 찾고, 하나님의 일로 집중 하십시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위기 때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방향을 찾고, 하나님의 일로 집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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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코로나19 재확산 시 가정예배 감추인 보화

찬송 : ‘저 건너 편 강 언덕에’ 237장(통 226)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13장 44절

말씀 : 욥은 자신이 고통당할 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어서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눈으로 봤다고 합니다.(욥 42:5)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주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합니다. 감춰진 천국을 발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춰진 보배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보화입니다.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약속이 보화이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보화입니다. 이것을 봐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로 비유했습니다. 최고의 가치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과 죄에서 해방된 삶, 곧 천국의 삶입니다.

감춰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쁨으로 돌아가 소유를 전부 팔아 밭을 샀습니다. 이는 즉각적이며 단호한 결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밭을 산 사람의 기쁨은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판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인간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감춰진 보화인 천국을 살 수 있습니까. 살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는 천국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임을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감춰진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7:19) 천국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유를 팔아 샀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에겐 본토의 친척과 아버지 집 즉 고향을 떠나는 것이었으며, 모세에겐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한 것이며,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입니다.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눅 5:11) 이는 자기 소유를 팔아 감춰진 보화 천국을 샀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얻는 데는 기쁨이 따라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눅 10:20) 하셨고,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생명과 바꿔도 좋은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 항상 있다면 우리는 감춰진 보화를 산 사람들입니다.

기도 : 하나님, 주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근심했던 것들을 회개합니다. 이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의 기쁨만 가지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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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설교] 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동로 함께하는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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