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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송구영신예배설교 : 영적인 눈이 열리는 새해

 

 


말씀 : 왕하6:14-17

제목 : 영적인 눈을 활짝 뜹시다.

우리 사람의 눈은 세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육안입니다. 말 그대로 육신의 눈입니다. 이 눈은 물질적인 눈이므로 물질을 보는 눈입니다. 자연을 보고, 길을 보고, 사람을 보고, 글씨를 봅니다. 그러므로 이 눈도 밝아야 좋습니다. 육신의 눈이 밝지 못하면 실족하기 쉽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가 없고, 글씨도 읽기가 어려우니 불편합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적인 눈입니다. 이 눈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지식의 눈, 윤리적 눈, 문화의 눈, 과학의 눈, 예술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도 밝아야 좋습니다. 윤리와 도덕에 밝아야 하고, 지식이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문화적인 안목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좀더 풍성한 삶을 사는데 유리합니다.

그 다음 마지막 눈이 영적인 눈입니다. 소위 영안이라고도 하고 신령한 눈이라고도 하는 눈입니다. 이 눈은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눈입니다. 물론 다른 눈들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눈들입니다.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영적인 눈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그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육적인 눈과 정신적인 눈을 통합하여 인간존재의 전체적인 면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안목으로 영과 육과 정신을 통괄하고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을 초월하여 엄청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어떤 눈이 인간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겠습니까? 육적인 눈입니까? 정신적인 눈입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한 눈도 인간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생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 영원한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은 영안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진정한 생명의 세계를 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누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영안이 활짝 열려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기억하였기에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인들 앞에 있는 자신들이 메뚜기같다고 말할 때, 그 거인들과 강한 성 때문에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을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에 우리는 분명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이 보고 말했던 그대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복지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말했던 그대로 광야에서 메뚜기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들에서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약 이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금 예수님을 찾아 따라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즉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먹고 입을 걱정은 안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을 주기 위하여 즉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모두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적인 눈을 밝았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눈은 밝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눈인 영적인 눈은 완전히 감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난 군중들 틈에서 빌라도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가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그러한 인생에게만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눈과 귀가 활짝 열린 사람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두 종류의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는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있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져 있는 사람은 선지자 엘리사요, 감겨져 있던 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아람나라는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계획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가기만하면 어떻게 알았든지 귀신같이 나와서 방비를 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계속하다가 결국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들의 침공에 대비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나라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서는 저 엘리사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4절에서 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그 성을 에워쌌다는 것은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그가 머물고 있는 도단 성에 많은 군대를 보내어 그 성을 포위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람의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성위에 올라가 보니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성이 적군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게하시는 너무 두렵고 놀라 허겁지겁 선지자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아아,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아람군대가 저렇게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습니다.’라고 외칩니다.

물론 뒤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아,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습니다. 저 많은 말과 병거와 군대를 좀 보십시오. 저렇게 우리를 에워싸고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가 살길이 어디 있겠습니까하는 절망적인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겁에 질려 두려워하고 있는 게하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게하시의 눈 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산 주위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아람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성안에 하나님의 군대인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람군대는 물러가고 말았고, 그 이후 얼마동안은 이스라엘을 침공해오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이 열렸을 때와 감겼을 때의 차이입니다. 먼저 게하시를 보십시오. 그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육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육적인 눈으로, 감각적인 눈으로, 세상의 경험적인 눈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 눈으로 볼때는 상황은 분명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숫적으로 월등히 열세입니다. 전력이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지적으로 아무리 따져보고 또 따져봐도 아니 따져 보나마나 척 하면 삼천리라고 이건 도저히 게임이 안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죽었다고, 이제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똑 같은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분명 사람의 논리나 경험으로 봐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분명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었습니다. 적군이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그냥 맞붙어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함락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 말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절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기 때문이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물론 우리가 손으로 만질수 있고 실제적 육체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인 말과 병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군대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너희를 안전히 보호해 주겠다는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사실은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숫적으로 우세하고, 전력이 월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분명히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결론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지도 않았습니다. 멸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다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망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적인 눈으로 결론 내렸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와 경험과 지식과 과학적 사고에 의하여 두려워하면서 이제는 끝장이라고 절망에 빠졌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지 않으면 상황만 보이고, 물질만 보이고, 조건만 보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적인 힘의 논리만이 있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의 재물만 보입니다. 세상의 권세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것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목숨을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실패를 경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게 됩니다. 마치 빙산이 8/9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는 육적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결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아니 그 영광의 나라가 분명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의 눈이 열린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환경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조건에 붙잡히지도 않습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와 향락의 노예로 전락하지도 않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절망의 수렁속으로 빠져 들지도 않습니다. 보다 멀리, 보다 온전히, 보다 아름답게, 보다 소망가운데, 보다 영광스러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을 이기고, 조건을 이기고,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어둠의 세력들과 모든 유혹자들을 이기게 됩니다. 진정한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가 또다시 밝아 왔습니다.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작년이나 올해나 동일하게 흘러가지만 그러나 그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결국은 승리하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정녕 지배할 수 있는 자는 곧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 시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지배하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영안이 활짝 열린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그러므로 이 시간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더욱 활짝 떠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귀가 더욱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안에서 하나님안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상황을 보고 조건을 보고 환경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눈으로 모든 환경과 상황과 약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과 어두운 것들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말씀안에서 인도하심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가난과 미움과 증오와 염려와 낙심과 절망을 이기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이 한해에는 더욱 기쁨과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아름다운 한해가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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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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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예배 설교 :: 참되 성탄 준비 (Christmas Worship Preaching)

 


 
제목 : 진정한 성탄 준비

말씀 : 요17:14-17

1.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물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되새기며 주님을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약 왕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어떻게 왕의 예우를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또 만약 왕이 나에게 높은 자리라도 하나 주려고 왔는데 난 높은 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돈이나 한보따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나 지위는커녕 왕의 분노만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참 뜻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실망과 좌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성인군자라고 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어떤 경우는 건강이나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집안이나 거리나 상점이나 교회에 여러 가지 장식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정작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되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성탄축하프로그램도 하고 외부장식도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들도 도우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도 당연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성탄절이웃초청잔치도 하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하며 성탄절 헌금의 거의 전부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주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로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배 만배 억배 중요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마1:21절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류가 이 땅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원토록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발달해도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대강절을 맞아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이 넘침으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마6: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진대 어떻게 악 가운데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악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은혜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도 모든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많은 인생들이 이걸 몰라서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 안에서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가운데 살아갈때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인데 오직 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면서 악한 방법으로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할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틈이 벌어져 갈등과 불신과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는커녕 갈등과 불화와 상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행하면서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다음에는 진정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누리며 주님의 향기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고 믿음과 사랑과 의와 선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달콤하고 교묘한 유혹과 도전과 왜곡된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이 우리 심령 속에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되고 악한 것들에게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간파하고 즉시 물리치게 됩니다. 감히 마귀 따위가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겁 없이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아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환경과 왜곡된 가치관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만한 분별력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 향락주의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게 되고, 악을 분별하며 거부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감으로 거룩한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대부분이 미동도 안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모입시다. 기도합시다. 예배드립시다해도 꿈쩍도 안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또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선과 의와 진리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면서 주님이 오신 참뜻을 바르게 알고 진실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이 왜곡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 아직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여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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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 빛의 은혜가 가득한 새해

 

 


