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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장례 예식 대표 기도문

우리의 생명이며, 부활이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정하여 주신 연수가 다하여 ○○○ 성도님이 하나님 곁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성도님 영혼을 받아주시옵시며,
하나님 안에 서 즐거움과 영원복락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 할 곳이 많다."고 하신 주님께서 이시간 저희들에게 영안을 열어
주셔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몸보다 영원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시며,
환란과 고생이 많은 육체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성령님의 뜨거운 역사로서 마음 속에 감동을 주시고,
저희 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권면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우리 다 주앞에 서는 그날까지 선한 싸움 잘 싸우고,
달려갈 길 다가도록 믿음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장차 천국에 들어가 의의 면류 관 쓰고 영광가운데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격려하시고 용기와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의 모든 장례절차를 주님이 주장하여 주옵시고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시며 유족들과 온 성도들에게 큰 위로 를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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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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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최대 작전!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



◈ 당신은 거룩한 습관을 가지도록 자신의 몸을 훈련합니까?

운동은 몸을 강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영적인 습관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성경을 읽습니까?

매일 성경만 읽어도 영적으로 병들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기도합니까?

아침마다 기도할 때 얻는 영적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 마귀의 최대 작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나쁜 습관에 계속 빠져있게 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마귀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다는 조카의 보고를 받습니다.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네 환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다.

성인이 되어 회심한 사람 중에는 잠시 원수의 진영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지내는 사람이 수백 명도 넘으니까.

네가 할 일은 그로 하여금 원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아직 몸에 배어 있는 나쁜 습관들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는 아직도 우리 편이다.

이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

육체를 훈련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좋은 습관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 습관은 많은 행동의 반복과 훈련의 결과로 옵니다.

습관은 옳다고 믿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전거 타기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넘어져도 계속 타다보면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가 진리의 길을 택하고

주의 법을 내 앞에 두었습니다(시 119:30).

습관은 성경에 기초하여 옳은 것을 택하고

그것을 내 앞에 두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자기 자신을 연단하는(딤전 4:7) 것입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 4:6)


우리를 좋은 습관으로 훈련시키는 방법은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입니다.


◈ 자유를 얻으려면 거룩한 습관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습관으로

우리 육체가 하나님 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헨리 트루먼 대통령은

“독수리처럼 날개 쳐 높이 올라가고 싶다면

칠면조와 같이 다녀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육체 안에서 주님을 모시고 살려면

우리의 육체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아침마다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교훈으로 양육을 받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달라질수 있을까요?

거룩한 영적 습관으로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죄악성을 극복하고 우리 육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이윤재

† 말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디모데전서 4장 7,8절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 잠언 13장18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고린도전서 3장16,17절

† 기도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날마다 그 십자가에 저를 못 박고

오직 주 예수님이 주신 은혜와 능력으로 살길 원합니다.

나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행하는 하루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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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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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 - 신앙을 이어가는 방법

찬송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14장(통 511)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느헤미야 10장 28∼39절 
 
말씀 :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과 조상들의 잘못을 다 고백한 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이 맹세를 어기면 저주도 기꺼이 받겠다는 아주 단호한 맹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살기로 결단하고 있습니까. 

먼저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방인과 결혼하는 문제로 나라가 위기에 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페니키아 출신 이세벨이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시집오면서 얼마나 나라 안에 우상숭배가 극심해졌습니까. 솔로몬도 외교적 수단으로 이방여인들과 결혼하면서 결국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혼미해지고 타락의 길로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우리가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이방인과 결혼해선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 차이가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결혼은 가정 안에서 작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큽니다. 

유다 백성들은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겠노라 맹세합니다. 당시에 주민들이 유대인으로만 구성돼 있었다면 모두가 율법을 지킬테니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같이 사는 이방인들이 안식일에도 물건을 팔았고, 유다 백성도 그 물건을 사왔던 것입니다.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물품이나 곡물을 사지 않겠노라고 선언합니다. 안식일을 구별된 하나님의 날로 지키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줬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는데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이 대대에 전해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를 통한 믿음생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교회와 예배에 소홀히 하면서 주관적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겠노라 했던 결단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믿음을 대대에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이 대를 이어 전수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날을 힘써 지킴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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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우리의 하나님

 90장 (통 98장) 찬송듣기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성경 미가 7:18~7:20 성경감추기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내용  
많은 신앙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제각기 자신의 신앙대로 하나님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가르침을 주시는 '좋은 훈장님'으로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무엇이든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제공하시는 '요술램프'쯤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죄와 관련해 항상 잘못을 지적하고 심판하시며 옳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엄한 판사' 같은 분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경외심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분, 자비와 사랑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 이미지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물으시지만 죄로 인하여 인생 전체를 망치거나 죄에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머물러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 은혜 가운데 인간을 머물게 하시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유력한 자들에게서 보이는 탐심과 권력남용, 그리고 우상숭배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하나님의 '사유와 인애'를 동시에 선포합니다. 그분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온전히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죄는 심판을 부르는 매서운 회초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하는 '자리'로 작용합니다. 인간의 결점과 허물, 죄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어줍니다.

