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유래

신학 2018. 6. 2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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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유래

 

 

 

"크리스마스"의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12월 25일 설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지날을 채택 한데서 비롯됐습니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12월 24일 - 다음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로마" 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일인 동지를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 부터 입니다.

고대 "로마"교회에서 기원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시작한 연대에 대해서는
335년설과 354년설이 맞서 있습니다.

"성탄일"은 그 후 동방 교회로 퍼져나가
"콘스탄티노롤리스"(379년),"카파도기아"(382년)등에서
지키기 시작했고 교회력의 기원이 되었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시력 기원의 시원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액시그누스"(500-544)가
533년 부활절표를 작성할 때 계산한 데서
비롯된 시력기원의 기점인 "그리스도"의 탄생은
실제로는 현재보다 4년이 앞당겨 집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 년도나
날자의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미사"가 합쳐
구성된 용어인 "크리스마스"사건에 관한

성경적 근거로는
"마태복음 제 1 장"과
"누가복음 제 2 장"을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천사의 고지, 이상한 별의 출현,
"베들레헴"의 말 구유까지

박사들을 인도한 빛 등은
"그리스도"가 인간이된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 처럼
성탄에 널리 유행하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관습은
고대 "애급"에서의 동지제(冬至祭) 때의 나뭇가지 장식,

"로마" 축제 행렬에서의 촛불을 단
월계수 가지 장식 등
옛날의 성목(聖木)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있습니다.

흔히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된데는 전설이 있습니다.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 "오딘"은
신성하다는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 이 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데서부터
비롯됐다는 것 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탄생 연도나
날짜의 기록이 전혀 없다.고 하여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은
잘못된 것 입니다.

2017년
성탄절!!!

귀한 절기에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장에서

주님의 은총이
충만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 31)

And, behold, thou shalt conceive in thy womb,
and bring forth a son, and shalt call his name JESUS
( Luke 1: 31)

주님과 동행 하시는 하루 되세요

오늘도 주님 안에서 승리 하세요!!!
여호와 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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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번연 (1626-1688)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존 번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청교도 작가중의 한 사람

 존 번연은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청교도 작가가운에 한 사람이다. 이것은 당시 대다수의 청교도 작가들이 옥스퍼드와 캠브릿지 대학 출신이었음에 비해 번연은 가난한 땜쟁이의 맏아들로 태어나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번연이 태어난 17세기 영국은 내란(1642-47)과 청교도가 주도한 공화국시기를 거쳐 다시 왕정복고(1660)와 청교도 추방령(1662)과 찰스 2세의 관용령(1972)등의 정치적, 종교적 소용돌이의 시대였다. 번연은 16-18살때인 1644-46년에 의회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해서 죽을고비를 많이 넘기기도 했다.
번연은 오랜 기간동안의 회심에 대한 몸부림 이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비국교도 소속으로서 당국의 허가없이 설교를 했다가 32살때인 1660년 11월 불법집회를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661년 1월 3개월형을 언도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하는 당국자들의 말을 거절했기 때문에 형량은 1672년으로 연장되었다. 1672년 3월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베드포드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5월에는 찰스 2세의 관용령으로 정식으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번연은 부지런히 목회를 하며, 설교와 전도를 하면서도 계속 글을 써서 60살때인 1688년 죽기 불과 2년전까지 약 6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천로역정: 성경다음으로 가장 사랑받은 책

이러한 번연의 60권의 저서가운데서 가장 널리알려진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은 바로 번연의 감옥생활중에 탄생되었다. 1부는 1678년, 제2부는 1684년에 출판되었다. 출판이후 천로역정은 아마도 성경다음으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사랑받는 작품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678년에 천로역정 1부 초판이 발간된 이래 번연의 생애동안 11판이나 거듭인쇄되었고, 1688년 번연이 죽었을 때,
화란어, 프랑스어, 웨일즈어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천로역정은 약 7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성경을 번역한 다음 가장 먼저 번역하는 기독교 서적은 바로 번연의 「천로역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성경번역 다음으로 천로역정이 두 번째로 1895년 미국선교사
게일에 의해서 번역된바 있다. 이후로도 지금까지 천로역정은 아마도 단행본으로서는 가장 많은 십여종의 수많은 번역본들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책이기도 하다.