말씀 : 잠6:20-24

제목 : 빛의 은혜가 충만한 새해

1.빛의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또다시 201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도 여러분과 가정과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들과 여러분들의 자녀와 우리가 교회와 이 나라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 온 땅위에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옆에 분들과도 축복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화와 건강과 풍성함이 넘치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냥 희망과 위로를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소망과 위로가 있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잠4:18절 보세요.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보세요.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돋는 햇살, 아침 햇살이지요. 어둠을 뚫고 태양이 솟아오를 때처럼 마침내 빛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태양이 점점 떠올라 마침내 온 세상이 말 그대로 대낮같이 밝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빛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의인이 누굽니까? 주님을 따르는 자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른다고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빛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빛과 같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말씀을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려면 오직 말씀따라 가야 합니다. 그게 가장 안전한 길이고 복된 길이고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길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누리려면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빛을 향해 가지 않고 어둠을 향해 가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과연 빛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빛입니까? 오직 말씀 밖에 더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무엇이 인생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까? 과학이 등불이 될 수 있나요? 지식이나 문화나 철학이 등불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명의 도를 압니까? 어떻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압니까? 어떻게 영적 정신적 윤리적 육체적 물질적 모든 문제를 알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충만하셔서 우주만물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고 하실 수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충만하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우주와 생명과 인간이 어떻게 출발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의 실상은 어떤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으로 갔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시고 그곳으로 인도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그걸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등불인 것입니다.

 

오늘 23절을 보겠습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보세요.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는 생명의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에 보면 사람들이 뭐 좀 안다고 속된 말로 까불고 있습니다. 뭐 좀 알게 되었다고 교만해져서 꼴난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경험을 성경위에 두고 그래서 성경을 아예 무시하거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적용하며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들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할 수 있다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합니까? 이 광활한 우주만물 속에서, 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기들이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데, 하나님이 훅 불면 한방에 훅 가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런 어리석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귀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세상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한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오직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을 등불로 삼았으면 이제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안 그래요? 말씀을 등불로 삼고 그걸 따라가지 않으면 소용없지 않습니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지 않습니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만 말씀말씀 하면서 안 따라가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등불인 말씀을 따라 가야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우리의 심비에 완전히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말씀이 나를 인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말씀이 내 심비에 콱 새겨져 있어야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말씀이 내 마음에서 희미해지지 않고 그 말씀 따라 살 것 아닙니까? 만약 말씀이 내 영혼 속에서 희미하고 도리어 세상의 것들이 각인되어 있으면 말씀따라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의 것을 따라 살게 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내 마음 속에 말씀이 새겨져 있지 않고 세상의 돈과 명예와 세상 즐거움과 부귀영화가 새겨져 있다면 무얼 따라가겠습니까? 말하나마나 세상 따라 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21절을 보십시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돌에다 철필로 새기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심비에 새겨 넣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세상 즐거움이나 향락이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말씀이 희미해지지 않고 자신을 인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말씀을 심비에 새겨 넣음으로 환난이나 핍박이나 조롱이나 그 어떤 시험 앞에서도 그 말씀이 자신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네 목에 매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가까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이 눈앞에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그냥 말씀이 항상 눈앞에서 어른 거려 결코 딴 짓을 못하고 늘 말씀을 따라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란 물론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죽어도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말씀 그대로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나 세상 즐거움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김으로 오직 말씀 안에서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데 그 안에 있어야 생명의 은총을 누릴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올 한해를 살아갈 때에 오직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말씀이 심비에 콱 새겨져서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씀 안에서 말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감으로 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상황과 도전과 위협과 왜곡된 가치관을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위로와 소망과 승리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말씀 안에 살아갈 때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 안에 살아가는 자는 분명히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22절을 보겠습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보십시오.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에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할 것이다. 잘 때에 보호한다.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심지어 우리가 잠이 들어 있어도 그 말씀은 잘들지 않고 우리를 보호합니다. 말씀과 은혜가 우리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잘때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칩니다. 잠자리가 평안합니다. 꿈도 행복한 꿈이 꿔집니다. 그러나 심비에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이 새겨져 있으면 마귀의 꿈을 꾸게 됩니다. 깨어 있을 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깰 때에 더불어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씀 그대로 말씀이 심비에 새겨져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를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것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새겨져 있으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사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고 보호함으로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무엇이 너를 지킬 것이라고요? 명령, 법, 훈계 즉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유혹에서 건지고, 악에서 지켜주어 생명의 길로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심비에 콱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감히 어떤 어둠의 세력이 속된 말로 까불겠습니까? 설령 까불어도 한방에 때려 눕힐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속삭여도 대번에 알아채고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치며 쫓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가도록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심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등불이며 빛이며 진리이며 안내자이며 보호자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도전과 시련과 환경과 상황을 주님의 권능과 지혜로 이기고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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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믿는 이유

제 목: 지옥은 존재하는가?
성 경: 계21:5~8


어느 극장에 코메디(comedy)를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그만 화재가 났습니다.

그때 코메디언(comedian)이 나와서 침착하게 알리기를,

"여러분, 이 극장에서 지금 화재가 발생했으니 빨리 질서있게 나가 주십시요"라고 말하자, 청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참 잘 웃긴 다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자 코메디안이 다시 나와서, "아니 여러분, 정말 이 극장에 불이 났으니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하고 심각하게 말을 해도 여전히 웃기는 말로만 듣고 좋아하다가 많은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가장 심각하게 들어야 할 설교가 지옥에 관한 설교인데, "지옥"하면 웃기는 말이나 농담으로 들으려고 하는 세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자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설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목사는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고 감칠맛 나는 설교만 할 수 는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가 싫어해도 주사를 놓아야 할 때는 놓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해도 칼로 째야 할 때는 째고 수술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목사도 듣기 좋은 설교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기가 좋고 흥미가 없어도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 니다. 딕슨 박사(Dr.A.C.Dixon)가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강단에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더 많이 했더라면 우리 사회에서 지옥과 같은 현실이 더 적어졌을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도덕적 질병이 잘로 심각해 지는 것은 지옥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옥에 관한 설교를 분명히 해주었더라면, 성도들이 더 많이 전도했을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과 교인들이 지옥의 존재를 분명히 믿고,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멸망받아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교인 숫자만 많으면 무엇하느냐?"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결코 없으리라고 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기독교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고 전해야 됩니다.