기도  
주님, 죄에 얽매이지 않게 하소서. 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깊이 체험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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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2월 성탄절 주일예배대표 기도 (Christmas prayer)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의 하나님,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사 저희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룩한 성탄절입니다. 이 시간 저희들이 주의 성전에 모여 한 마음으로 성탄축하 예배를 드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 이천년 전에 누우실 곳이 없어 마굿간 말구유에 오신 주님, 저희 마음에 오시옵소서!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고대하오니 이 곳에 오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우리 주님께서 왜, 하늘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성탄절이 되게 하옵소서! 오직 그 길만이 저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오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저희들은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 소망을 갖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이렇게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저희들은 하나님 말씀을 떠나 세상가운데 내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니 너무도 부족하고 주님께 드릴 것 없는 부끄러운 빈손뿐입니다. 신앙은 늘 제자리걸음으로 아직도 세상 바람에 넘어지고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모습 이대로 주 앞에 나왔사오니 저희를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 화평케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온 나라가 거짓과 불신의 암울한 구름에 덮여 소용돌이 속에 빠져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자기 이익만을 계산하고 있으며, 국론은 분열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북한의 전쟁위협과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주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국가경제는 끝 모를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으며, 국민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아픈 현실입니다. 어둠을 밝히려 빛으로 오신 주님,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저희들의 아픈 현실의 흑암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 저희들 마음속에 평화를 주사 흔들리지 않고 빛의 길을 찾게 하옵소서!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하나님의 자녀 된 저희들이 화평의 씨앗이 되게 하옵소서! 작고 미약한 시작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들어가 누룩처럼 번지게 하는 화평의 시작이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말씀 가운데 빛 된 삶을 살지 못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사랑에 빠져, 형제의 아픔을 돌아보지 못하였으며 받을 사랑만 헤아리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말씀의 거울 앞에 서게 하사 변화시켜 주옵소서! 형제의 아픔을 위로하게 하시고, 기대어 쉬어 갈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아직은 많이 부족한 모습일지라도 저희를 붙들어 주사 말씀에 순종하고, 주신 사명을 감사함으로 감당하게 하옵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주님 이 땅에 오신 성탄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들고 단위에 서신 주의 종을 성령 충만 하게 하시고,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 예비하신 생명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배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을 받게 하시고, 그 말씀이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능력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님 오신 날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라나타 찬양팀과 솔로몬찬양대의 찬양이,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섬김의 손길이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온 성도가 한 마음으로 드리는 오늘의 예배를 우리 하나님 기뻐 받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를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오신,  평화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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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사도 바울 (행9:1-16)