성도의 일생을 여행으로 그리는 천로역정의 내용과 전달형식의 탁월성 천로역정이 이렇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아마도 천로역정이 다루고 내용과 그 전달형식의 탁월함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천로역정의 주제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하는 구원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구원론의 주제는 루터가 역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이신칭의’의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16세기 종교개혁이 출발된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구원론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체험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번연은 이러한 구원론을
신학적인 논문이나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탁월한 문학적 알레고리 기법을 사용해서 다루고 있다. 즉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인 그리고 성경에서 성도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상징의 하나인 여행의 상징을 사용해서 성도의 일생을 한 도시(장망성: 이 세상 상징)를 떠나서 다른 도시(천성:천국 상징)로 들어가는 여행으로 묘사한다. 이 여행은 온갖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해가는 싸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번연은 이러한 여행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인물, 장소, 사건들을 사용해서 구원의 과정에서 경험되어지는 성도의 마음의 상태를
천재적으로 묘사해낸다. 천로역정은 곧 구원받은 성도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여행의 과정으로, 또한 영적 성장에 따르는 내적 투쟁의 과정을 싸움의 과정으로 그림처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번연의 천로역정을 통해서 성도들의 영적 일대기를 그림처럼,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는 감동을 받게되는 것이다.

천로역정은 청교도 구원신학의 설계도요 목차

사실 천로역정은 바로 청교도 신학의 구원론의 전체 설계도요 목차와 같은 역할을 한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주인공 ‘그리스도인’의 여행과정은 곧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칭의, 성화, 영화에 이르는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 일생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청교도 신학의 심오한 구원론의 내용이 탁월한 문학적 그릇을 통하여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 될 수 있었다.

스펄전이 가장 사랑한 책
아마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가장 사랑하고 애독했던 사람은 19세기 최고의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이었을 것이다. 스펄전은 무려 생애동안 천로역정을 100번이상 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펄전이 50중반에
소천했기 때문에 스펄전은 무려 1회에 평균 2번 이상씩 천로역정을 읽었던 셈이다. 스펄전에 이토록 천로역정을 읽고, 읽고 또 읽어서 자신의 피와 살이 되도록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물음인 다음의 문제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선명한 그리고 감동적인 대답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2017년 '5월의 필독서'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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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신 예수

 

 

 

(마 24:1-14)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면서 장차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며 슬퍼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성전에서 나올 때 예수님께 이 성전은 어떻게 되는가를 물었다. 예수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하셨다.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서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은 다시 두 가지를 질문하였다.

 

첫째는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때를 물은 것이다. 둘째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이는 세상 끝 날의 징조를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세상 끝의 징조부터 말씀해 주셨다.

 

1.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리라 하셨다. (4-5)

 

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 이는 자칭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이미 많은 자칭 메시아(그리스도)라고 말한 자들이 많이 나타난 것을 사도행전에 기록 되었다. 드다와 갈릴리유다(행5:36-37) 애굽인(행21:38) 등이 자칭 메시아라 하여 사람들을 미혹했었다. 그리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66-70년간에 사마리아인 도시데우스와 사마리아인 시몬등이 그리스도를 가장했던 것을 말하였다. 이런 자칭 그리스도가 역사의 종말에는 더욱 많이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사람들 중에는 이상 한 것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은 참된 진리의 말씀보다 이상한 말을 많이 한다. 여러분 이상한 것은 이상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상한 말보다 기본적인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진리란 성경말씀이요 이 성경말씀의 핵심은 바로 복음이다. 그리고 이 기본적인 복음진리를 굳게 믿고 지켜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의 말씀은 그렇게 매력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나면 진리야말로 진정 매력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진리만이 인간을 죄에서 자유케 합니다. 이 진리 안에서만이 인간은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따라서 살 때 인간다워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순수성을 잃으면 쓸모가 없어집니다. 공기도 오염되면 해롭게 되고 물도 오염되면 해롭게 됩니다. 인간도 진리에서 떠나면 순수성을 잃어버립니다. 기독교의 진리에다가 인간의 철학이나 이단교리를 섞어 놓으면 그 때부터는 참된 진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 오직 예수뿐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요 14:6)

 

사람들은 예수가 진리냐 아니냐 논쟁을 계속해 왔지만 아직까지 예수 이상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세에 예수의 이름으로 진리 아닌 것을 전할 때 미혹 받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이 없는 것을 믿습니까?