1.지옥은 존재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의 어떻게 사람을 그 고통스러운 지옥에 보낼 수가 있느냐고 흔히들 말합니다. 지옥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곳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천사장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마귀들을 위해서 예비된 곳인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마귀를 쫓아가다가 함께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양있는 여자가 목사님께, "나는 지옥의 사상 같은 것은 싫어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그 말씀을 듣고, "옳습니다. 사람들이 형무소를 싫어하고 전기의자나 교수형 같은 사형을 싫어하지만, 어쩔수 없이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임과 같이 죽은 후에 심판이 있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름주고, 김 매고, 비료줘서 농사짓고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가을에 반드시 타작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놓는 때가 있는 것과 같이, 최후에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모든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셔서 지옥의 형벌을 주시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100년 후에는 성경이 다 없어진다고 호언장담하며 무신론의 책자를 많이 출판했는데, 도리어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집은 성경을 보급하는 성서공회가 되어 성경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볼테르는 죽어갈 때,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였구나! 의사여, 나를 6개월마 더 살게해 주십시요. 그리하면 내 보물의 절반을 주겠고"하고 말했습니 다. 그때 의사는, "당신은 6주간도 못 살겠소"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가 병중에서 죽음에 임박하자 극도로 고민하여 흉하게 떨어서, 돌보던 의사가 정신을 못차렸다고 합니다. 그는 최후에, "나는 지옥에 가노라"고 스스로 말하며 죽었습니다. 프랜시스 뉴톤(Francis New- ton)이라는 무신론자는 임종시에, "나는 영원히 정죄받았구나!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되었으니 누가 나를 구원하리요? 아! 지옥과 저주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내가 받았노라"고 말하며 절명했습니다. 토마스 스코트경(Sir Thomas Scott)은 죽을 때에 말하기를, "나는 이때 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노라! 나는 전능자(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멸망으로 들어가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페리콜드(Perigold)라는 무신론자는 임종시에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나는 영원한 정죄 받은 자의 고통을 받으면서, "나는 영원한 정 죄 받은 자의 고통을 받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상의 예보다 더욱 확실한 것은, 거짓없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여러차례 강조해서 지옥의 실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말씀보다 지옥에 대한 말씀이 더 많습니다. 성경에 한두번 말 씀하셨어도 반드시 이루어졌는데, 그렇게 많이 강조하신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지옥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환란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여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지옥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옥이 없다고 말해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반대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법을 어긴 자들을 위하여 감옥과 사형과 형벌이 있음과 같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들을 위해서 형벌과 지옥이 있다는 것은 옳고 당연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뒤 5분도 못되어 그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때입니다. 2.지옥은 어떤 곳인가? 어떤 사람은 지옥은 한낱 묘사요, 그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인간의 말로 표현한 것보다 못지 않게 고통스러운 곳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실제는 그림이나 묘사보다 뜨겁습니다. 지옥은 어떤 말의 표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뜨거운 곳입니다. 지옥에서 고 통당하는 자의 기억이 더 뜨겁게 할것입니다. 강도는 지옥에서 그가 죽인 희생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투전꾼은 자기가 속여먹는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한 사람은 믿을 수 있었던 기회를 기억하고 더 괴로워 할 것입니다. 죄는 불의 뜨거움을 더할 것입 니다. 야심 또한 불의 뜨거움을 더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1)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으며, 벌레 한마리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5:22계20:10,14,15218,막9:48,사66:24).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슬피 울 며 이를 가는 곳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마25:30). 설혹 육신적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신적 고통은 육신의 고통 못지 않게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길레 정신적 고통으로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너무너무 목이 타고 고통스러워서, 자기 집에서 얻어먹던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만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사정했으나, 그나마도 허락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어차피 이 고통스러운 곳에 왔지만 집에 남아있는 다섯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이곳에 오지 않도록 증거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얼마나 뜨겁고 목이타고 고통스럽길래 그랬겠습니까? (2)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지나간 주간에 부흥회 인도하러간 교회의 목사님이, "피곤 한데 사우나 목욕이나 가서 땀을 좀내자"고 해서 같이 갔다가 말 한마디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뜨거운 도크에 들어가서 땀을 내다가 너무너무 뜨거워서 참다 못해 뛰어나가면서, "예이, 여기서는 참다 못 참으면 뛰쳐 나갈수나 있지, 지옥에 한번 들어가면 아무리 뜨거 원도 나갈수도 없으니..... 그것도 영원히"라고 하는 말에 큰 은혜를 받고, 그 고통스러운 곳에 안가도록 지옥에 대한 설교를 또 한번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는 죽음으로 가능하지만, 지옥에서는 출구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세상이 괴롭 다고 자살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후라이판이 뜨겁다고 영원한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Sanfrancisco)의 금문교에서 내려다보면 바다 한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에 감옥이 있습니다. 왜 그곳에 감옥을 지었느냐 하면, 종신형을 받은 사람 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곳에 지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탈출한다고 해도 물살이 세서 헤엄을 못치고, 헤엄을 쳐도 물이 차서 심장마비가 걸리거나, 아니면 헤엄쳐 나오다가 상어밥이 되기 때문에 탈출한 생각을 못한답니다. 그래도 그 감옥 창설이래 한 사람인가가 탈출해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도망칠 수 있는 문도, 길도 영원히 없습니다. (3)끝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젠가는 속박의 생활이 끝나리라는 소망을 가졌고, 후에 실제로 모세가 나타나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감옥에 힌 사람도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며, 병원의 병자도 회복될 희망을 가지고, 또 회복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은 영원히 끝이 없습니다. 어떤이는 " 이 짧은 생애 동안에 지은 죄로 영원한 형벌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말하지만, 그러나 형벌 은 죄의 성질에 따라서 부과하는 것이지, 그 죄를 범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어떤 강도는 삼초동안에 살인하고, 어떤 강도는 세시간 걸려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시간에 따라 죄와 형벌이 작거나 커지지 않습니다. 모든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어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태평양의 바닷물을 참새 한 마리가 입으로 한모금씩 옮겨 대서양을 채운다고 합시다. 태평양의 물이 다 마르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영원에 비하면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옥에서 영원히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4)모든 종류의 사람이 섞여서 지냅니다. 지옥에는 모든 계급, 모든 종족, 모든 피부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저급한 인간을 상대하지 않던 사람도 지옥에서는 최하급 저질의 인간과 함께 지내며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지옥사회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의 술객들과 우상숭배 들과 모든 거짓말하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러분, 혹시 나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믿지 않는 자"도 극악한 죄인들과 함께 불못에 던지운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크게 보이는 죄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산 사람은, 세상적인 표준에서 훌륭해 보여도 지옥에 참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크리스챤 아내를 가진 사람도, 좋은 크리스챤 부모를 가진 사람도,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배척하고 진심으로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모르고, 자기의 선행과 공적을 의존했던 사람은 다 지옥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믿고 영접하지 않은채 죽으면 오늘의 설교가 마지막 초청의 기회가 될른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아 한 사람도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 천국이요, 안 믿으면 멸망이요, 지옥입니다. 일찌기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이 크게 들어쓰신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믿음으로 지옥불을 바라보며, 멸망해가는 영혼을 하나라도 더 구원하려고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천구과 지옥에 대한 확신을 주신 것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신앙 때문에 우리 교회가 끊임없이 부흥되고, 없는 가운데서 세 계적인 성전을 건축하게 되고, 국내 외에 쉴 새 없이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지옥이 없다면 반드시 예수 믿으라고 할 필요도 없고 목사노릇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을 속히 속히 구원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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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예식 설교 (임종,입관,발인,하관,위로 예배 설교)

 

 

 


 

장례예배란

장례예식을 잘 치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부활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다. 죽음은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정의 중대한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국가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일들이 뒤따르는 인간사의 중대한 장면이다.

성도의 시신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생명의 부활로 나올 몸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담겨있던 육신을 정중히 다루는 것이 유가족에 대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떠난 육신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겨 우상시할 필요는 없다.

장례의 의의는 무엇보다 유족들을 위로하면서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과 이것을 계기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크게 도모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항상 마음에 두고 봉사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장례예식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신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장례식에는 임종예배,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 위로예배의 다섯 가지 예식이 있다. 이 가운데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은 매우 중요한 예식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장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발인(출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례예배 실제

 

1) 임종예배
사람의 호흡이 끊어져 인생의 종말을 고하며, 천국에 들어가는 때가 곧 임종이다. 세상에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구원의 확신이 없이 임종하였다면 그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다시없는 비극이다.