사도 바울

(행9:1-16)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 성경 인물 중 사도 바울에 대해 단편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안에서만 사도 바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박해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는 ‘사울’에서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시작으로 해서, 그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에게 맡겨진 모든 사역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그는 열세 권의 서신서에서 최소한 백 번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했고, 그의 모든 편지에서 은혜는 인사말이 되었고 축복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은혜)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실로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많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갈2:20)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랍비였고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율법 박사로 율법에 절대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한 요한복음 1:17 말씀을 체험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율법 앞에서는 죽음 밖에 없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롬 7장)
(롬7:4-7)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믿음으로, 가장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항상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았습니다. 에베소서1:3-8을 보겠습니다.
(엡1:3-8)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현재 성도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 있다 해도,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창세 전에 예정하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유대 율법학자였을 때, 바울은 자신의 풍성한 율법 지식과 종교적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문벌과 학벌 등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 못지않게 더 훌륭한 자신의 외적인 조건들, 즉 요즈음 말로 하면 빼어난 ‘스펙’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밝힌 바 있습니다.
(행22:2-3)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빌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믿게 된 이후, 그는 자신의 모든 과거와 자신의 화려한 ‘스펙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적인 풍성함에 비할 때, 아무데도 쓸데없는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서3:4-9입니다.
(빌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과거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긴 바울은, 참으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부유할 때,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데, 그리고 사역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과 경건한 것들로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바 영적 부유함은,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나타났습니다. 영적으로 부유한 은혜는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에게도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풍성한 은혜가 주어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고전1:4-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았지만,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믿음과 은혜 가운데 견고하게 서 있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은사와 은혜를 받았다 해도, 그 풍성한 은혜와 은사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양하고 많은 은사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고전12:7-11)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러나 그 다양하고 많은 은사들 때문에 교만해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경쟁의식 속에 분렬되어 하나가 되지 못하여, 온전하게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하나되어 섬기는 예수님을 닮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되어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사랑으로 하나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넘치는 사랑으로 함께 하심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눈물의 편지’, 고린도 후서를 보냈습니다.
(고후2:4)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변함없는 사랑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신 성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가장 부유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가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은, 영육간에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 후서8:9을 보겠습니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여 영적으로 가장 부요하신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풍성하신 은혜로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12:7을 보겠습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부요한 자가 되었지만, 견디기 힘든 ‘몸의 가시’, 다시 말해 질병을 얻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 사울이었을 때는 없었던 몸의 질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질병을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고 부른 것은 그만큼 그 질병의 고통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살아가는데 이 질병으로 인해 몹시 힘들었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시라고 세 번씩이나 간구했습니다.
(고후12:8)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이 세 번씩이나 간구했다는 것은 그 고통스러운 질고(疾苦)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같은 간구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해주셨습니다.
(고후12:9)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는, 바울로 하여금 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인간의 고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은혜로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에, “몸의 가시”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베풀어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육체적 가시’를 안고 그는 소아시아를 비롯해, 유럽을 향한 광대한 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위험과 고난과 곤궁을 참았고.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며‥‥ 수고하고 잠자지 못하고 배고픔을 견뎌야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고후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 곧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만, 복음을 위해 수고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은, 자신이 너무 교만하고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을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고후12:7-9) 그래서 바울은 온갖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강하게 복음을 전했노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고후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시를 보좌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7-10). 실로 바울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를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일은, 연약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강했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연약하여 깨지고 가난하고 비천한 존재인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인내 가운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누구나 다 아는 비밀입니다. 빌립보서4:13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때로 “육체의 가시”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시어 믿음을 강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언제나 우리를 그에 맞는 능력으로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신의 뜻에 순종한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결코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베풀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4. 마지막으로, 바울은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1:12입니다.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육체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고전 1:20;2:6;3:19), ‘인간의 지혜’(고전 2:5) 등을 말합니다. “육체의 지혜로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 대해 사역할 때, 육체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행했던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일을 육체의 지혜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지혜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교만에 빠져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1:18-31을 보겠습니다.
(고전1:18-3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교회는 세상적인 원리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원리를 따라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골1:9)지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일꾼들이 모였을 때, 교회 부서들이 모였을 때, 그리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을 때, 늘 해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탁월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가지 큰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아이 성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파죽지세로 정복했습니다. 다음으로 정복해야 할 성은 아이성이었습니다. 아이 성의 주민은 12,000명에 불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사 2,3천명 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분명 상대를 얕잡아 보고 이스라엘 군대의 힘만을 믿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수7:2-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정복 사건(6장) 등 지금까지의 연전연승만을 믿은 지나친 자만심에서 나온 잘못된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3천명 정도의 군사가 정복에 나섰지만 보기좋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이 성 전쟁 실패의 근본적 요인이 아간의 범죄 때문인 것은 사실이지만(1절), 이들의 자만심, 교만이 실패의 중요한 요인으로 분명 작용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작고 적은 상대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항상 이기게 된 것은, 크고 작은 모든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23:10-12입니다.
(삼상23:10-12)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삼하5:19-20)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삼하 8: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대상14:8-11)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대항하러 나갔으나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로 쳐들어온지라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이에 무리가 바알브라심으로 올라갔더니 다윗이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이르되 하나님이 물을 쪼갬 같이 내 손으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대적하는 성마다 멸망당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기브온 주민이 아주 먼데서 온 족속인 것처럼 위장해서 화친조약을 요청한 사건이었습니다.
(수9:3-6)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이 사건을 두고 기도하지도 아니하고 그들 요구대로 화친조약을 맺고, 어떠한 경우에도 기브온 족속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수9:14-15)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수9:19-21)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으로 말미암아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었더라
이 조약을 맺고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위장술에 속아 화친조약을 맺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민 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신20:15-18)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훗날 그야말로 옆구리에 가시같은 존재를 두고 살아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지혜를 확신하고, 하나님보다 앞서 나아가며 백성들을 패배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상당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학문적으로도 탁월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지식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고 교회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그 훈계는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을 모방하러 해서는 안 되고, 각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이 집회 저 세미나로 돌아다니며,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빌려다 쓰는 대신,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고 말했을 때에도,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살아갈 때, 우리의 지침서는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종교 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은혜의 말씀이 그 속에 풍성하게 거하는 영적 지도자들은, 세상이나 다른 설교자의 설교로부터 아이디어들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가족을 돌보는 데 필요한 지혜를 그들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골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하나님의 은혜가 날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고후6: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시어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총명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시어, 영적으로 가장 부유한 삶이 되어 이웃 사람들에게 복이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시어, 여러분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들, 그것이 고난이든 좋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더욱 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주어진 삶에서 승리하시며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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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설교 - 영적인 눈이 열리다.
 