 

2. 민족과 민족들의 분쟁이 많이 일어나리라 하셨다. (6-7)

 

6-7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게 되리라 하신 말씀은 가깝게는 저들 시대에 저들 나라 안에서 있을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수많은 전쟁의 소식을 들었고 실제로 그 곳에서 수 없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을 가보면 그 나라가 헬라 - 로마의 시대를 지나 버쟌틴 시대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전쟁으로 시달려 온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멀리는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 있을 전쟁과 민족분열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전쟁의 소문을 끊임없이 들여왔습니다. 역사가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 있었던 시대와 평화시대는 그 비율이 14대1 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4년이 전쟁이었으면 평화는 겨우 1년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이제 어떻게 민족들이 분열되어 왔는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 민족 분열은 2차 대전 후부터 급격히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쟁에 이기면 영토도 넓어지고 민족도 통합되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전쟁에 이긴 나라들은 오히려 식민지 국가와 민족들을 독립시켜 주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큐바와 필리핀을 독립시켜 주었고 프랑스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독립시켜 주었고 영국은 더 많은 식민지 국가들을 독립시켜 주었다. 카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을 독립시켜 주었고 그 외에도 많은 식민지 민족들을 독립시켜 주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종주국인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이 지배하던 나라들이 다 독립들을 하였고 구 소련 안에 있던 민족들이 다 독립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어져 온 것이다. 인류는 그냥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잇는 것이다.

 

3. 기근과 지진이 많이 일어나리라 하셨다. (7절이하)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

 

* 기근이 많아질 것을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어쩌면 오늘날 먹을 것이 더 풍성해 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을찌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기근들은 흉년으로 생기는 기근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기근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1990년 이후 점점 흉년이 많이 들고 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흉년이 많아지는 원인을 엘리뇨현상이 나타나면 그 다음해에 흉년이 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엘리뇨 현상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적도의 물의 온도가 70-80 도로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렇게 되는 이유는 Gas 때문 - 환경오염이 생겨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게 되어 오존층을 파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 엘리뇨현상 때문에 가뭄이 오기도하고 홍수가 나기도 한다고 한다 엘리뇨라는 말은 “아기예수”라는 스페인어인데 크리스마스 때에 오는 현상이라고 붙인 이름이다.

 

* 지진이 많아지라고 하셨다. 지난 19세기 동안 일어난 지진 보다가 20세기 한 세기 동안에 일어난 지진이 10배는 더 많았다고 한다. 또한 지난 1세기 중에서도 20세기 말 10년 동안에 일어난 지진이 그 이전 90년 동안 일어난 지진보다 10배나 더 많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 많은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온 것을 깨달아야 한다.

 

4. 점점 악하여지고 불법이 성하여지고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다. (9-12)

 

9절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셨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 이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이 점점 강하게 일어나서 모든 나라와 민족에서 핍박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유대민족으로부터 시작되어 로마에서 스페인에서 공산국가에서 회교국가에서 불교와 힌두교국가에서 유교를 숭상했던 한국에서도 많이 있었다. 사실상 기독교를 핍박하지 않은 나라와 민족이 어디 있는가? 기독교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 예수를 믿어 왔고 전파해 왔다.

 

* 오늘 우리는 이렇게 자유스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데 더 잘 믿어야 되지 않겠는가?

 

10절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이는 핍박이 올 때 배교자들이 많이 생겨서 같이 예수 믿던 형제들을 핍박자들에게 넘겨주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일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도 많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핍박이 있는 곳에서 계속되어 온 일이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 배교하여 믿는 자들을 잡아 주게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만 해도 공산당들이 북한에 들어 왔을 때 김일성의 외삼촌이었던 강양욱목사가 기독교도 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공산당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넘겨주는 일을 많이 하였다.

 

12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예수님의 예언대로 사람들은 점점 악하여지고 잔인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사랑이 식어지고 있다. 부모자식간에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있다. 형제간의 사랑도 점점 식어지고 있다. 부부간에 사랑도 점점 식어지고 있다. 성도들간의 사랑도 점점 식어지고 있다. 그래서 말세에는 "서로 열심히 사랑하라 하셨다.(벧전 4:7)”

 

* 우리는 서로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오래전에 스위스의 한 시골 마을에 조그만 교회가 새로 세워졌다. 피터목사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다. 그런데 목사님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다. 어느 날 한밤중이었다. 피터목사님은 잠을 자다가 지붕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그만 잠이 깼다. 누군가 지붕을 뜯어내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이 얼마나 견디는지 두고 보자, 이래도 사람들을 사랑한다고는 말하는지 보자 ” 피터목사님은 어찌할 줄 몰라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부인에게 말했다. “여보, 일꾼들이 왔소” 음식을 좀 마련해 주는 것이 어떻겠소? 부인은 남편의 의중을 얼른 알아차리고 맛있는 음식을 서둘러 장만했다. 피터목사님은 밖으로 나가서 일꾼들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열심히 일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장하실 테니 들어오셔서 음식을 좀 잡수시고 하세요.”

