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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서와 장례

구약성경에서는 장례식에 대해 의외로 언급을 피하고 있다.
초상이 나면 애곡으로써 장례는 시작된다.
애곡은 슬픔의 표현으로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므로 애곡은 친족의 의무이며 문상객들도 애곡한다.
애곡은 초상 때부터 시작해서 묘지에서 그리고 매장이 끝난 뒤에도 보통 7일간계속한다(창 50:10 이하, 삼상 31:31)
예외로 모세와 아론을 위해서는 30일간(민 20:29, 신 34:8)
야곱을 위해서는 70일 간(창 50:3) 애곡했다.

애가를 지어 부르기도 한다(삼하 1:19-27, 3:33-34, 겔 19:1-4) 이것은 오늘날 조사와 같다. 이는 주로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고인의 선행과 용감성 등 여러 가지 업적 등을 이야기한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슬피 부른 노래가 있다(삼하 1:19-27)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관(棺)을 사용하지 않는다. 관에 관한 유일한 언급은 애굽에서의 요셉에 관한 이야기 뿐이다(창 50:6)
시체는 상(床)에 눕히고 천으로 싼다.
야곱과 요셉, 아사왕의 시체에 향(香)을 넣었지만(창 50:2, 26, 대하 16:14)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행하지 않았다.

장례 행진을 위해 시체는 상여로 운반했다(삼하 3:31 이하, 대하 16:14) 여러 사람이 메고 다녔는데 우리나라의 옛날 상여와 흡사하다고 생각된다.

장례는 보통 1일장으로 지냈다. 하루 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애쓴 이유는 위생 상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하려고 했고, 또 다른 이유는 부정(不淨)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무덤은 대개 언덕에 구멍을 파서 만들었거나 땅을 파서 매장하였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장례하기 위해 헷 족족 에브론에게 은 4백 세겔을 주고 밭과 막벨라 굴을 사서 가족 묘지를 삼았다(창 23:16-17) 묘지는 고인이 생전 거주하던 곳에서 가까운 곳이나 연고지에 만들었다.
막벨라 굴에는 사라를 위시하여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야곱 등 가족들을 매장하였다.

다윗은 죽어 다윗성에 장사되었다(왕상 2:10) 그곳이 다윗의 묘지가 되어 역대 왕들이 묻혔다.
그러나 므낫세 왕과 여호람 왕 같이 인기가 없고 불경건한 왕들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지 않았다(왕하 21:18, 대하 21:20) 구약시대 장례를 중요시한 것을 전도서에서 엿볼 수 있다.
자식을 백 명이나 두고 아무리 오래 산다 할지라도 인생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죽어서도 평안히 묻히지 못할 신세라면 이것은 아예 낙태된 아이보다 못하지 않겠는가(전 6:3) 라고 했다.

구약성경은 생(生)과 사(死) 그리고 장례를 똑같이 하나의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러므로 독부 이세벨의 시체를 묻어주는 사람이 없어 땅에 버려져 개들이 뜯어 먹을 것이라고 저주하였고(왕하 9:10)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예언자들의 시체는 조상들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리라(왕상 13:20-22) 하였고 불경건한 여로보암 왕(왕상 14:11)과그의 뒤를 계승한 바아사 왕(왕상 16:4)도 같은 선고를 받았다.
구약에서는 해마다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해 고향을 방문했고(삼상 1:21, 9:12-13, 20:6, 28-30) 이 때 주로 높은 곳 (왕상 3:4, 11:7, 호 4:13, 10:8, 암 7:9)에서 제사를 드렸으며(창 35:20, 삼상 9:12-13, 욥 27:15, 사 53:9) 이곳에서 추도예식이 있었다고 드 보(De Vaux)는 주장한다. 특히 족장들이나 위대한 조상들의 무덤은 그 후손들에 의해서 일찍부터 일종의 성역화(聖域化)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중세교회

중세 교회의 장례 양식은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으나 내용적으로는 연옥설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묘지에서만 아니라 제단에서 행하는 의식을 차차 존중히 여기면서 죽은자를 위한 진혼 미사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초기의 평화와 승리에 근거한 장례의식이 차차 행해지지 않고 슬픔이 가득한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을 실감하는 형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유족과 지도자들도 죽은 자가 직면한 연옥에서의 고통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검은 상복을 입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옥 사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590-604)에 이르러 본질적인 교리가 되었다.