* 어떻게 운명이 임박한 것을 알 수 있는가? 심장이 거의 멎어가는 사람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 안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멎어 있으면 곧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그때에 손발을 살펴보아서 손톱과 발톱이 새까매지면 운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운명하려 할 때 집례자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만 의지하도록 권면하고, 마지막 임종 기도를 드리며, 찬송을 계속 부르는 것이 좋다. 또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임종시에 신앙고백을 듣고 유족들에게 “예수님을 잘 믿어라”는 한 마디의 유언을 남길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 운명한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운명한 다음 중요한 것은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이다. 그러므로 임종예배가 끝나면 교회는 즉시 상가와 장례절차를 결정하고 최후의 행사에 대하여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상을 당한 식구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고와 행정상 법적 절차를 밟는 일에 협력하도록 한다. 우선 의사의 사망진단서를 받아야 한다. 사망진단서를 가지고 동사무소에 가면 매장 허가서를 뗄 수 있다. 다 준비되어 있으면 매장허가서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 장례 일정을 논의하는 것이 좋다. 이때 교회법을 따르도록 다짐을 받아야 하고 시신 앞에서 배례나 곡을 하지 않아야 하며, 조객들은 묵도로 예의를 갖추도록 미리 알려두면 좋다.

 

2) 입관예배
입관예배는 고인의 시신을 씻은 후 옷을 입혀서 관에 모시고 드린다. 관에 뚜껑을 덮고 결관하여 관보를 씌우고 드리기도 하고, 관에 뚜껑을 덮지 않고 옆에 두고 드리기도 한다. 입관은 원칙적으로 임종 후 24시간이 지난 후에 한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다시 소생할까 해서 24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앓던 분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별세 후 24시간이 경과되지 않았더라도 유족들의 요구에 따라 서두를 수도 있고 잠시 연장할 수도 있다.

묵도를 마치면 찬송을 부르고 성경봉독을 하고 설교를 하고 기도로 끝낸다. 입관예배를 마치고 나면 발인예배 시간과 장소를 자세히 알리고 폐회한다. 예배 후에 몇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다. 유족이 상을 당해 보지 않았거나 전혀 장지에 관한 일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준비물과 과정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 상주는 입관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상복을 입어야 한다.
* 매장허가서를 받아 놓았는지 확인을 한다.
* 영구차는 준비되었는지 확인을 한다.
* 장지까지 따라갈 교인의 인원을 참고로 알려준다.
* 장지에 갈 음식 장만을 확인한다.

 

3) 발인(출관)예배
불신자들은 발인식을 영결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합당치 않다. 그 말의 의미가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이별이 없음을 생각할 때, 영결식이란 말 대신에 장례식 혹은 발인식, 출관식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발인예배의 집례자는 축도를 마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구차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예배 후 모든 조객들을 좌우로 질서 있게 세우고 집례자가 사진 든 사람의 왼쪽에 서서 팔을 잡고 앞으로 출발한다. 그 뒤에 꽃이 따라고, 상주가 따르고, 유족들이 따르고, 조객들이 따라 나와 영구차에까지 오면 사진은 집례한 목사님이 탈 선두차 앞에 실어 놓는다. 운구한 다음에 집례자는 영구차의 관을 넣는 쪽에 서고 그 옆에 상주와 유족들을 쭉 서게 하고 장지에 함께 갈 조객들은 먼저 차에 타도록 하고 산에 가지 못할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킨다. 집례자는 인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인사가 끝나면 상주들을 지시하여 차에 태운다.

집례자가 상주들이 탄 차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고 내려와서 선두차에 타고 출발하면 그 뒤에 영구차와 조객들의 차가 따르게 된다.

4) 하관예배
영구차가 산에 도착하면 발인식의 행렬과 같은 요령으로 묘지까지 운구한다. 이때 성가대가 있으면 찬송가 543장을 부르는 것이 좋다. 하관예배를 드릴 때에도 집례자는 관머리쪽에 서서 지휘를 하며 관을 내리게 한다. 관이 안장된 다음에 관보, 명정, 횡대를 다 덮고 다시 세 번째 횡대를 열어서 두 번째 횡대 위에 놓고 나서 상주는 집례자의 오른쪽에 서고 조객들은 집례자의 왼쪽에 서게 한다.

찬송은 291장같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을 부르고 설교도 부활에 대한 것이 좋다. 특히 하관예배는 흙으로 된 몸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산 사람끼리 돌아와야 하는 슬픔의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새로운 결심과 부활의 소망을 주는 말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모든 슬픔은 흙속에 묻어 버리고 다시 무덤을 찾아올 때는 기쁜 소식들을 가지고 올 수 있도록 축복기도를 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축도를 하고 하관예배가 마쳐지면 복토(覆土)를 한다. 집례자는 복토 순서를 말해야 한다. “복토 순서는 집례자, 상배자(미망인), 유족, 친척, 교역자, 장로님, 친구의 순서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제일 먼저 집례자가 복토를 한다. 복토를 하는 동안 성도들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복토가 끝나면 집례자는 폐회선언을 한다.

5) 위로예배
산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상주들을 다 모아 놓고 위로예배를 드림으로써 모든 장례절차는 끝나게 된다. 위로예배는 상주들이 가장 허전해 하는 때이므로 더욱 정성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때 교역자는 다른 급한 심방이 있어도 내색하지 말아야 하며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해 끝마쳐야 한다. 이때 상주에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좋다.

 

장례 때의 가장 많은 질문들

1. 임종시 곡을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별세했을 때 슬픔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연스런 감정이 북받쳐 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다만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계속 곡하는 것과 옛날 유교식 장례에서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곡을 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2. 상을 당했다고 알리는 등을 다는 것과 촛불 켜는 것, 향을 사용해도 됩니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상가임을 알리고 등을 다는 것은 문상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말하듯 귀신을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촛불은 어두음을 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향을 피우는 것은 상가의 상징행위로 혹은 분위기나 냄새 제거의 목적으로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3. 위패를 모시거나 지방을 써서 붙여도 됩니까?
이것은 기독교인으로 거부합니다. 유교식 장례법으로 사당이 없는 가정에서 화선지에 ‘누구누구씨 신위’라고 위패를 써서 예식을 가졌었습니다. 지방을 써서 모시는 것도 돌아가신 혼령이 그 자리에 임재한다는 빙의의 신앙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은 조상의 넋을 종이에 써서 붙여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모셔야 합니다. 추모식 때 중심의 상징이 필요한 경우 위패나 지방 대신 아무개 성도의 제 몇 주기 추모제라고 써서 붙이는 것은 괜찮습니다. 

4. 상례시 음식물을 상위에 진설해도 됩니까?
고인의 영정 앞에 음식을 차리는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인이 평소에 잘 드시던 음식을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하여 차려놓는 것을 말릴 필요는 없습니다. 죽은 자는 음식을 차려 놓아도 먹을 수 없습니다. 불필요하게 유가족들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5. 운명한 후 고인의 옷가지를 지붕으로 던지거나 사잣밥을 준비하는 것은?
귀신들이 황천까지 안내한다는 의식의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하늘에 올라가지 귀신이나 사자들이 안내하는 것이 아니기에 필요 없습니다.

6. 수의와 유가족들의 복장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는 이들 가운데도 고급 수의를 고집하는 경우를 봅니다. 몇 백만원, 혹은 유명한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몇 천만원까지 한다니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수의를 미리 마련하면 장수한다는 속설도 믿을 필요 없습니다. 간소한 수의를 마련하는 것은 좋습니다. 꼭 삼베로 만든 수의가 아니어도 평소에 잘 입던 양복 등을 입혀도 됩니다. 유가족들의 경우 집안의 풍습대로 하되 삼체로 만든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자는 흰색, 혹은 검은 색 치마 저고리를 입거나 깨끗한 검은 양장을 입어도 될 것이며, 남자는 검정색 양복에 삼베 상장을 팔에 끼는 것도 무방합니다.