 

얼떨결에 불려 들어온 사람들은 촛불이 켜 있는 식탁에 어색하게 앉았다. 피터목사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들은 접시에 가득 담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슬금슬금 뒷문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조금 후 지붕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지붕의 짚을 뜯어내는 소리가 아니라 지붕을 다시 고치는 소리였다.

 

5. 그러나 복음으로 승리하리라 하셨다. (13-14)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이는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이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 하셨다. 이 말씀에는 믿는 자들은 핍박을 견딜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주님을 의지하면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다. 우리는 약하나 예수는 강하시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다.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 이는 복음 전파자들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이다. 이 복음이 핍박 가운데서도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예언하셨다. 이는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 하신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시는 가를 예언하신 것 이 요한계시록 6장이다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계 6:2) 했다.

 

여기 흰말은 당시 전쟁에서 총사령관이 타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런데 계시록 19장에 보면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백말을 타신 모습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이 탄 말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백말을 타신 것은 신속하게 행하시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도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금 면류관을 쓰고 계신다. 활을 영적 무기인 복음을 가리킨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친히 복음이 신속히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지휘하고 계시기 때문에 복음전파는 핍박 속에서도 온 세상에 전파되어 온 것이다. 복음전파는 이 세상에 어떤 세력도 가로막지 못한다. 복음은 마침내 온 세계 열방과 민족에게 전파할 것이고 그때네 예수님은 친히 재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휘하시는 복음전파에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긍지를 가져야 한다.

 

결 론

 

예수님은 말세가 되면 미혹하는 자도 나타나고 핍박도 심해지고 재난도 많아지겠으나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되고 복음은 결국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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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보혈의 10대 능력

 

 


 

1.하나님과 화목함을 증거하는 능력.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2.속죄의 능력

①.구속함.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②.죄사함.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③.깨끗게 함.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④.죄에서 해방.

(계1:5)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 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⑤의롭다 하심.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 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⑥거룩케 하심.

(히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⑦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하심.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3.예수님과 동거하는 능력

(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 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4.마귀를 이기는 능력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마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5.죽음의 재앙을 벗어나는 능력

(출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 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6.화목케하는 능력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7.병고치는 능력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 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8.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 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9.영생의 부활을 얻는 능력

(요6:54-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 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10.성령의 능력을 얻게하심

(요일5:5-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 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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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아펜셀라의 인천상륙과 의료사업-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The Hartgard Inter Seminaryconvention)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처음에는 일본에가려고희망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려고 했던 친우인 워드윌쓰(J.S.Wodaswoth)가 모친의중병으로 국내에 남아있을 사정이 되어 그를 대신하여 한국행을결심하게된 것이다.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동경에 들려 선배 선교사인 매클레이 목사를 만났으며 3월 5일에는 뜻깊은 선교예배를 올렸다. 이때 매클레이 목사는 시편 121편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는 구저를 읽고바울이 선교사업을 위해 맡은 일터로 떠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면서 한국을 향하여 선교사들의 장도를 격려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H.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매클레이 감리사의 의견이 [여러사람이 함께 한국에 들어가면 의심을받을염려가 있으니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아펜셀라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와 함께 일본 나가사끼를 떠났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한국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남해안과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드디어 인천에 도달하였다.

 