★ 신약성서

신약성서의 몇가지 장례기사를 통해 신약시대의 장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 행렬 기사에서 어느 정도 그 시대 장례를 짐작할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이 큰 때를 지어 상여를 따라 온 것은 이웃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는 공동체 의식이었고, 장례 행렬이 있는 것은 매장하기 위한 행렬이다(눅 7:11-17)
야이로의 딸이 죽은 후에 사람들이 피리를 불며 곡하며 떠드는 무리가 있었다(막 6:37-39)는 것은 초상이 나면 애곡하는 것은 슬픔의 표현이며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물론 문상객들도 애곡하였다.
애곡은 흔히 직업적인 곡꾼들을 고용하기도 했는데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반드시 애곡하는 여인과 둘 이상의 악사가 주로 피리를 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흔히 악기가 동원되기도 했는데 특히 피리를 사용했다고 한다(대하 35:25, 렘 48:36, 마 9:23)
나사로의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요 11:38)
나사로의 시체의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요 11:44)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수의를 입힌 것과 같다. 우리 나라에서는 시체를 옷과 이불로 싸는 것을 소렴(小斂)이라 하고, 소렴을 치른 다음 날에 다시 시체를 옷을 거듭하고 이불로싸서 베로 묶는 것을 대렴(大斂)이라고 한다(큰 사전에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둔 예수의 시체를 유대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그리고 아직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모시고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았다(마 27:60, 요 19:38-42)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엄벌을 받아 그 자리에 고꾸라져 숨지니 젊은이들이 들어다 그 시체를 싸가지고 내어다 묻었다.

그 후 삽비라도 죽었으므로 떠메고 나가 그 남편 곁에 묻었으니(행 5:5-6, 10) 부부를 합장한 것이다. 욥바의 여제가 다비다가 죽은 사람들이 그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이층 방에 눕혀 놓았다.
친구들이 몰려와서 그녀가 살았을 때에 만들어 두었던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면서 애도했다(행 9:37-39)
신약성경에서 장례 기사를 보면 독특한 매장 형식이나 장례 의식을 엿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어떤 의식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신약성경은 복음과 그 전파 상황은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그 주변의 사건들은 거의 생략하였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아무엇도 기록되지 않았다고 의식도 없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교회로서의 독특한 의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장례 기사를 종합해 보면 사람이 죽으면 가족과 친족들이 애곡했고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도 울었다(요 11:35)
시체는 깨끗이 씻기고 방에 안치한 후 장례를 준비했다.
시체에 향료를 바르고 손발을 묶고 고운 베로 감았다.
가족과 주의의 인사들에 의해 장례가 진행되었고 시체는 상여로 운반되었으며 장례방법은 거의 매장이었고 부부는 곁에 묻었으며 장례는 보통 1일장이었다.

★ 초대 교회

장례는 원래 가족의 책임으로 진행되었으나 이웃 사람들이 무관심할 수 없는 일이므로 자신의 일과 같이 슬퍼하면서 적극적으로 장례일에 협력하였다.
장례는 그 가족만의 개인적인 아니라 공동 생활과 운명을 같이 하는 일로 여겨 실질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가가 있으면 장례가 끝날 때까지 온 마을이 협력하였다.

욥바의 다비다가 죽었을 때 친구들이 모두 울었고,시체를 씻어 다락방에 눕히고, 다비다가 생전에 만들었던 옷들을 내어 보이면서 고인을 추모한 것은 이웃들의 협력이 얼마나 열심이었던가를 엿볼 수 있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며 생활 공동체이므로 장례는 공동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온 교회가 협력한 것을 볼 수 있다.
초대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장례를 맡아 집행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장례식을 거행하지 않는다고 사후의 운명이 슬프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유족에 대한 위로와 앞으로 같이 죽음을 경험할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 엄숙한 마음을 자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초대 교회는 장례 의식과 매장에 기독교 신앙이 용납할 수 없는 죽은 자를 위한 제사와 미신적 습관이 뿌리 깊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적합하게 지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에 적합한 장례를 위해서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훈련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러한 지도 과정을 지나는 동안 교회의 장례 의식도 확립하게 되었다.
고대의 장례 의식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이교적인 것을 배제하면서 어떤 것은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부여하여 교회가 흡수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예배는 장례 의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예배는 예배드리는 자의 신앙의 구체적 표현으로 장례도 신앙을 기본으로 한 행위이므로 교회는 초기부터 장례 때 시편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

고대 교회의 장례는 준비와 장례 행렬과 매장 등 세 부분으로 진행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은 즉시 죽은 자의 눈을 쓸어내려 감기고 그 후에 시체를 깨끗이 씻고 기름을 바르고 흰 베로 시체를 싸고 관에 넣었다.
왕이나 감독이나 사제같은 이는 공식적인 복장을 입히기도 하였다.

죽은 자의 유해를 꽃으로 장식하는 것은 죽은 자에게 음식물을 드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초기에는 금지하다가 차차 일반화되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이 부활신앙으로 죽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는 개선으로 믿고 생화로 장식하는 것을 면류관으로 여겼다.
세례를 받을 때 죄의 몸은 이미 죽고 예수의 신부로서 약속되었기 때문에 현실의 죽음은 그것을 위한 한 과정으로 알았다.