 


말씀 : 왕하6:14-17

제목 : 영적인 눈을 활짝 뜹시다.

우리 사람의 눈은 세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육안입니다. 말 그대로 육신의 눈입니다. 이 눈은 물질적인 눈이므로 물질을 보는 눈입니다. 자연을 보고, 길을 보고, 사람을 보고, 글씨를 봅니다. 그러므로 이 눈도 밝아야 좋습니다. 육신의 눈이 밝지 못하면 실족하기 쉽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가 없고, 글씨도 읽기가 어려우니 불편합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적인 눈입니다. 이 눈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지식의 눈, 윤리적 눈, 문화의 눈, 과학의 눈, 예술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도 밝아야 좋습니다. 윤리와 도덕에 밝아야 하고, 지식이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문화적인 안목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좀더 풍성한 삶을 사는데 유리합니다.

그 다음 마지막 눈이 영적인 눈입니다. 소위 영안이라고도 하고 신령한 눈이라고도 하는 눈입니다. 이 눈은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눈입니다. 물론 다른 눈들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눈들입니다.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영적인 눈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그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육적인 눈과 정신적인 눈을 통합하여 인간존재의 전체적인 면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안목으로 영과 육과 정신을 통괄하고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을 초월하여 엄청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어떤 눈이 인간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겠습니까? 육적인 눈입니까? 정신적인 눈입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한 눈도 인간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생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 영원한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은 영안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진정한 생명의 세계를 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누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영안이 활짝 열려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기억하였기에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인들 앞에 있는 자신들이 메뚜기같다고 말할 때, 그 거인들과 강한 성 때문에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을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에 우리는 분명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이 보고 말했던 그대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복지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말했던 그대로 광야에서 메뚜기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들에서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약 이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금 예수님을 찾아 따라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즉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먹고 입을 걱정은 안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을 주기 위하여 즉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모두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적인 눈을 밝았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눈은 밝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눈인 영적인 눈은 완전히 감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난 군중들 틈에서 빌라도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가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그러한 인생에게만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눈과 귀가 활짝 열린 사람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두 종류의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는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있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져 있는 사람은 선지자 엘리사요, 감겨져 있던 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아람나라는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계획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가기만하면 어떻게 알았든지 귀신같이 나와서 방비를 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계속하다가 결국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들의 침공에 대비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나라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서는 저 엘리사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4절에서 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그 성을 에워쌌다는 것은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그가 머물고 있는 도단 성에 많은 군대를 보내어 그 성을 포위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람의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성위에 올라가 보니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성이 적군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게하시는 너무 두렵고 놀라 허겁지겁 선지자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아아,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아람군대가 저렇게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습니다.’라고 외칩니다.

