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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예배 대표기도 / 새벽기도문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온전히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새벽 예배에 은혜로 우리를 불러 모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십자가로 증거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며 또한 영원까지 함께 하는 줄을 믿사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러한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에 더욱 충만케 되기를 구하옵니다.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말씀과 기도로 기둥을 세우고 서로가 연이어져 튼튼히 세워져 가는 아름다운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잣대로 제자들을 정죄한 것처럼 서로를 정죄치 아니하게 하옵시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성도 모두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함께 기업을 나눌 것을 소망하며 기도드립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주께서 허락하신 고난이 너무 버겁고 그 끝이 언제인지도 알지 못하며, 또한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에 낙심될 때, 주님이 함께 하시며 또한 주께서 완전히 선하심을 믿는 믿음 위에 굳건히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욱 바라옵기는 주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오니 고난의 시간과 크기를 감하여 주셔서 주께서 예비하신 선하신 뜻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구하옵나이다.
  
이 시간 말씀 선포와 말씀을 전하실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주의 생명의 말씀이 가감 없이 선포될 수 있도록 먼저 목사님의 머리 위에 성령을 충만히 더하여 주시옵시고, 우리의 마음을 옥토가 되게 하사 말씀을 더욱 사모하며 그리스도를 닮는 삶의 열매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과 원수 되었을 때, 도리어 그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그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나 평안할 때나 변함없이 그 사랑을 마음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성도 모두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가 되기를 구하오며,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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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이해가 아닌 믿음

 

 

 

 


사람들은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아들, 이해력이 발달된 자녀들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해력이 좋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1.유대인은 예수를 이해하려고만 합니다.

이들은 사람의 이지(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은 이후부터입니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안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는 모두 다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단점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와의 바른 관계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들의 목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기의 목자로 받아들일 때 믿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이해하기 이전에 그와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영적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말을 듣고는 예수를 돌로 치려고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예수를 유대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오히려 폭력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예수는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을 보여주셨습니다.(25) 예수는 모든 일을 하시면서 그것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에서 예수의 제자들 역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예수는 사랑과 관심으로 그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믿음을 원했습니다.(28) 예수는 양들에게 이해나 인정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양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며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를 믿는 양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에 헌신함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의 동기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는 그가 이루신 아버지의 일을 보고 믿으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37,38절) 예수는 사람들의 믿음을 위하여 아버지의 일을 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실 정도라고 하셨습니다.(요4:34)

3.이해의 사람이 아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의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솔로몬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타락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백성을 재판하는 즉 사람을 판단하는 지혜였지만 완전한 지혜는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미6:9) 완전한 지혜를 가지는 것이 곧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와 관계가 분명한 사람은 예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신뢰하며 받아들이지만 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따지며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는 나의 목자 나는 그의 양이란 관계로서 그의 사랑과 도우심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관심은 문자적인 율법에 대한 관심이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된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오직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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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인의 삶 / 주일 예배 대표 기도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부족하고 연약함을 따지지 않고 믿는자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고, 영접하는 모두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권능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쁘게 찬양과 예배를 드리게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정치와 경제가 어렵습니다. 저마다들 자조섞인 푸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나이나. 이 모든 것이 주의 크신 사랑을 이웃에 권하지 못하고 전도하지 못한 우리의 허물에서 연고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시간 한주간 일상생활에서 지은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께 내어 놓고 고백하오니
크신 사랑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가 심히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이럴때 일수록 우리 신자들은 말씀에 의지하며 넉넉히 이기고 일어서게 하시옵소서.
”할 수 있거든 이 무슨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못함이 없느니라”함과 같이
우리 모두 이 난관을 잘 헤쳐 나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힘으로만 살게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오니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또한 우리를 낙심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게 하시어 그들을 주님앞에 인도하는

도구로 삼아주시고 서로 사랑함으로 희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능력의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육신의 병으로 고통받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와 그 가정에 더욱 강건한 믿음을 주시고
주님전에 나와 간절히 기도할 때 다 응답하여 주셔서 큰 위로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김애남 목사님을 세우셔서 생명의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중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여 주시며, 잃었던 용기를 되찾게 하여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귀한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도사님, 해외선교사님들 영육간에 강건함을 주셔서 말씀 잘 전하게 하옵시고,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이 예배를 위하여 봉사하며 섬기는 일꾼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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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죽은 후에는....

 

 

 
무소유자도 소유자도 죽은 후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의 형체에게 생명의 호흡인 영을 불어 넣으셨을 때 인간은 흙도 어떤 영도 아닌 새로운 존재인 살아있는 혼(a living soul)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호흡”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그 원재료인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게 된다.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해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이 말씀대로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구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려올라간 에녹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 죽지 않고 변화되어 휴거될 사람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할 뿐 그 누구도 한번 태어나면 결국은 한번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히 9:27).

