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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이기는 삶 / 마태복음 625- 34

마태복음 936절을 보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는 믿지 않고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구경하기 위해서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무리들이라고 하시며 이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기진하다라는 말을 사전을 찾아보면 극도로 쇠약해지다, 기력이 다하여 힘이 없어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는 다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목자로 신뢰하지 못하여 인생을 맡기지 못하고 돈 때문에, 건강 때문에, 사업 때문에, 사람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사람을 우리 주님은 목자 없는 양으로 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보시며 우리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를 영어로 ‘Com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함께라는 의미의 ‘Com’느끼다.’는 의미의 ‘passion’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로 함께 느낀다.’ 혹은 함께 고통스러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예수님께서 양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양의 방황을 자신의 방황으로 함께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양의 눈물을 자신의 눈물로 함께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키울 때 자녀가 중요한 시험을 준비한다든가, 또는 진학에 실패했다든가, 사춘기 방황을 하면서 힘들어 한다든가 하면 그런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함께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이것을 ‘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를 목자로 신뢰하지 못하여 마치 목자가 없는 것처럼 양들이 방황하면, 양들이 두려워하면, 양들이 슬퍼하면, 양들이 좌절하면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아파하신다는 것을 여기서 한 단어로 불쌍히 여기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염려가 충만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당장 제 자신만 보더라도 큰 걱정거리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북부에 있는 로키산맥공원의 높은 봉우리 중 하나인 높이 4,348m롱의 봉우리라는 곳에는 지금 현재 400살이 넘는 거목이 하나 쓰러져 있다고 합니다.

이 거목은 지난 400년 동안 자라면서 벼락을 14번이나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던 나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에도 꿋꿋이 버텨온 나무라고 합니다.

그런 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원인을 살펴보니까 언제부터인지 조그마한 딱정벌레들이 이 나무에 기어 들어가 나무의 속을 갉아먹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 나무는 그 조그마한 딱정벌레들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안에서부터 병들고 썩게 만드는 대표적인 원인을 성경은 염려라고 합니다.

염려를 영어로 ‘worry’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물어뜯다.’, ‘목 졸라 질식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임팔라 같은 초식동물을 잡을 때 보면 목을 물어서 질식시킵니다.

염려가 이렇게 우리를 질식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려를 많이 하면 숨을 쉬어도 마치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그 중에 7절을 보니까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뜻을 물어보니까 예수님께서 18절로 19절에서 그 말씀의 뜻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여기서 말하는 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가시떨기라고 하는 염려가 함께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염려가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기운을 막아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질식시키고 마비시켜 버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염려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마귀의 공격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때로는 핍박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고난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유혹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들이라고 우리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공격이라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의 삶을 가장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염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몽둥이로 맞으면 겉으로 표시가 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상처가 심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질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숨을 못 쉬는 것입니다.

이 질식은 겉으로 아무런 표시가 없기 때문에 죽어야만 압니다.

그렇지만 몽둥이로 한 대 맞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질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마귀는 염려로 사람들을 질식시켜서 우울증에 걸리게도 하고 공황장애가 오게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염려는 가장 조용한 암살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염려에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염려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계십니다.

방금 읽었던 이 짧은 본문 가운데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와 여러분 중에 염려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으니까 염려하는 것이지 염려하는 것이 좋아서, 염려하는 것이 취미라서, 염려하고 싶어서 염려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염려하고 싶지도 않고,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도 왜 염려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대답하기를 염려는 하나의 뚜렷한 실체요, 하나의 강력한 힘이요,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가 하나의 힘이요 세력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왜 염려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염려는 마치 우리가 전에 살펴본 천로역정에 나오는 의심의 성에서 사는 절망거인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가진 뚜렷한 실체요, 하나의 강력한 힘이요,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마음을 쪼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쪼개진 마음을 야고보서 16절로 8절을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여기 보면 쪼개진 마음두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렇게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을 또한 의심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염려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이 갈라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본문 23절을 보면 갈라지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여기서 눈이 나쁘면이라는 말씀의 원문을 보면 초점이 여러 개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분이 여기 서 있는 저하고 저쪽 끝에 있는 신디를 동시에 한 번 보세요.

 

하나라도 잘 보입니까?