7. 임종시 돌아가는 분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이건 조심해야 합니다. 금방 돌아가실 듯 보여도 나중에 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환자 앞에서는 장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강압적으로 고백을 받아내려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예수님 믿으세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평안하세요” 정도로 말씀드려도 다들 알아듣습니다. 운명시간이 가까워 오면 오히려 가족들보다 환자 분이 마음이 차분하답니다.

8. 비기독교인의 상가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은 괜찮습니까?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조언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할 경우를 위해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종교적인 이유로 거리낌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두어 가지 이유에서 상가에서 음식을 잘 먹지 않습니다. 하나는 유가족을 생각해서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분주하고 슬퍼하는 가족들 앞에서 떠들며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고, 봉사하는 이들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음식을 여러 사람들이 먹다보니 위생적으로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멀리 간 경우, 혹은 가족들과 대화가 필요한 경우에 간단하게 떡이나 차를 마시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 문상을 가서 어떤 말을 상주에게 해야 합니까?
정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로 받으세요. 천국 가셨습니다. 힘내세요. 주안에서 큰 위로 있으시기 바랍니다.” 등으로 말씀드리면 됩니다. 저는 특히 큰 며느님이나 둘째 혹은 셋째나 고인을 모시고 살았던 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노라고 혹은 “고인에게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면 유가족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10. 문상객이 뜸할 때 상주는 휴식을 취해도 됩니까?
본래 예로는 어긋나겠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상주도 쉬어야 합니다. 사람의 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끼리 순번을 정해 쉬고, 혹시 조문하러 갔을 때 내가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조용히 물러 나와야 합니다. 어쩌다 쉬러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와서 불러내면 어찌 쉬겠습니까? 나중에 연락을 드려 그때 갔었는데 뵙지 못했노라고 하면 더욱 감사할 것입니다.

11. 문상 시에 기독교인이 영정 앞에 절을 해도 됩니까?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사드릴 때와 문상 때는 다릅니다. 제사의 죽은 자를 위해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조상을 귀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표하는 방법으로 절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아까 적은 음식문제처럼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절하기보다 고인을 추모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나아보입니다.

12. 상주와는 어떻게 예를 표해야 하나요? 절을 합니까? 일어서서 인사합니까?
입식인 경우, 가정에서 장례를 치를 때 절을 합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도 무방합니다. 저는 절하기보다 허리를 굽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조문객이 적은 가정은 문제가 아니지만 수천 명, 혹은 수백 명이 찾아오는데 절을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 상주들이 힘들어 견딜 수 없습니다. 상주가 엎드리면 나도 엎드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서서 절을 해도 무례가 아닙니다.

 

13. 입관 때 반함을 하거나 고인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잘라 넣어도 됩니까?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배격합니다.

14. 추모예배는 장자의 집에서만 드리나요?
옛날 농경사회에서 제사를 드릴 때 장자가 무언가 있어야 제삿밥이라도 먹는다 생각해서 장자에게 유산을 물려주어 제사도 장자가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바뀌어 딸들도 유산을 상속하게 됩니다. 추모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고인을 추모하고, 가족끼리 화목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나 셋째, 혹은 따님의 가정에서 추모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15. 화장을 해도 됩니까?
아직도 몇몇 교회에서는 매장만을 고집하고 가르칩니다만 현재 우리나라 국토는 좁은데 매장만 고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못되어 육신은 먼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먼저 화장의 풍습을 권장해야 합니다. 화장 후 유골을 부수어 강가에 뿌리거나 산기슭에 뿌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자여보호에 맞지 않고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보다는 평소에 잘 가는 기도원이나 교회 앞마당에 뿌리는 것이 의미 있고, 요즘엔 납골당이 잘 되어 있어서 화장을 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습니다.

16. 이장을 할 경우 몇 년째에 합니까?
보통 20년이 지난 후 합니다. 그래야 완전히 육탈되어 백골만 남아 이장하기 좋습니다. 만약 부득한 경우에 이장할 때는 마음이 약한 이나 여성들은 피하고, 대표가 산 일 하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이장하는 것이 좋습니다.

 

17. 매장 시 지방에 따라 시신만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지방에 따라 매장할 때 관에서 유해를 꺼내 따로 매장하는 탈골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풍습에 따르면 되고, 그 때문에 논란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대신 간소하게 목관을 사서 써야 경제적입니다.

18. 고인이 사용하던 성경을 관에 넣어도 됩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 이장할 때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시신 손가락 유골이 성경책을 파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성경 등은 후손이 잘 보존하면서 신앙 유산으로 남기면 좋습니다.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며, 천국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 예배하므로 성경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19. 묘 앞에 세우는 비석에는 무슨 말을 적어 넣을까요?
아무개 성도, 아무개 집사, 권사, 장로 등으로 쓰되 비석은 간단하고 검소하게 합니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세우면 됩니다. 크다고 자랑할 일도 부러워할 것도 아니고 적다고 부끄럽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비석에 아들 이름만 새기거나 아들, 딸, 사위, 후손의 이름을 새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인이 살아 생전의 가족들의 이름은 손자들까지 놓으면 나중에 아이들과 고인과의 연결고리가 되므로 좋습니다. 고인의 이름 생년월일, 간단한 성구들을 넣으실 수 있으면 그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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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성탄절 주일예배 설교 Christmas Sunday worship preaching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잉태된 예수
말씀 :마1:18-25절
찬송 :  109.115.123장

구약성경을 보면 임신할 수 없었던 여자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으로 기적같이 임신을 해서 해산한 경우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이삭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 아브라함과 사라는 임신 불가능의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을 때 그들은 믿지 못하고 웃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그리고는 이름까지"이삭"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삼손입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한 여자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삿13:3)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실 인으로서 특별히 포도주와 독주를 못 마시게 하고 부정한 것을 먹지 못 하도록 주의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사람이 그 유명한 삼손입니다.

세 번째 경우는 사무엘입니다. 임신할 수 없었던 엘가나의 처 한나가 금식하며 하나님께 나와서 자기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서러움과 고통을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어 임신을 하게 됩니다.(삼상1:19),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사무엘을 낳게 됩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 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43:1), 임신할 수 없는 한 여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임신한 이 사실은 우리의 구원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네 번째 경우는 세례요한입니다. 어느 날 천사가 제사드리는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네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눅1:13-17절), 그때 사가랴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믿음 없는 사가랴에게 하나님은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런 후 열달 후에 세례요한 은 태어났고, 사가랴는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1.불가능일 수 없는 탄생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습니다. 그 불가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 유대인 600백만 명이 나치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하나님, 당신은 살아 계십니까? 살아 계시면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나치가 600만 유대인을 죽이는 것을 못 보신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400년의 세월을 고통으로 짊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를 하나님이 모르신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 그대로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일 뿐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고 성령에 의한 잉태는 2000년 동안 무신론자들과 불신자들과 이단들에 의해서 무수히 공격 받아왔던 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얼마 전에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이라든지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불제자였던 예수" 등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 때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한가지는 그 책들의 지은이나 옮긴이도 그책의 내용을 확신할 수 없는, 그래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알아서 평가하라는 식입니다.

그런 책들은 이미 외국에서는 낡은 휴지조각처럼 되어버린 책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에서는 처음 듣는 소식처럼 소개되었던 것이, 모두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그 생애에 대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함께 성령의 잉태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그처럼 중요한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성령잉태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었다면, 인간이 태어나는 그 여러 가지 필수과정을 통해서 태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시오,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동정녀를 통해서 탄생해야만 하고 성령의 잉태해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상적인 처녀 총각이 결혼하여 태어나면 역시 아담의 죄를 이어받기 때문에 죄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동정녀의 태를 빌려 태어났습니다. 죄 없으신 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바이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믿지 못하고 예수를 위대한 성자요, 스승이요, 인류역사상 최고의 인간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마태는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인간적 기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누가는 여기에서 조금 더 소급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넘어서서 아담까지 언급합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1장3절이하에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니라"고 인간적 기원과 신적 기원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인간이 다시 부활한 일이 역사상 있습니까? 물론 성경에서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은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오직 한번 있었습니다.