물론 뒤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아,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습니다. 저 많은 말과 병거와 군대를 좀 보십시오. 저렇게 우리를 에워싸고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가 살길이 어디 있겠습니까하는 절망적인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겁에 질려 두려워하고 있는 게하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게하시의 눈 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산 주위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아람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성안에 하나님의 군대인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람군대는 물러가고 말았고, 그 이후 얼마동안은 이스라엘을 침공해오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이 열렸을 때와 감겼을 때의 차이입니다. 먼저 게하시를 보십시오. 그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육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육적인 눈으로, 감각적인 눈으로, 세상의 경험적인 눈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 눈으로 볼때는 상황은 분명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숫적으로 월등히 열세입니다. 전력이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지적으로 아무리 따져보고 또 따져봐도 아니 따져 보나마나 척 하면 삼천리라고 이건 도저히 게임이 안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죽었다고, 이제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똑 같은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분명 사람의 논리나 경험으로 봐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분명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었습니다. 적군이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그냥 맞붙어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함락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 말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절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기 때문이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물론 우리가 손으로 만질수 있고 실제적 육체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인 말과 병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군대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너희를 안전히 보호해 주겠다는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사실은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숫적으로 우세하고, 전력이 월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분명히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결론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지도 않았습니다. 멸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다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망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적인 눈으로 결론 내렸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와 경험과 지식과 과학적 사고에 의하여 두려워하면서 이제는 끝장이라고 절망에 빠졌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지 않으면 상황만 보이고, 물질만 보이고, 조건만 보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적인 힘의 논리만이 있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의 재물만 보입니다. 세상의 권세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것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목숨을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실패를 경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게 됩니다. 마치 빙산이 8/9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는 육적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결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아니 그 영광의 나라가 분명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의 눈이 열린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환경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조건에 붙잡히지도 않습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와 향락의 노예로 전락하지도 않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절망의 수렁속으로 빠져 들지도 않습니다. 보다 멀리, 보다 온전히, 보다 아름답게, 보다 소망가운데, 보다 영광스러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을 이기고, 조건을 이기고,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어둠의 세력들과 모든 유혹자들을 이기게 됩니다. 진정한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가 또다시 밝아 왔습니다.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작년이나 올해나 동일하게 흘러가지만 그러나 그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결국은 승리하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정녕 지배할 수 있는 자는 곧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 시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지배하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영안이 활짝 열린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그러므로 이 시간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더욱 활짝 떠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귀가 더욱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안에서 하나님안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상황을 보고 조건을 보고 환경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눈으로 모든 환경과 상황과 약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과 어두운 것들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말씀안에서 인도하심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가난과 미움과 증오와 염려와 낙심과 절망을 이기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이 한해에는 더욱 기쁨과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아름다운 한해가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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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교회 성탄절 설교 - 뜻 깊은 성탄절

 


 


제목 : 뜻깊은 성탄절

말씀 : 사9:1-7

메리 크리스마스! 먼저 이 뜻깊은 성탄을 맞이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뜻 깊은 날, 인류를 구원해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신 이 날에 여기 앉아 계신 모든 분들과 우리의 모든 이웃들에게 하나님안에 있는 그 생명과 은혜과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그 어떤 날보다도, 그 어떤 축제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기쁜 날이고 가장 감격적인 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이 일보다 더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일보다 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억만금을 준 들 이보다 기쁘겠으며, 무병장수의 복을 주신들 이보다 기쁘겠으며, 출세의 복을 주신들 이보다 기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마음껏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음껏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은혜와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같이 함께 기뻐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이와같이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와 기쁨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건만 세상에는 아직도 어둠과 무지와 사망의 권세에 억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들 자신도 이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여 이 기쁨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성탄절에 마음껏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아직도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 오신 참뜻을 바르게 전하여 저들도 주님안에서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 갈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며 힘쓰는 이 성탄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성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성탄을 맞이하여 그렇게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만민에게 증거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여기에 대하여 나눌 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한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성탄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날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은 성탄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중의 하나입니다. 즉 성탄은 인류를 구속해 주시겠다고 이미 여러번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신구약 성경66권 중에는 하나님의 허락과 약속이 12,00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이미 정확하게 이루어진 예언이 2,000가지이고 나머지 예언들은 지금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개인에 대한 예언, 도시나 나라에 대한 예언, 복에 대한 예언, 화에 대한 예언, 메시야에 대한 예언 등 다양합니다. 개인적인 예언 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예언은 아브라함에 대한 예언이지요. 창12:2절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셨는데 그대로 되었지요. 또 늙어서 소망이 없는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하자 그대로 되었지요. 그밖에 수많은 개인에 관한 예언들이 있고, 그들 중 많은 것은 이미 성취되었고, 또 어떻게 것들은 하나씩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나라에 대한 예언도 많이 있는 데 욜3:19에 보면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강포를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애굽은 최강대국이었습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이며 세계최대의 문화를 꽃피웠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예언대로 그 이후 이집트는 미약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약소국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예언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모두 191개나 됩니다. 창세기로 시작해서 말라기까지 계속해서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데 그게 무려 191개나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도 메시야에 대한 대표적 예언중 하나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 이 예언은 그냥 막연한 예언이 아닙니다. 긴가민가한 그런 어슴푸레한 예언이 아닙니다. 장차 한 메시야가 태어나실 것인데 그 분은 정사 즉 모든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 즉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전능하신 아버지 즉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평강의 왕으로써 인류에게 진정한 평강을 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보존 하실 것인데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750년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인데 드디어 그 말씀대로 약2,000년전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우주의 통치권을 가지신 분으로, 기묘자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셔서 진정한 평강을 주시고 지금 여전히 성령으로 통치하시며 그 나라를 세워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날입니다. 인류구원의 약속을 실현하신 날입니다.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날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겠다던 약속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너무나 뜻깊은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은혜가 임한 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비춰진 날입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되는 날입니다.