얼마나 한국행을 갈망하였던지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땅위에 엎드려먼저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을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빛과 자유를 베풀어주시옵소서] (R.S.Maclay,Comen cementof the Korea MethodistEpiscopal Mission,The Gospelin All Lands for 1885,P,328) 아펜셀라 목사는 선교회에 보내는 보고문 가운데 위의기도문을 실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상륙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내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 (Harry A.Rh-odes,The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P 78)라고 아펜셀라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는 함께 한국을 찾아왔으나 한국내의 실정은아직까지 외국인 여자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펜셀라 목사는 부득이 부인을데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언더우드목사만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포오크 (George C.F-oulk)가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서울에서양인 여자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사정인고로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가 있다가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펜셀라는 인천에 도착한지 9일만인 4월 13일에 부인과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 다음날인 4월 18일청국의 대표 이홍장 과 일본 대표 이또오가 중국에서 텐진조약을 체결하여우리나라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때에는 여둑으로 건강을상한 부인의 치료로 아펜셀라목사의 한국 입국은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가서야 아펜셀라 목사는인천에 또한번 상륙하였고 서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천주교에서 한국에 선교하면서는 한국 고대의 전통 의식이나 문화양식을고려하지 않고 거의 독단적인 선교방법으로 강행하다가 오해와 박해와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선 매사에 극히조심스럽게 태도를 취하였고 최대한으로 충돌을 회피하면서 한국민의 호감을 사고 선교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그러기위하여 우선 의사를 보냈다. 이들은 육신의 병을 고쳐주어 친밀감을 느끼게 하였고 한국인의 신임을 얻으면서 복음을 전달할 기회를 포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도 난관과 애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의사들의 시기와 멸시가있었고 환자들의 오해와 불평이 뒤따랐다. 선교본부로부터의 후원의빈약과때로는 선교의 의사들 사이에서 선교방법과 의견의 불일치로 어 려움을 격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것들이 바야흐로 열린 선교의 문호를 닫지는못하였다. 개척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한국민에게 과학문명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한국선교의 본격적 사업을 위한 시발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선교사에 의한 의료사업은 네가지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로 외국의영사관 직원들과 거류민을 위하여 치료를 베풀었고 다음은 국왕과왕실을포함한 한국민들을 치료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셋째로는 정부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 관리해야 했으며 그리고 넷째로는의학 교육을 베풀어 의사를 양성하는 일까지 담당해야 했다.

광헤원은 정부 소속의 병원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 선교회와의 합작운영이었던 관계로, 육의 병을 고치면서도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 영장이었다고 보아 당연하다 하겠다.

 

알렌은 원장겸 의사의 책임을 맡고 바쁜 일과를 보냈다. 그는 일반 환자를 위하여 분주하였지만 왕실을 위하여 더 분주했다. 국왕의 시의가 된 그를 위하여 참판이라는 벼슬이 1885년 7월 19일에 내렸다. 알렌은벼슬을 받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국왕의 시의는 절대로 놀고먹는 직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엄하게책임을 추궁당해야했고 한의사들의 시기를 참아야 했다. 입시 하나는명령은밤 12시가 지나 더 늦게도 있었고, 그런 명령이 올 때에는 요란스럽게 가마를 보내와서 왕명이라는 고함 소리에 모두가 잠을 깨곤하였다. 더욱이 이나라의 관습은 정장하지 않고서는 국왕을 알현하지 못하는 법이 있어 반드시예복을 입고 입궐해야 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H.N.Allen, Things Korean,PP,193-195)

 

병원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알렌 혼자서는 도저히 외래환자를 치료할수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졌다. 알렌은 불원내한하여 동료가 되어줄 혜론(gohn W.Heron,)의사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스크랜튼(W.B.Sc-ranton)의사가 먼저 들어와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혜론 의사도 그뒤에도래하여병원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스크랜튼은 1885년 6월에 병원을사퇴하였고, 알렌은 1887년에 원장을 혜론에게 넘겨주고, 한국정부가 박정양을 미국에 초대 공사로 파견할 때 참찬관의 직을 받고 그를 수행하여 갔다. 그러나 알렌은 1889년에 다시 병원사업의 임무를 맡아 제중원의 원장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복음선교에 앞선 의료사업의 개시와 활동은 한국인들의 육의생명을 건지는데 공헌했을 뿐만아니라.그 마음을 사게하여 한국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금압정책을 완화케 하는데 결정적 효과를 올렸으며 전도의 길을 널리 개방하는데 크게 도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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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소명-

 

 

 