예수는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역사 이전이나 이후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예수는 분명히 인간의 기원속에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분이지만, 그분의 탄생은 또한 영적이고 신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탄생은 동정녀에게서 이루어져야 하며 성령으로 잉태되어야만 합니다.

3.요셉의 의로운 행동입니다. 마1: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유대 결혼예식에는 세 가지 과정을 치릅니다. 첫 번째는=약혼의 과정, 두 번째는=정혼의 과정, 세 번째는=결혼의 과정, 약혼은 본인이 어렸을 때 부모끼리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결혼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본인 의 애정만으로 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미리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이 약혼은 법적 효력을 갖지 않습니다. 그 다음의 과정인 정혼은 본인의 승낙과 함께 부모의 승낙이 동시에 되어지는 과정으로, 이것은 결혼과 똑 같은 법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정혼 때는 파혼을 하지 못합니다. 정혼을 하면 결혼과 같이 구약율법의 제한을 받게 됩니다. 세 번째 과정인 결혼은 정혼 기간이 끝날 때 이 정혼의 결과로서 하는 예식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는 정혼한 사이입니다. 정혼했을 때 마리아가 갑자기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저촉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22:21-24절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 1:19절에 이때 요셉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법으로 말하면 돌로 쳐죽일 수밖에 없는 또 죽일 수 있는 그런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요셉은 "가만히"끊고자 합니다. 본문에 보면 적절한 시기에 천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절),

깊은 회의와 갈등 속에 빠져 있는 요셉에게 이 음성이 둘린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했으면 어떨까요? 임신하기 전에 "요셉아 이제 곧 네 아내가 임신할텐데 그랬더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일러주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다면 얼마나 간단해요. 그러나 이야기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셔요.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도 미리 양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셨으면 얼마나 갈등이 없었을까요?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한 두 번쯤 돌면 구름이 끼고 다섯 번쯤 돌면 우르릉 폭풍소리가 나고 그래야 신나게 예수 믿을 거 아닙니까?

여섯 바퀴를 돌 때까지 아무 기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에 따른 행동을 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셔요, 아브라함과 룻과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그때까지 하나님이 안 나타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롯이 택하여 떠나고 아브라함이 허허 벌판에서 홀로 섰을 때 그제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이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예수님이 부르짖고 죽으시고 무덤에 갇혔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부활로 자기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은 정확한 때에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그때"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당장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가산이 탕진되고, 집이 무너지고, 자식이 병들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나중에는 돌이켜 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4.성령으로 잉태와 동정녀 탄생의 이유입니다. 만일 남자로 인하여 예수가 잉태되었다면 그분도 역시 죄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훌륭해도 죄인이요, 석가모니가 아무리 훌륭해도 죄인이요, 공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난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더니"(롬3:23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죄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는"분이시라고(벧전2:22-2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는 말은 삼위일체 적으로 보면 하나님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에 성육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예수가 하는 모든 일을 못 믿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이 물위로 걸었다든지 폭풍을 잠잠케 했다든지 하는 이런 일을 못 믿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신데, 성령의 잉태와 함께 또 하나 생각할 문제는 마리아가 동정녀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순수하지 못한 그릇에 순수한 것을 넣으면 더러워질 뿐입니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기 위해서 깨끗한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동정 성입니다.

성경전체를 볼 때 사실 마리아는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순결한 여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너무 마리아를 우상화했기 때문에 그 고상함을 개신교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불행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마리아는 귀한 여자입니다. 여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이브형의 여자입니다. 죄의식으로 고민하는 유형입니다. 들째로=비너스형의 여자인데 성적인 갈등으로 고민하는 유형입니다. 셋째로=마리아형의 여자로, 이 유형은 하늘의 신비를 잉태하고 오해와 고난 속에서도 침묵하며 순종하며 순결을 지키는 여자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최대 관심은 사실 죄에 있습니다. 이 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죄인이 아니기 위해서는 동정녀로 탄생해야 합니다.

5."임마누엘"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야말로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절), 천사가 "성령으로 동정녀에 잉태된 분이 예수라고 하는데 이분이 친히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4:12절에 보면"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직접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으로 동정녀을 통해 탄생된 예수라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구약의 응답인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마1:22절), 그리고 이사야7:14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절),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임"은=함께, 마누는=우리, 그리고 엘은=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홀로가 아님을 아십시오. 부모가 없는 사람, 자식이 없는 사람, 남편이 없는 사람, 아내가 없는 사람에게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담대히 부탁합니다. 외로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볼 것이요, 믿음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볼뿐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요셉이 잠이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24-25절), 결론은 요셉의 순종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순종을 통해서 예수 는 여러분의 임마누엘의 주님이 되십니다. 순종을 통해서 여러분의 구원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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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대강절 네째 주일 예배설교

 

 

 

 

마 2:9-10절. (12월 세째주)

 

  오늘은 대강절 마지막 날입니다. 첫번째 촛불은 "이웃을 도와주며 성탄을 기다리자"  두 번째 촛불은 "전도하면서 성탄을 기다리자" 세 번째 촛불은 "서로 용서하면서 성탄을 기다리자" 였습니다. 오늘 네번째 촛불은 "기쁨으로 성탄절을 기다리자"입니다.


  이제 네 번째 불을 켜겠습니다. (촛불에 점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 옛날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가 70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몇년이라고 했습니까?. 네 맞습니다. 70년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때 저들이 갖고 간 구약 성경이 바벨론에 전해지면서 메시야에 대하여 연구하던 박사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별을 연구하다가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 임금님이 탄생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박사님들은 귀한 예물을 준비하여 가지고 별을 따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머나 먼 여행길을 따라 낙타를 타고 별이 인도하는 대로 사막을 지나 가나안 땅 유대 나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박사들은 유대 나라의 서울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가서 헤롯 왕을 만나서 물어 보았습니다. "유대 나라에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 옵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깜짝 놀랐습니다. 왕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도 놀라 소동이 벌어졌답니다.  그리하여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성경 학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왕으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학자들이 연구하여 구약의 미가란 성경책에 기록된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왕께 아뢰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렘이옵니다.

 

  성경 미가서에 기록되기를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해롯 왕은 나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어 보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에게 경배하고 그 아기에 대하여서도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왕에게 보고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해롯 왕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는 나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궁궐에서 나오자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나타나서 박사님들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별이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더니 그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이를 보고 박사님들은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아기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하고, 준비한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박사님들은 거기서 며칠을 유하는 동안 꿈에 하나님께서 "헤롯 왕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하심을 받고 다른 길로 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머나먼 나라에서 찾아와 기쁨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가장 기뻐한 것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금년 2018년도 성탄절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합니다.


  그 날은 맛있고 좋은 음식도 장만하고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고 가장 기쁘고 기쁜 날로 즐겁게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끼리 즐기는 잔치가 되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서 함께 나누며 즐기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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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대강절 세째 주일 예배설교

 

 

  

성탄절을 기다리는 마음  (대강절 세째주)

성경말씀 : 마 6:14-15절. 