 
며칠 전 절에서 일평생 대부분을 중으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한 사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함과 함께 한없이 높이며 그의 삶을 칭송하고 있는데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언론들은 그가 평생을 소박하고 청렴결백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격찬해마지 않는다.

“평생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했던 법정 스님이 오늘(11일) 입적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종교를 초월해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 폐암으로 투병해 오던 법정 스님이 오늘 오후 2시 입적했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며 54년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지난 1975년부터 전남 송광사 불일암에서 17년 동안 홀로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자신이 지은 길상사로 옮겨진 직후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것이 언론이 늘어놓은 찬사와 그의 발자취의 일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모두 다 옳고 심오한 뜻이라도 있는 것처럼 관심을 두고 그 말을 되씹으면서 그의 삶을 본받으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들을 모아 놓은 “어록”에 담긴 내용을 보면 보편적인 상식선에서의 진리는 될지언정 역시 성경의 절대 진리와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다. 그는 무소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

 
이 말이 왜 그처럼 대단한 말이란 말인가? 누구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살면서 느끼는 상식적인 얘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무소유라는 말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써먹고 있을 뿐이지만, 성경은 무소유랍시고 결혼을 금하여 가족도 없고, 모든 물질을 소유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되어 풍성하게 가지게 될 것이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되리라. 너희는 그 쓸모없는 종을 바깥 흑암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마 25:29,30).
 

다만 물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주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설령 네가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며 설령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육신에 고통이 있게 되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것같이 하며 또 우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 것같이 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것같이 하며 또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소유하지 않은 것같이 하라. 그리고 이 세상을 이용하는 자들은 다 이용하지 못할 것처럼 하라. 이는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 감이라』(고전 7:28~31).

 
그는 병원에 있는 동안 갚지 않은 병원비를 남들이 갚아 주어야만 했다. 무소유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무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다.
 
당시 감옥에 있으면서도 식대를 지불해야 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물질을 충분히 확보했고 죽은 후에 남에게 뒤치다꺼리를 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던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나는 너희가 보낸 것을 에파프로디도로부터 받아서 풍족하게 되었노라. 이는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희생제요,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빌 4:18).

 
또한 그는 마음을 비울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과는 정반대의 말로 사람들을 미혹해 왔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물소리 바람소리' 중)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어야만 한다. 물론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의 상태는 마귀의 영향 아래 있기에 악령으로 채워져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채워져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비워두면 마귀가 그 자리를 점유하게 되고 그 사람은 악령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물 없는 곳으로 두루 다니면서 쉴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단장되었더라. 그러자 그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영을 데려와서 들어가 거기서 사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더 악화되었더라』   

(눅 11:24~26).

 
마지막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질문에서도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인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기에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만일에 그의 거짓말에 속아서 일평생을 시간을 허비하며 살다가 죽는다면 그가 갔던 곳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자연인으로서 자연인들에게 올바른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그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해놓고 답변은 주지 못했던 소크라테스와 같이 정답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 따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 5:12).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과 사망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막연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통해서 보는 죽음은 영과 혼과 육체의 분리일 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몸은 누구라도 죽으면 무덤, 즉 흙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왔고 모두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도다』(전 3:20).

『모든 육체는 함께 멸망하고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욥 34:15).

 
그러나 영과 혼은 비물질이기에 결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므로 가는 곳이 육체가 가는 무덤이 아니다. 사람의 호흡이 멈추면 영은 그 몸에서 빠져나와 그것(생명의 호흡)을 주셨던 하나님께 회수되고 혼 역시 구원 여부에 따라서 지옥이나 낙원으로 가게 된다.

 
『그때에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죽음에 관한 어떤 말에도 점수를 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입적(入寂)이라는 불교용어를 쓰는데, 그것은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다.”라는 뜻을 지녔으며, 바로 중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들은 다양한데 열반(涅槃))은 도를 완전히 깨우치고 모든 중고와 번뇌가 끊어진 해탈의 경지에 들었다는 뜻으로 승려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적멸(寂滅), 귀적(歸寂) 입멸(入滅) 등 불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용어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부분 불타오르는 듯한 고뇌, 번뇌의 불을 꺼버리고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깨달음을 완성한 단계로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견해를 앞세워 죽음을 미화하고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노력을 해도 죄인은 죽어서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라는 사실은 결 코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죽으면 무소유자든지 소유자든지 지옥 아니면 낙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악인은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러하리라』(시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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