따라서 이날은 우리에게 더 큰 소망을 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귀한 예언의 말씀들이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림하신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졌듯이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약속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성탄절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놀라운 사랑으로 그 약속대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약한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음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차 이루어질 주님의 재림에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장차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이루어질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소망속에 주님과 동행하시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탄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도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영광스럽고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화해의 손길를 내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직접 방문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도 물론 하나님께서 예언해 주신 그대로 입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서 임마누는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여러분, 원래 화해는 잘못한 사람이 먼저 요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먼저 잘못했다고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먼저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언가 아쉬운 사람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으려면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범을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무언가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죄로 말미암아서 죽을 수 밖는 없는 인생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아쉬운 사람은 우리인데 도리어 하나님이 아쉬워서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은 우린데 사실 하나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쉬울것이 없으신 분이신데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거부하고, 거역하고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도저히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사람은 우리들인데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 앞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이마에 피가 흐르도록 머리를 조아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우리인데 죄와 무지로 어리석음 속에 있는 인생은 도리어 하나님을 외면하였는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찾아오셔서 심지어는 우리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불효막심한 자식, 허랑방탕한 자식, 온갖 몹쓸 짓을 다해서 부모 망신 다시키고, 부모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았던 자식, 그래서 사람들이 손가질하고 욕하고 침뱉고 하던 그 자식, 그러나 그 부모는 그 자식을 버릴 수가 없어서 그 자식을 위하여 대신 죽은 것처럼, 그 불효막심한 자식을 대신해서 감옥에 갇힌 것처럼 하나님이 이 죄인을 찾아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추하고 냄새나고 죽을 수 밖는 없는 죄인을 죽도록 사랑하사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과를 대신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탄절을 맞아 이러한 사실도 다시한번 되새기며 죽을 수 밖는 없는 인생을 버리지 않고 찾아주신 예수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려고 찾아오신 예수님, 아쉬운 것은 우리인데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고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을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여 그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을 벗어던지고 더욱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탄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오신 날입니다.

여러분, 이 성탄절이 그렇게 소중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하는 이유는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급박하고 너무나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세상 사람치고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고,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 죄인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자나 안 다니는 자나,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다 죄인입니다. 그 죄가 작든 크든 우리는 모두 죄가운데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갈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람과의 사이에 너무나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물질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수많은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죄로 말미암아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도 없고, 진정한 평안도 기쁨도 은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죄가운데 있는 인생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미 스스로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셨고, 찾아 오셔서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롬3:23,24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 마1:21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말 그대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할 수가 없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성탄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기 바랍니다. 구원자로 오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간 구원의 주께서 여러분의 심령속의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을 몰아내고 여러분의 심령에는 빛으로 오신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주로 오신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4.성탄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할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날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성탄절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려고 주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을 맞는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그런 하나님과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과 경배와 찬양을 돌려 드려야 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에 천사와 목자들의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눅2:11-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하나님께 큰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또 눅2:20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즉 천사들의 예고를 듣고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를 본 목자들은 하나님께 큰 영광과 찬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2:10,1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즉 동방의 박사들이 800Km되는 먼길을 위험을 무릎쓰고 찾아와 아기 예수를 만났을 때 그들은 가장 기뻐하고 또 기뻐하며 아기 예수께 가장 귀한 예물을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 주신 날이기에날,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날이기에,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주신 날이기에 우리는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그저 사랑사랑하면서 우리 끼리 좋아서 기뻐 뛰노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사랑사랑하면서 우리 끼리 선물이나 주고 받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사랑사랑하면서 가난한 이웃이나 돕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들도 마땅히 다 해야 될 일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정말 감사하고, 정말 영광돌려드리고, 정말 경배해야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뜻깊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 죄로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찾아오신 예수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다시한번 기억하며 그분을 온전히 모셔들여 그 분께 모든 감사와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기뻐하는 가운데 이 올바른 성탄의 의미를 세상에도 널리 증거하여 세상 만민들도 우리와 같이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갈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며 힘씀으로 이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이루어 갈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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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윤석 목사 12월 주일 낮 예배 설교 (December Sunday worship preaching) 
 