  대강절 셋째 주일 입니다. 세번째 초를 켜겠습니다. (촛불에 점화) 세번째 촛불의 의미는 "서로 용서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입니다. 첫번 촛불은 "이웃을 도우면서", 두번 째 촛불은 "전도하면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시어 오신 목적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지난 해 동안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일을 용서하면서 금년 성탄절을 맞이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마을을 가셨을 때 였습니다. 이 마을에는 세리장이요 또 부자인 삭개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동네 사람들은 삭개오가 유대 사람으로서 백성들의 세금을 거두어 로마 나라에 갖다 바치는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였 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항상 자기 나라 백성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면서 생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으니 예수님께서 이 곳 여리고 동네로 오신다는 것이지 뭡니까?


  삭개오는 예수님만 만나서 자기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용서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동구 밖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도 같이 따라 나섰습니다.


  저 멀리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지지 뭡니까?. 그것은 키가 작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뵈올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오시는 길가에 큰 뽕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그 뽕나무에 미리 올라가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이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이 조금은 창피스러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뵈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시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지나쳐 가시지 않으시고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 쪽으로 다가 오시더니 삭개오를 쳐다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 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다니 이는 정말 뜻밖에 일이 었습니다.

 

  삭개오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를......"주님이 죄인의 집 손님이 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삭개오가 잘 못하고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잘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의 잘못을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제 소유 절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제가 누구에게서 무엇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받고 회개할 뿐아니라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실 것이요. 만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금년 2018년도 성탄절에는 그 동안 서로 싸우거나 어떤 일로 인해서 서로 말하지 않았던 이웃 친구들과 다른 구역 식구들을 모두 서로 용서하면서 성탄을 맞이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입술로만 용서하지 말고 진심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이웃의 과실을 용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여러분의 교회 주위의 주민들과 함께 기쁨으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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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절기설교 대강절 설교 (오실 그분을 사모하라 )

 

 


제목 :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말씀 : 마11:2-6

1.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기대속에 살아갑니다. 기대가 없는 인생은 허탈과 좌절에 빠져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가을에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누가 힘들여 농사를 짓겠습니까?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어떻게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겠습니까?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하면 월급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없으면 누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기대를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열심히 살아갈 때에 삶에 활력과 의욕이 넘치게 되고, 또 그렇게 의욕을 가지고 활기차게 살아가면 그 기대도 좋은 모습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대를 가지고 의욕적으로 활기차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그래야 합니다. 혹시 세상에서는 별로 기대할 게 없다해도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가 있지 않습니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기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이같이 가슴 설레이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벧후3:1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나님의 날, 주님의 날, 예수님의 날을 사모하며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은혜와 기쁨과 감격과 기대속에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대를 가지고 사십시오. 세상에서도 긍정적이고 좋은 일을 생각하며 기대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메시야에 대한 기대, 천국에 대한 기대속에서 그날을 준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찬송도 좀 활기차게 하고, 말씀을 들을 때도 아멘아멘하면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가장 큰 기대와 소망속에 사는 사람답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기대도 기대 나름입니다. 확실한 기대, 우리가 원하는 진정으로 좋은 것을 분명히 가져다 줄 기대를 가져야 우리가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복권만 기대하고 사는 인생, 노름판에서 대박을 기대하면 사는 인생, 사기나 투기꾼이 되어 한탕을 기대하고 사는 인생에게 주어질 것은 허무와 절망과 고통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설령 그런 미련한 기대는 아니더라도 그저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에 대한 기대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기대는 결코 세상사는 동안도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고통만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대를 갖되 확실히 은혜와 기쁨을 줄 수 있는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영원히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기대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거야 말하나마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만이 우리 인생의 기대를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속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었던 만큼 메시야에 대하여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메시야에 대한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마3:10-12절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즉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것처럼 메시야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세상을 심판하여 알곡은 곡간에 모으고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그는 메시아가 속히 오셔서 지상천국을 건설해 주실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왜 그렇게 메시야에 대한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그 당시 사회상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모든 영역에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아래서 백성들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도자들도 부패하여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백성들을 무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추한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야인(野人)으로 생활하면서 메시아가 하루속히 오셔서 그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 정도면 물질적으로 풍요롭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에게 억압당하는 것도 아니고 착취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별다른 문제없이 사회는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이 사회는 지금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시대입니다. 향락의 문화가 이 사회를 썩게 만들고 있습니다. 개인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가정이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되어 있습니다. 성적순결함이 더 이상 고상한 가치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거짓이 진리인양 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이나 진리나 이런 것들보다는 그저 육체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일에 더 관심이 많고, 그래서 세상의 빛이나 소금이 되지 못하므로 세상 사람들에게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은 제아무리 물질 문명이 발달해도 안됩니다. 제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안됩니다. 제아무리 교육수준이 높아져도 안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심령이 새롭게 될 때,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될 때만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의 우리의 기대는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37:9에서는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추구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끊어질 것이고 오직 주님을 기대하며 그 안에서 행하는 자는 영원한 기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희망은 과학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권력도 아닙니다. 철학도 아닙니다. 인류의 진정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돈이나 명예나 출세나 일확천금이나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기대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 속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진정한 생명과 평안과 위로에 대한 기대속에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더욱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례요한이 이렇게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늘 우리는 그에게서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은 메시야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기다리는 메시아와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실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분을 위해 온전히 준비했더라면 그는 결단코 실망할 일이 없었을 터인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메시야가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지금 그는 실망하고 답답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 2,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오시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악의 세력들은 물러가고 정의사회가 구현될 줄 알았습니다. 로마의 세력을 물리쳐주시고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 핍박받고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기쁨의 날이 올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오셨는데도 세상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악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당하기는커녕 도리어 저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당신께서 정말 메시야이십니까? 아니면 앞으로 다른 메시아가 올 것입니까? 저는 어떻게해야 합니까, 이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정말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와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다름으로 인하여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강력한 능력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해 주실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실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그런 기대에 전혀 못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죄와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데는 관심이 없고 고작 해야 죽은 사람 좀 살리고 병을 고쳐주고 천국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웬만한 선지자들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정말 메시아인가, 이분을 계속 따라야 되나,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되나 하면서 갈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한마디로 세례요한의 왜곡된 메시아관입니다. 그는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긴 했지만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낙심하고 절망하고 회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슨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올바른 메시아 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메시아관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저 내 생각대로, 내 욕구대로 잘먹고 잘살며 평안하게 해 주실 그런 내 입맛에 맛는 메시아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보여주신 메시야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말씀대로 믿어야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이시오, 그것만이 진정으로 구원받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는 어느 날 예수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만류하며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그러니까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이 돌아가시면 지상천국은 언제 이루구요? 안됩니다. 결코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런 말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너는 사람의 생각대로 나를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내가 이 땅에 온 의미를 설명해 주었건만 너는 네 생각대로 나를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라 마귀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에 의하여 각색되어진 메시야가 아닌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시야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길 바랍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충족시켜주는 메시야, 그저 마음 편하게 잘먹고 잘살게 해 주실 메시야, 내 입맛과 내 기호를 맞추어 줄 메시야가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을 살리는,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실 그 진정한 메시야를 만나고 그분의 은총을 기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죄와 사망과 어둠과 절망을 깨트리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그런 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정말 진정한 생명의 메시야를 만나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가 있습니까? 그 전제조건은 한마디로 자기 부인입니다. 진정한 메시야를 만나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전제조건은 바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앞서 말씀드렸던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다시한번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질문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야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이분이 정말 메시아인지 아닌지 갈등이 생겨서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네가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가 와서 당장 악의 세력들을 제거하고 지상 천국을 건설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마는 나는 그걸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든 자, 저는 자, 소경된 자들에게 치유하러 왔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의 영육을 살리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생명과 만족과 기쁨과 희망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네가 생각하고 네가 원하는 메시아만을 생각하며 고민하지 말고 회의를 품지말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메시아, 하나님이 계획하신 메시아를 인정하고 따르면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답변을 들은 세례 요한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 맞아, 분명 이분에게 세례를 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그가 메시야인줄 알라고 하셨지. 그런데 분명 이분에게 세례를 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지 않았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소리가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분이 메시야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왜 나는 이분이 하는 일들을 통하여 이분이 메시야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가, 어찌하여 이분이 하는 일들을 보면서 낙심하고 있는가? 이유는 하나다. 내가 메시아에 대하여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와 내가 생각하는 메시아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거야.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메시아와 내가 생각하는 메시아가 다르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게야. 그러면서 비로소 모든 의문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정말 내가 가는 길이 맞는가? 정말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신가? 그분이 나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 있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 정말 하나님은 계신가?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이런 고민이 있으신 분이 있습니까?