장례 준비 과정에서 애곡할 뿐만 아니라 부활 신앙으로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고 시편을 노래하였다.
초기에는 자택에서 장례를 치르다가 후기에는 유해를 회당으로 옮겨 하루 밤을 보내면서 시편을 조용히 노래하였다.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미하면서 유족을 위시하여 살아 남은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함이었다.

장례 행렬은 유해가 있던 장소에서 묘지까지 박해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낮에 행하였다.
밤에 장례 행렬이 진행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교도와 사람의 눈을 피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범죄자의 장례 등이다.

장례 때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낮에도 등불을 밝히고 촛대를 들었다. 이것은 부활의 희망을 상징한 것이다.
영구를 상여 위에 놓고 친척이나 친구들이 어깨에 메고 시편과 할렐루야를 노래하면서 행진했다. 장례 행렬의 행진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그 때는 곡하는 여자들이 앞장서서 큰 소리로 곡하고 다음에 상여가 따르고 그 뒤에 사람들이 자기 몸을 두드리며 곡하면서 애도의 뜻을 표했다.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행위를 금하고 부활 신앙에 적합한 행위를 하도록 가르쳤다.
그 결과 절망적으로 슬퍼하는 행진에서 장엄한 희망이 가득한 행진으로 변하게 되었다.
검은 상복을 입게 된 것은 대략 8세기 경부터라도 생각된다.

매장은 유해와의 고별로부터 시작된다. 교인들이 유해 주위에 둘러서서 찬송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도 거행했다.
성찬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의 기회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때 죽은 자에게도 떡과 포도주를 주는 일이 있었으나 곧 금지되었다.

이미 준비된 무덤에 천으로 싼 유해가 옮겨지고 기도와 찬미를 부르면서 흙을 덮었다. 매장할 때 고인을 추도하는 말을 한 것이 교부 시대의 문헌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매장 후 회식도 있었고, 3일째, 9일째 혹은 40일째, 친척과 친구들이 가정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죽음이 결코 산 자와 죽은 자의 간격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에서 때때로 모여 고인을 추모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 종교개혁

종교개혁 시대의 장례의식은 세가지 면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죽은 자에 대한 교회의 보살핌이요, 둘째는 부활 신앙의 고백이요,
셋째는 구원에 참여할 육체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종교개혁자 중에도 칼빈(Calvin John 1509-1564)은 1561년의 제네바 교회 규정에 매장에 관해 기술하였다.
거기에는 죽은 자는 일정한 질서 밑에서 소정의 장소에 장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매장의 방법은 개인 자유에 맡기고 묘지까지 유해를 옮기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미신적 행위를 일체 금했다.
여기에는 신앙상의 규정보다는 시 당국의 정한 장례에 관한 규칙을 잘 지키도록 언급하고 있다.

장례가 교회의 일이라기 보다는 개인적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개혁교화가 장례를 교회의 일로 정한 것은 그 후 시대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죽은 자를 매장하는 풍습을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인정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생명에 대한 보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도 이런 풍습이 오류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신앙의 조상들은 매장의식을 엄수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같은 풍습이 이방인들 사이에도 존속되어 그들 앞에 놓인 부활의 형상으로 그들이 깨우쳐지기를 원하셨다.

매장의식은 유익하지 못했지만 만일 우리가 그 목적은 현명하게 통찰한다면 우리에게는 유익한 것이 된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모든 사람이 함께 고백한다는 것은 그 불신앙에 대한 중대한 반박이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매장 풍습은 미신에서 생긴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함이라(마 26:12-13)고하신 것은 장례는 모든 것을 썩히고 말살하는 무덤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들어 갱신의 광경을 그려보게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례를 엄숙하게 지키는 것은 족장들도 시인하였거니와 그런 엄수는 그들이 장례를 믿음에 대한 가치있는 도움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된다.
만일 아브라함의 눈 앞에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가치와 종교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그 아내의 무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세밀한 주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창 23:4, 19 기독교강요 3편 25장

루터(Luther Martin)는 장례를 교회의 일로 행하였으나 연옥 사상은 교황이 저지를 잘못이라고 배격하면서 부활 신앙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묘지에서 행하는 장례의식을 존중히 여겨 매장 전후에 예배는 드리면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금했다.

개혁 시대의 장례 예식은 성례적인 의식보다는 말씀을 강조하는 예배였다.
교회의 역사적 발전과 그 교화가 처한 문화적 상황에 따라 어느 한 요소가 강조되거나 어떤 요소가 보태지기도 했다.
칼빈은 묘지에서 적절한 장례 설교를 인정했으나 장례의식보다는 신앙의 신비를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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