1884년 봄에 의사 헤론(John H.Her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일본 에서 때를 기다리게 하였고, 9월에는 중국에 파송되어 있던 알렌(Alle- n) 을 한국으로 옮겨 일하게한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그동안의한 국 선교에 대한 신중정책을 전환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의 정세가 호전된 점 도 있었겠지만, 직접적으로 언더우드(H.G,Under wood)목사와 같은 인물 이 선교사를 지원 한국행을 희망하여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을 찾게된 동기와 사정을 회상한 내용을 살표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 자들을 모아놓고 은사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 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에도불 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 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따 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 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 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 이 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문은 닫혀있는것 같았다. 나는 두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행 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이제 나에게는 본 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밖에 없는것 같았다. 나는이 렇게 머뭇거리는 상태에서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나는 이 청빙에 응하기로 하여 수락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 였다. 그 순간에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Not one for Korea)한국은 어찌할 터인가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 어왔다. 이때 나는 나도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 고 단숨에 중앙통에 있는 선교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수석서기인 엘린 우드(F.F.Ellin wood)를 만났다. 몇칠후 그에게서 받은 기별은 다음 회 의에서 내가 선교사로 일명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L.George Paik,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PP.100 101)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는 종래의 배외정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 는 확정을 하였고,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 교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미 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그가 일본으로 먼저 가게된 이유는 일본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기도 하고 또한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여 만반의 선교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었 으며, 혹 여의치아니하여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때 에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수 있게될 시기까지 일본에서 영어 학교 사업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동안 선배 선교사인 헤본(James C.H 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루미스목 사는 언더우드에 대하여 [그는 한국을 위한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 다. (The Foreign Missionary,Vol.44,No,1,P,34)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풍 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고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나라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 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손 에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 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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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옵페르트 남연군 묘소 도굴사건-

 

 

 

옵페르트(E.Gacob Oppert)라고 하는 유대계 독일인이 1854년부터 중국 상하이 체재하고 있었다. 그는 동양 여러나라를 여행하는 중, 중국과일 본 사이에 위치한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쇄국하고 있음에 이상한 흥미를 느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호를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866년 3월경 대원군의 박해가 한창 진해되고 있을 때 충청 도 가로림만을 다녀간 일이 있었고, 7월 10일에는 강화도 교동도를 찾 아와 무역 거래를 건의하였으나 실패하고 되돌아가 기도 했다. 옵페르트가 두번에 걸쳐 통상에 실패하여 낙심한 중에 있을 무렵,한국 주재 신부였던 페론(Feron)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옵페르트는 그와의대 화를 통하여 제3차 한국 탐방여행을 계획하였다. 그는 기선을 대절하여 대포 수문을 장비하고 페론 신부를 위시하여 8명 의 서양인과 한국 천주교인 최선인과 중국인 승무원 약 1백명을 태우고 1868년 4월 30일 중국 상하이를 출범하였다.그들은 5월 9일 아산만 행담 도에 도착했으며 8년간이나 이 지방 포교에 종사하여 지리를 잘 알고 있 는 페론신부의 지시를 받으면서 덕산이란 곳에 상륙하였다.

 

옵페르트 일행은 산길과 밭고랑을 더듬어가며 가야동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분묘가 있었다. 옵페르트 일행은 계 획했던 대로 도굴작업에 착수하였다. 급보에 접한 충청감사가 군인을 보 내 습격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작업을 포기하고 돌아간 뒤였다. 옵페르트 는 북상하여 영도도에 이르러 개국 통상의 교섭을 또 다시 제의하였다. 실제로 옵페르트는 도굴로 아무것도 소득한 것이 없었으며 또 그러한 행 위는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보복이라고 해명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말 이 조선정부에게 통할 까닭이 없었다. 옵페르트는 아무 성과없이 상하이 로 되돌아가야 했다. 당시 상하이 거류민 외국인들 사이에는 이 분묘 도굴사건에 대하여 풍 문이 널리 퍼져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화제로 등장하였다. 특히 옵페 르트의 도굴 계획의 목표가 어디에 있었던 지간에, 그가 분묘 안의 부장 품을 입수하여 대원군에 대해 보상금을 강요함으로 일확천금을 꿈꾼 해 적의 행위이었던가, 또는 그 부장품을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한국 천주교 의 신앙 자유 조건으로 한국 천주교의 신앙 자유 또는 통상의 약속을 대 원군으로부터 받아내려고 한 책략이었던 것인가. 하는 등등의 추측으로 자자하게 나돌았다.