 

눈이 사시(斜視)가 되어서 하나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가 바로 눈이 나쁜 상태’, 다시 말해서 초점이 여러 개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마음의 초점이 여러 개로 나누어지면 그것이 염려의 원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염려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내 힘만으로는 이 염려를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맞아! 이제부터는 염려하지 말고 살아야지그런다고 염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염려의 문제, 이 걱정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살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 나오는 내용이 원인이 되고 뒤에 나오는 내용이 결과가 될 때 사용됩니다.

 

그러면 앞에 나오는 본문 24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즉 우리는 돈의 신인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25절에서 그러므로라고 하고는 결과를 설명합니다.

 

즉 우리는 돈의 신인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너희 앞에 있는 그 물질의 신 맘몬과 여호와 하나님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겨야만 한다. 만약에 지금처럼 하나님과 맘몬 신을 겸하여 네 삶의 주인으로 선택한다면 너희는 평생 염려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가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데는 근거가 있습니다.

 

본문 30절 뒷부분을 보면 염려가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제가 생각하기에는 염려가 많은 것은 소심한 성격 때문인 것 같은데, 마음이 약하고 여려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 소심한 자들아!” 또는 이 마음이 약하고 여린 자들아!”라고 책망하셔야 맞는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적을 때 염려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염려의 문제를 믿음의 문제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돈의 신인 맘몬을 선택할 때 생기는 것이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염려로부터 100%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100% 염려로부터 자유 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매 순간 순간마다 환경에 짓눌리고, 염려가 나를 찾아올 때 그것들을 그대로 방치해 놓고 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염려가 생길 때 이 염려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방법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염려를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죽어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구원의 확신을 말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재물의 신인 맘몬 신을 더 따르고 섬길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 염려라는 감정이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때 생기는 것이라면 이 염려라는 무서운 실체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물질에 빼앗겼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31절로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다 보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기의 능력, 자기의 경험, 자기의 힘, 자기의 주먹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우리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려움이 찾아오고, 위기가 찾아올 때 이 모든 것들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항상 불안합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하지만, 겉으로는 큰소리치지만, 겉으로는 웃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늘 환경에 짓눌려 사는 게 이방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힘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사는 사람인 우리의 삶의 태도가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과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5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여기서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는 말씀을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because he cares for you.”

 

여기 보면 ‘care’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마치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아기 엄마가 온 정성을 다하여 돌보는 것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고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돌보고, 우리를 ‘care’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과 똑같이 염려할 수가 있느냐고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 없는 고아 아이가 내일은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무엇을 입을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그 아이 옆에서 여러분의 자녀가 나도 내일 뭘 먹을 수 있을까? 내일 입을 옷이 있을까?” 그러고 똑같이 고민하고 있다면 그 모습을 보는 부모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답답하고, 화나지 않겠습니까?

 

염려하고 있는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염려의 반대말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에게 이런 자존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까짓 것 물질 좀 없다고, 그 까짓 것 환경 좀 어려워졌다고, 그 까짓 것 몸이 좀 아프다고, 그 까짓 것 사람이 나를 좀 떠났다고 자기 자신을 너무 초라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안다면 우리가 이런 하찮은 것 가지고 평가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본문 28절로 3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가지는 긍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그다지 잘생긴 것도 아니고, 내가 유능한 것도 아니고, 내가 남보다 성격이 탁월하게 좋은 것도 아니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꾸 여러분의 미래가 걱정스럽고 불안하십니까?

 

그러면 로마서 832절을 외우시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셨는데 그 까짓 것 내게 필요하다면 뭔들 안 주시겠나?’

 

이런 믿음과 배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평안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끊임없는 돌보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신뢰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눈동자같이 돌보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는 삶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지 않는 삶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사는 사람은 평안하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만 놓고 방치하셨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고단하고 불안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본문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내가 이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할 때 나를 짓누르는 염려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배우자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천박한 배우자를 만나면 내 생각의 중심이 그 천박한 배우자를 닮아갑니다.

 

아주 고상한 배우자를 만나면 내 생각의 중심이 그 고상한 배우자를 닮아갑니다.

 

믿음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내 믿음도 믿음이 좋은 배우자를 닮아 좋아집니다.

 

믿음이 없는 배우자를 만나면 내 믿음도 믿음이 없는 배우자를 닮아 잃어버립니다.

 

하물며 내가 세상과 짝하여 살아간다면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였고, 전에는 세상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다면 하나님의 영향을 받고 난 후에는 나의 시선과 나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현재 나의 신앙의 중심축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신앙의 중심축이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신뢰하며 사는 사람은 이렇게 찬송하는 삶을 삽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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