만약 이런 의문이 남아 있다면 문제는 전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둠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지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성의 한계이고, 지성의 한계이고, 경험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어둠과 의문을 사라지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자기를 부인하면 마침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우물속을 벗어나면 마침내 드넓은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캄캄한 동굴속을 벗어나면 마침내 찬란한 빛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한사코 우물속에 갇혀서, 동굴 속에 갇혀서 세상은 좁다고, 세상은 어둡다고, 세상은 어차피 이런 것이라고 여기서 살다 죽으면 띁이라고 여기며 동굴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그 찬란한 빛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기대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기대를 갖되 허황되고 허무한 기대가 아니라 올바른 기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장 확실하고 올바른 기대인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속에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께 대한 기대를 갖되 내가 각색한 기대가 아닌 주님이 알려주신 주님의 모습을 바르게 알고 그 주님이 주시는 은총을 기대하며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자신의 무지와 죄를 알고 다만 그분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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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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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찬양단헌신예배 / 찬양의 능력

 

 

 

제목 : 찬양의 능력

말씀 : 행16:19-32

 

노래는 사람들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노래는 영혼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때로는 흥겨움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힘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위안과 평안을 주고, 때로는 우리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통하여 자신들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승화시켜나갑니다. 반대로 실연을 당한 사람들은 이별의 노래를 들으면서 더욱 애절하게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됩니다.

운동권 학생들은 거리에서 어깨를 동무를 하고 혁명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투지를 북돋웁니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할 때는 노동가를 부르면서 단결을 도모하고 투지를 불사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노래는 그 사람의 삶의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노래를 좋아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관심사와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학생들은 어떻습니까? 여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맞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믿음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의 관심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서는 그 믿음의 노래는 우리를 더욱 믿음의 반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찬양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어제도 인도하셨고, 오늘도 인도하시는 은혜를 찬양하고,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을 찬양하고, 오늘도 우리를 찾아 오셔서 위로하시고 은혜 주심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찬송은 곧 믿음입니다. 찬양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찬양은 감사요, 감격이요,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찬양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은혜요, 찬양을 통해서 기쁨과 위로와 은혜를 받으니 더욱 은혜인 것입니다. 찬송 부를 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향하며, 찬송 부를 때 우리의 마음 문이 열리며, 찬송 부를 때 믿음이 성장하고, 찬송 부를 때 기도문이 열리고, 찬송 부를 때 하늘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 부를 때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기뻐하십니다. 오죽 하면 우리를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사 43:21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이들은 빌립보에 와서 또 큰 어려움을 겪에 됩니다.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 주었는데 그 주인이 자기 수입이 줄어들자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주인이 그 지역에서는 행세꽤나 하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붙잡혀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옷을 벗기고 매로쳤습니다. 그리고는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들의 몸은 착고에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밤중쯤 되었을 때 그 감옥속에서 노래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이들이 밤중이나 되어서 노래를 한 것은 아마도 너무나 심한 매질 때문에 그제서야 어느 정도 정신이 들어서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그 극한 상황속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매맞은 자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멍이 들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내일 어떻게 될지, 과연 살아날수나 있을지 등등의 고통과 아픔과 불안과 근심의 그 순간이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올만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후회가 될 만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차라리 예수를 몰랐더라면, 차라리 믿지 말았더라면, 공연히 예수 만나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하나, 예수 안 믿었으면 그래도 내가 이 나라의 최고학부를 나온 사람인데.. 나도 잘먹고 대접받고 으시대며 목에 힘주고 살 수 있었을 터인데... 나는 왜 예수 믿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맨날 얻어 터지고, 두드려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하고, 강도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는 그러한 원망과 불평대신 찬송소리가 나왔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그 절망적이고 암담한 상황속에서 찬송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결과는 이미 여러분이 다 잘 알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찬양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무언가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땅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진이 나서 땅 전체가 흔들렸는지 아니면 그 감옥 건물만 세차게 흔들렸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두가지 다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옥터가 움직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흔들린다고 감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질리는 없으므로 지진과 동시에 감옥 건물을 하나님께서 세차게 흔들어 버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찬양했을 때 감옥문이 열렸습니다.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 간줄 알고 자살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이 그들 말렸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다 여기 있으니 염려 말아라 하면서 도리어 그를 위로하며 안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선생님이여, 어떻게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어떻게하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간수는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을 모두 데려와 세례를 받게 되고 그러자 그 가정에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찬송해야 합니다. 언제 어느 때고 찬송해야 합니다. 기쁠 때 은혜가 넘칠 때 특별한 감사의 조건이 있을때만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어렵고 힘들 때 찬송하기 바랍니다. 외롭고 쓸쓸할 때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될 때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살이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 고민과 절망감과 괴로움이 몰려 올 때 그때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 내 뜻 대로 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그때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으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5, 28)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나 몰라라하지 않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십니다. 비록 지금의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기쁘나 슬프나, 즐거우나 괴로우나, 형통할때나 앞이 캄캄할때나, 절망적이거나 희망적이거나, 돈이 있으나 없으나, 사업이 잘되나 그렇지 못하나 여러분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즐거울 때 찬양하면 여러분의 즐거움을 배가 될 것입니다. 형통할 때 찬양하면 더욱 큰 형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절망적일 때 찬양한다면 절망은 곧 희망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괴로울 때 찬양하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즐거운 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가난할 때 찬양하는 사람에게 가난이 곧 물러가고 부유함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할 때 괴로움과 절망과 슬픔과 가난과 고통은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 기쁨과 은혜와 희망과 감격과 부유함을 더 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예그랑 찬양단 헌신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찬양단은 이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양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양은 곧 복음이요, 은혜요, 능력이요, 소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여 큰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여러분 자신에게와 온 성도들에게는 큰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하며 동시에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게하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찬양은 세상을 향하여는 우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더욱 힘찬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엄청난 특권과 사명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정열적으로 찬양하는 아름다운 찬양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은 우리 예그랑 찬양단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원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잘 협조하는 방법은 여러분이 찬양단의 찬양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제발 부탁인데 오후1시 30분 되면 와서 함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못 받았으면 은혜를 받기 위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감사해서 기뻐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감사와 감격으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소원을 이루지 못한 분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하나님을 감격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만 감동시킬수만 있다면 문제는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감동시킨다면 우리의 모든 환경과 상황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의 사슬은 끊어지고,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절망도 미움도 원망도 두려움도 가난도 원통함도 사라집니다.

아무쪼록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찬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승리를 여러분의 것으로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 예그랑찬양단들, 다시한번 찬양의 능력과 소중함을 생각하며 정열을 다하여 찬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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