 

이에 대하여 페론 신부가 한 말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대원군은 지 극히 미신적인 기질의 소유자로서 조상의 유물 확보가 섭정 자신과 가족 의 행운을 보장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고로 한국인 교도들이하는 말이 그의 조상의 유물만 점유하면, 대원군은 이 유물을 회구하기 위하 여 모든 일의 타협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Ernst Oppert;A F0 orbidden Land, London,1880) 그렇지만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별세 할 당시의 가세는 매우 가난하여 분묘 안에 부장품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도둘의 동기야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그 행동에 있어서 동양 고래의 조 상의 모시는 전통적 윤리를 파괴한 사실 그것만을 가지고도 지탄받기에 충분하다 하겠거니와, 그것이 국왕의 조부의 무덤이었다고 하는데 더할 나위없는 범죄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인 신부가 이러한 행 동을 안내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로도 변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은둔의 나라 한국](THE Hermit Nation,Korea)의 저자인 그리피스(W.E,G riffis)는 이를 [국제적 사체 도굴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여튼 이 사건은 서양인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켰으며 더욱이 종교의 선포를 사명으 로 하는 선교사가 가담한데 대하여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대원군을 비롯하여 한국의 조야는 이 이일을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분노 와 적대를 더욱 노골화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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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제1부 한국개신교와서양종교와의 접촉

 

 


제 1부 한국개신교 전래 이전 서양종교와의 접촉

 

한국이 서양문화와 언제 접촉하였으며 언제 서방에 알려졌는가는 많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이다. 특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계 역사의 큰 흐름에 한국이 등장한 시기에 대한 고찰은 세계사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고 바른 역사관을 갖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방 문화와의 접촉은 서양 종교와의 접촉과 결코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한국기독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을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1627년과1653년 표류로 인한 박연과 하멜의 입국, 그리고 1826년 머리 맥스웰 대령과 바실 홀 대력의 서해안 탐사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들 사건들은 종교사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스페데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종국 신부로 내한하고, 일본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 상당수의 예수회 신자가 생겨나면서 지극히 세속적인 임진왜란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제공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연과 하멜의 입국과 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 역시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서양문화, 종교와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갑작스런 배의 난파로 조선에 입국했다 돌아간 하멜이 출간한 표류기, 서해안 탐사를 위해 입국했다 돌아가 맥스웰과 훌이 출간한 조선 항해기는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비록 공식적인 선교사 입국 이전에 있었던 이와 같은 복음의 접촉은 직접적인 선교의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복음 전래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였다.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복음이 전래되기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조선에 복음 전파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동양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서양종교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를 통해서였다. 일찍이 예수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1601년부터 중국 북경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며 중국 정부와 민중으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던 이탈리아 귀족출신 마테오 리치 였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해 1601년 북경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8년 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던 마테오 리치가 이와 같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서양 과학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데다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동양문화와 민족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문화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유교의 경전 시경과 서경에 있는 천제와 천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주와 동질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기독교와 유교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 정부와 북경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마테오 리치의 작품 다수가 중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중 일부가 중국북경에 파송된 조선국왕의 사절인 부연사를 통해 조선에 입수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단순히 신앙만 전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도 함께 소개했기 때문에 북경주재 신부들로부터 부연사 일행은 천문, 지리, 역법 같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후 세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이 처음으로 서양 과학과 천주실의를 조선에 소개하고 1625년 인조 3년에 국왕에게 경제 개혁을 통한 국가 재건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1575년에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이 북경에서 세계지도와 게십이장을 가지고 돌아와 연구하고 실천에 옮긴 적이 있다. 1631년 부연사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파송된 사절 중의 “한 사람인 정두원이 과학 서적, 서양의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비롯한 서양 풍속, 지리, 천문학에 관한 서적들과 함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 후, 한 세기 동안 서학은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는 하나의 학문으로 조선 지식인의 사상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조시대에 서학은 전성시대를 맞았다. 특히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는 남인계 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서학은 조선에서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은 서학을 대변하면서 주자학 주도의 조선 사상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서양사상은 동양의 유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또한 종교나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학문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금기시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학에 대한 관심은 공리공론만 일삼는 주자학과는 달리 근대지향적인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것은 실학운동을 태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지원, 홍대용, 홍양호, 박제가, 이덕무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은 매년 3,4차례씩 파견되는 부연사의 일행에 끼여 북경를 방문하여 천주교 성당을 찾아 서양 신부와 교제하는 기회를 갖고 이들을 통해 서양 과학의 지식을 배우는 한편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100년 이상이나 계속해왔다. 따라서 천주교는 이와 같은 남인계 실학자들을 토해 서학, 천주학, 천학, 양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 뚜렷한 한 부류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북경을 통해 전래된 후부터 불란서와의 조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을 때까지의 조선천주교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국내의 수용과정에서 조선천주교는 처음부터 종교로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서학이라는 학문의 한 조류로서 수용되어 오다 천주학을 거쳐 천주교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 천주교가 선교사가 한 명도 없는 가운데서도 조선에 소개되고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그것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의 양반계층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되었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초대교회 때 기독교가 유대교의 보호를 받으며 저변 확대되었던 현상과도 유사하다.

