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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죽은 후에는....

 

 

 
무소유자도 소유자도 죽은 후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의 형체에게 생명의 호흡인 영을 불어 넣으셨을 때 인간은 흙도 어떤 영도 아닌 새로운 존재인 살아있는 혼(a living soul)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호흡”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그 원재료인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게 된다.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해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이 말씀대로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구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려올라간 에녹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 죽지 않고 변화되어 휴거될 사람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할 뿐 그 누구도 한번 태어나면 결국은 한번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히 9:27).

 
며칠 전 절에서 일평생 대부분을 중으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한 사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함과 함께 한없이 높이며 그의 삶을 칭송하고 있는데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언론들은 그가 평생을 소박하고 청렴결백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격찬해마지 않는다.

“평생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했던 법정 스님이 오늘(11일) 입적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종교를 초월해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 폐암으로 투병해 오던 법정 스님이 오늘 오후 2시 입적했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며 54년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지난 1975년부터 전남 송광사 불일암에서 17년 동안 홀로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자신이 지은 길상사로 옮겨진 직후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것이 언론이 늘어놓은 찬사와 그의 발자취의 일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모두 다 옳고 심오한 뜻이라도 있는 것처럼 관심을 두고 그 말을 되씹으면서 그의 삶을 본받으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들을 모아 놓은 “어록”에 담긴 내용을 보면 보편적인 상식선에서의 진리는 될지언정 역시 성경의 절대 진리와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다. 그는 무소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

 
이 말이 왜 그처럼 대단한 말이란 말인가? 누구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살면서 느끼는 상식적인 얘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무소유라는 말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써먹고 있을 뿐이지만, 성경은 무소유랍시고 결혼을 금하여 가족도 없고, 모든 물질을 소유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되어 풍성하게 가지게 될 것이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되리라. 너희는 그 쓸모없는 종을 바깥 흑암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마 25:29,30).
 

다만 물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주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설령 네가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며 설령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육신에 고통이 있게 되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것같이 하며 또 우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 것같이 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것같이 하며 또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소유하지 않은 것같이 하라. 그리고 이 세상을 이용하는 자들은 다 이용하지 못할 것처럼 하라. 이는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 감이라』(고전 7:28~31).

 
그는 병원에 있는 동안 갚지 않은 병원비를 남들이 갚아 주어야만 했다. 무소유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무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다.
 
당시 감옥에 있으면서도 식대를 지불해야 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물질을 충분히 확보했고 죽은 후에 남에게 뒤치다꺼리를 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던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나는 너희가 보낸 것을 에파프로디도로부터 받아서 풍족하게 되었노라. 이는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희생제요,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빌 4:18).

 
또한 그는 마음을 비울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과는 정반대의 말로 사람들을 미혹해 왔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물소리 바람소리' 중)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어야만 한다. 물론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의 상태는 마귀의 영향 아래 있기에 악령으로 채워져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채워져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비워두면 마귀가 그 자리를 점유하게 되고 그 사람은 악령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물 없는 곳으로 두루 다니면서 쉴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단장되었더라. 그러자 그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영을 데려와서 들어가 거기서 사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더 악화되었더라』   

(눅 11:24~26).

 
마지막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질문에서도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인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기에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만일에 그의 거짓말에 속아서 일평생을 시간을 허비하며 살다가 죽는다면 그가 갔던 곳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자연인으로서 자연인들에게 올바른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그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해놓고 답변은 주지 못했던 소크라테스와 같이 정답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 따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 5:12).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과 사망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막연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통해서 보는 죽음은 영과 혼과 육체의 분리일 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몸은 누구라도 죽으면 무덤, 즉 흙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왔고 모두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도다』(전 3:20).

『모든 육체는 함께 멸망하고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욥 34:15).

 
그러나 영과 혼은 비물질이기에 결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므로 가는 곳이 육체가 가는 무덤이 아니다. 사람의 호흡이 멈추면 영은 그 몸에서 빠져나와 그것(생명의 호흡)을 주셨던 하나님께 회수되고 혼 역시 구원 여부에 따라서 지옥이나 낙원으로 가게 된다.

 
『그때에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죽음에 관한 어떤 말에도 점수를 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입적(入寂)이라는 불교용어를 쓰는데, 그것은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다.”라는 뜻을 지녔으며, 바로 중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들은 다양한데 열반(涅槃))은 도를 완전히 깨우치고 모든 중고와 번뇌가 끊어진 해탈의 경지에 들었다는 뜻으로 승려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적멸(寂滅), 귀적(歸寂) 입멸(入滅) 등 불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용어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부분 불타오르는 듯한 고뇌, 번뇌의 불을 꺼버리고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깨달음을 완성한 단계로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견해를 앞세워 죽음을 미화하고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노력을 해도 죄인은 죽어서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라는 사실은 결 코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죽으면 무소유자든지 소유자든지 지옥 아니면 낙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악인은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러하리라』(시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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