 

 

설교제목: 그릇을 내게 가져오라

말씀 : 열왕기하 4 : 2 ~ 6)

 


본문 말씀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어 빚을 갚게 하고 종으로 잡혀갈 두 아들을 구해준 엘리사의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 기사를 통하여 자녀의 문제 등 일상 삶속에서 급박한 난제를 가진 성도들의 문제 해결 방안과 회복의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엘리사는 가진 것이라곤 기름 한 병뿐인 가난한 여인에게 “너는 밖에 나가서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되 많이 빌려오라”고 합니다(3).

그 여인이 계산하지 않고 엘리사의 말에 묵묵히 순종할 때 빈 그릇이 채워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계산하지 않는 순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의 배후에는 말없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하인들이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나병으로부터 고침 받은 것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였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말을 들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므로 딸의 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섭섭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그 일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면 계산하지 말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기드온의 삼백 명 용사들은 삼만 이천 명 중에서 선발된 정병들이었지만 전장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기껏 나팔과 항아리 횃불을 들고 소리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꺼이 순종하니 미디안 14만 오천 명의 대군을 물리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은 이해되지 않아도, 일이 초라하여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계산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라(4상)”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환경을 닫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복 받지 못하도록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는 죄이니(사59:1,2),  죄의 길, 음행(고전6:18)과 분쟁, 다툼을 피하고(딛3:9) 문을 닫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릇이 아무리 좋아도 청결하지 않으면 물건을 담을 수 없습니다.

채워진 그릇에는 물건을 담을 수 없습니다.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몇 알 되지 않는 밥알도, 그릇 가장자리에 묻은 고춧가루도,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어내야 합니다. 날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내 마음은 씻어내지 않으려 고집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며,  마음 그릇을 성결하게 준비하여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 자리에 나올 때마다 주실 은혜를 바라보며 내 연약함을 채워주실 것을 믿으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와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된 그릇만큼 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 성취를 위하여 나의 생각과 상식, 상황논리로 계산하지 말고 세상 관심에 문을 닫으십시오.

나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순종하기 어려워도 순종하며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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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신년감사예배설교 : 믿음의 승리자

 

 

 

제목 : 믿음의 승리자

말씀 : 삼상17:45-49

할렐루야! 새롭게 밝아온 2019년도 새해에도 더욱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충만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안과 기쁨과 승리가 충만한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옆의 분들과도 새해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주의 은혜가 가득한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 복 많이 받는 새해가 되고 싶으시지요? 그거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말씀따라 가면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푯대삼아 달려가면 됩니다. 물론 그 자체가 어려울지 모르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분명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복인 영과 육과 혼이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복은 말씀 안에 있는 자에게 분명히 약속하신 복이고 우리 인간이 누려야 할 진짜 복입니다.