 

둘째, 그러다 조선천주교는 천주의 신앙과 제사 제도가 배치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대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리이다.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 저변 확대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던 이들이 배교하고, 지도자의 공백 상태에서 조선천주교는 한편으로는 박해에 대처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배도를 극복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전과 위협 속에서도 신앙적인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이들이 생겨나면서 비로서 조선천주교는 신앙 단체로서의 자리를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의 제사 금지는 토착화 선교 정책을 택했던 예수회의 전통부다는 카톨릭 내 프란스스칸 및 도미니칸 선교회 전통을 따른 것으로, 1936년 5월 25일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면서 일본,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교황청이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가적인 예의이기 때문에 신사에 참배해도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선언이 나올 때까지 조선천주교는 신사참배와 제사 제도를 수용하지 않는 것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하였다.

 

넷째, 황사영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이 조선천주교는 외세의 개입, 정치적인 압력, 심지어 전쟁을 통해서라도 종교적인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정부로부터 반정부단체, 반미족단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의 태도는 기왕에 갖고 있는 제사 제도 거부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에 천주교의 박해가 제사 제도 거부라는 순수한 신앙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면, 후기에 접어들면서 야기된 천주교의 박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발단되었다는 사시이다. 그리피스가 언급한 것처럼 황사영으로 대변되는 “로마 카톨릭의 조선 전도방식의 도덕적 약점”은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닌 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분명히 개신교와 다른 선교 정책이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 천주교인들이 교황의 권위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최고 권위에도 순종하도록 그들을 바르게 가르쳤어야 했다.

 

복음의 전래라는 측면에서 고찰 할 때 확실히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랐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침략군을 지원하기 위해 입국했던 일본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보여 준 것처럼 선교가 정치적 패권주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격과 정도는 다르지만 이 점에서 조선의 천주교도 어느 정도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벨로네가 1866년 7우러 13일 불란서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어떤 귄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조선의 파송된 선교사들은 정부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조선 천주교의 패권주의적 선교 정책이 직, 간접적으로 1866년에 발생한 불란서 원정과 연계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순수복음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학문으로, 후에 예전과 제도로 출발한 조선 천주교가 정치적인 성향을 띠면서 이들을 보는 정부의 시각이 달라졌고, 그 결과 정부로부터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조선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우리는 조선천주교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했는지를 평해야 할 것이다. 성경 번역은 고사하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고, 지나치게 정치적인 활동에 관여했으며, 제도적인 교회 조직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조선천주교 지도자들과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천주교 교세 확장과 세력 확장이라는 면에서는 생명을 아끼지 않았지만 복음을 충실하게 전달하려고 한 면에서는 너무도 미흡했다. 해리 로즈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 개종자들에게 외국 세례명을 부여한 것, 서구로부터 외국의 간섭을 끌어들인 것, 비밀스럽고 때로는 거짓된 방법으로 선교 활동을 펼친 것, 신자들에게 성경을 배포하지 않은 것”등 초기 조선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박해와 옥에 갇히는 것과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천주교인들이 영웅적인 순교적 신앙에 찬사를 보내야 하지만 순교가 일종의 공로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고, 또한 그 결과 천주교 선교는 자연히 믿음으로 만의 구원이라는 성경과 개신교의 근본 이라는 물론 교회 복음 본래의 사명과 대 사회적 문화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에 성경적 신앙을 그 모토로 했던 개신교 선교와는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비록 당시의 사회적인 제약과 장벽으로 한계가 있었겠지만 조선천주교가 천주교의 순수 신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복음에 충실했다면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개신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에게 조선개신교 선교의 방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성향을 배제하면서 복음 본래의 순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이었다. 후에 조선개신교는 정치적인 성향을 처음부터 자제하고 복음 전파, 교육, 의료사역, 그리고 자선사역과 함께 복음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성경 번역 및 복음 전파라는 직접선교뿐만 아니라 교육 및 의료선교 등 간접 선교를 통한 문화 변혁을 동시에 추구하였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조선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성경 번역과 직, 간접 선교의 균형을 통해 왕실의 마음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 가운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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