그래서 요삼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올해 한해 동안도 그저 말씀따라 살아가심으로 이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따라갈 때에 영과 혼과 육이 잘되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형통하는 복된 삶을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런 복을 누리려면 조금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26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저 머나먼 하늘나라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나의 삶에 현재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때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전인적인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는데 적장은 어마어마한 거인 골리앗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무려 2m 80Cm나 되었고 머리에는 놋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갑옷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만 무려 100근이나 되었고, 창날만 12근, 창자루는 베틀채 같았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한손으로 들어올리기도 어려운 커다란 창을 막대기 휘두르듯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거인이 이스라엘 진을 향하여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스라엘 겁쟁이들아, 누구든지 나와 싸울 용기가 있으면 나와봐라. 누구든지 나와 싸워서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이기면 너희들은 모두 우리의 종이 될 줄 알아라.” 그러자 이스라엘 군인들은 기가 죽어서 아무소리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형들을 보기 위하여 전쟁터에 왔던 다윗이 이 소리를 듣습니다. 다윗은 의분을 느끼며 이 할례없는 블레셋 놈들이 감히 사신 하나님을 모욕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서 저 놈을 물리치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군인들과 사울왕은 만류합니다. 얘야, 우리 장수들도 저렇게 꼼짝 못하고 있는데 소년인 네가 가서 어쩌겠다는 거냐, 용기는 가상 하다만 괜히 가서 봉변 당하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그러나 다윗은 내가 이래뵈도 양을 칠 때에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 가면 쫓아가서 뺏어 왔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을 향하여 달려가다가 물매로 힘차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자 돌이 골리앗의 이마 가운데 박혀 골리앗은 맥없이 쓰러지고 결국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씀속에서 우리는 다윗이 승리할 수 밖에 없었던 몇가지 요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추상적인 미래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현재적으로 나와함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 읽지는 못했지만 26절 하반절 보세요.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여러분, 보세요.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 현재적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도전장을 내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백을 믿고 큰소리를 치며 나가서 싸웠고,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결국 승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은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역사하십니다. 그저 머언먼 천국에 계신 하나님, 영원한 미래에 만날 하나님이 아니라 아니면 그냥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고상한 어떤 이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현재적으로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렘10:10에서는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런 바로 지금 내 곁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의연했던 것입니다. 지금 바로 자기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그까짓 골리앗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골리앗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핍박이나 낮아짐이나 그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그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시27:3에서 고백합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먼데 하나님이 아닙니다. 가까운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머언먼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성령으로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격려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다시 밝아온 2010년도 새해에도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바로 우리 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 살아갈 때에 그 능력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환경과 상황과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영과 혼과 육의 전인이 승리하며 풍성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37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비단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오늘 다 읽지 못했습니다만 3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여러분, 얼마나 생생한 구원의 체험입니까? 다윗은 거인이 아닙니다. 더구나 성인도 아닌 소년입니다. 그런데 사자와 곰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겼습니다. 왜요? 구원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골리앗도 구원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나아가 싸워 결국 그 믿음대로 이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적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을 주실 분이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미래에만 구원해 주시고 승리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구원해 주시고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보세요,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내어밀었을 때에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요단강에 들어서자 강물이 둑처럼 쌓여 멈췄습니다. 여호사밧이 성가대를 앞세워 찬양하니까 적군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싸워 전멸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하시니까 죽은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사변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단순한 윤리적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다시 살리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믿고 그와 동행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영적으로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연약함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족함도 얼마든지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심하고 절망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원망 불평 근심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뢰하면 반드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육신과 정신과 물질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 주님을 의지하고 나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45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제는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 분을 의지하고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 45절 보세요.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러분, 참 얼마나 대단한 광경입니까?

한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골리앗은 키가 거의 3m에 가깝습니다. 보통 사람은 들기조차 어려운 창을 막대기 휘두르듯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소년입니다. 갑옷도 투구도 없습니다. 무기라고는 물매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 다윗이 그 거인 골리앗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의 안목으로는 이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는 주저없이 달려갑니다. 왜요? 그에게 든든한 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썩같이 믿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골리앗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달려가 그 어마어마한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승리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이 던질 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힘이나 용맹성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전쟁의 승리의 비결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확실히 신뢰하고 나아갈때에 하나님께서 담대함과 능력과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담대함을 주시니 두려울 것 없었습니다. 더욱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승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승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능력을 얻습니다. 담대함을 얻습니다. 지혜를 얻습니다. 평안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하20:20절에서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세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세요. 제 말을 믿으세요.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안 믿어요. 좋습니다. 제 말이 단순히 저의 말이라면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믿으세요. 여러분의 그 알량한 이성과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믿음과 순종과 신뢰의 대상일 뿐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2019년 한해도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담대함과 지혜와 은혜로써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모든 골리앗과 같은 것들을 다 이기고 승리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26절)

여러분, 골리앗과 다윗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모든 위험을 무릎쓰고 나아가 싸운 것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골리앗과 싸워 이김으로 큰 명예를 얻겠다든지 혹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였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26절 하반절 다시 보세요.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감히 이 이방인이 하나님을 모욕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그는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처단했던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의분을 느끼고 골리앗에게 나아갔던 이유는 자신의 영광이나 명예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가 모욕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또 다른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면 실패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종은 모든 영광을 주인에게 돌려야 합니다. 대통령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든 공을 대통령에게 돌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쫓겨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고, 바르게 유지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이루어지고,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누리게 되고, 그럴 때 결국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고 나도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삶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2019년 올해 복받기를 원하시죠? 승리하기 원하시죠? 여러분, 그거 쉽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라가면 됩니다. 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함께 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형통함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능히 이기고 영과 육과 혼이 정말 하나님의 안에 있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올 한해동안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때에 영과 육과 혼이 잘되고 형통하고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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