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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설교] 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동로 함께하는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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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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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제목: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본문:마 7:13,14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물 한방울을 자신의 손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습니다. 우주의 지혜를 바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이 물한방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바다에 비해 물한방울과 같은 그 지혜를 가지고 어떻게 성공하셨습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세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자신의 생활을 즐길 것, 세 번째는 삶의 여유를 가질 것 등 이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자신의 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삶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깊이 성찰해보지 못하고 그저 감정과 세파 속에 휩쓸려가기 쉽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주방기구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한 후 유명해 진 미국의 성공철학자 지그 지글라(zig ziglar)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①정직한 사람 ②인격이 좋은 사람 ③성실한 사람 ④신념이 강한 사람 ⑤충성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세계에서 가장은 많은 강연을 한 인물로 20세기말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경영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통하여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은 그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①주도적이 되라 ②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③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④상호이익을 추구하라 ⑤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⑥시너지를 활용하라 ⑦심신을 단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공의 비법이 어디 있다고 여기십니까?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단언코 믿음과 노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앞서 말씀드린 것들도 다 성공을 위한 중요한 요건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믿음과 노력이 없다면 그 위대한 것도 이루어낼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낸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으며, 설령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성공하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인간적으로 인내하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언가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의 일이나 무언가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피나는 노력을 투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매맞고 주리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힘써 결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몇 번씩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핍박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수함으로 주님의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은 이만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전구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노아 웹스터라는 사람은 웹스터사전을 집필하기 위해 36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두 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시인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시를 보통 99번씩 다듬어 완성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은 무려 10년의 세월에 걸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인생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위인이라고 불리거나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좁은 길을 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험하고 힘들어서 가기 어려운 좁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서 정말 올바르게 성공한다는 것도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일부러 골목길을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넓고 평평하게 잘 닦여진 고속도로로 다니지 말고 일부러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대로로 가지말고 음침한 골목길로 가라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씀입니까?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길을 그저 가기 쉽다고 아무 길로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하기 쉬운대로, 마음에 끌리는대로, 무사안일하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힘든 길이라도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옳은 길, 바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간섭하는 것이 성가시고, 마음에 부담이 가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진리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된 본성 때문에 그 길이 결코 가기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포기하고 그저 편하고 무사안일한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러나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좁은 길은 무엇이며, 넓은 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길을 가야만하는 것입니까?

1. 넓은 길은 육신에 이끌려 자기 마음대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13절의 말씀을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고 넓은 길은 그저 육신의 이끌림을 따라 대강대강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편한대로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길입니다. 그저 죄된 본성의 욕구를 따라 가면되는 길을 말합니다. 사람의 통제나 제재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간섭도 거부하며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가는 길을 말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입니다. 세상물결 흘러 가는대로 적당히 따라 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저 육신이 요구대로 살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않습니다. 죄된 본성의 요구에 따라 때로는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자기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편한 길이겠습니까? 그것이 자유를 누리는 길이겠습니까? 물론 당치 않은 말입니다. 그것은 편한 길도 아니고, 자유의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대로 놀아나는 길입니다. 편하고 좋고 자유로운 길 같지만 그 길은 결코 자유로운 길이 아니라 죄의 노예된 길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결국은 죽음의 길일 따름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뱀의 속삭임에 유혹되어 아담과 하와가 갔던 길인 것입니다.

어느날 뱀은 하와를 찾아가 속삭였습니다. 정말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자 하와가 그렇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은 다시 말합니다. 아니다.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자 하와는 점점 뱀의 꾀임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보니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결국은 죽음과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괞찮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 편한대로 해라. 네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하라.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네 인생 네가 네 뜻대로 살아라. 왜 간섭받고 사느냐? 자꾸만 이래라, 저래라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없다. 그들은 너를 얽어매려고 한다. 너는 자유인이다. 그러니 네 마음에 편한대로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한 사단의 소리입니다. 사단의 소리가 별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역하면 그게 곧 사단이요, 적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6:24절에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또 눅8:21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내 모친이요,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좁은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요구에 충실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을 길로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셨던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실때에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좁은 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하는데 너희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길이 뭡니까?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하나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길은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하게 생명으로 통하는 하나밖에 없는 외길이기에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여러 군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예수님 밖에 없는 외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또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12절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딱 하나입니다. 곧 예수님만이 생명의 문이요, 구원의 문이요, 영생의 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은 많다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굳이 외길만 고집할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남쪽에서 올라가든 북쪽에서 올라가든 아무데로나 올라가도 정상에 올라가기만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나름대로 신을 찾아 올라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소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탄의 소리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소리가 사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라고 하는데 둘이라고 하면 그것이 사탄의 소리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보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사람의 소리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사람이 연구해보니까, 내가 도를 닦아 보니까 그런 것처럼 보이더라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미 예언되어 있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대로 이땅에 오신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만이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고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주장하는 넓을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인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오직 한길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그 좁은 길은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실때에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두번째로 좁은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저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것도 쉽습니다. 죄된 인간의 본성에 따라 대강대강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세상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죽은 삶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 갑니다. 그러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힘차게 거슬러 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인생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길은 결코 녹녹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죄와 무지로 오염된 심령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의 대세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조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치와 이상과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길은 간섭받아야 하고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때로는 알기는 알면서도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우리를 자꾸만 다른 길로 내 몰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진리만이 가득하다면 저절로 진리의 길로 가겠는데 우리 안에 비진리가, 거짓된 것들이, 죄된 것들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것들이 들어있어서 우리를 자꾸만 그 길로 이끌어가려고 하니까 그것들과 싸우느라고 힘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길이고, 좁은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대 사도도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협착하다고 하셨습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어떤 제재를 받는 답답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육신의 요구와 생각과 세상에 보이는 것을 따라하면 쉽겠는데 그것들을 부정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좀 힘이들고 답답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려고 하니까 물질적으로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도 내 혈기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의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희생해야 하고,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 안되고, 힘이 들고, 그래서 가기가 어려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길이 비록 좁을 지라도 가야하고, 답답해도 가야하고, 손해를 봐도 가야하고, 희생을 당해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손해를 보아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만이 진정한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리의 길은 결코 다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둠과 연약함과 무지함 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정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전한 진정한 성공자도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생명을 원하신다면 다수가 가는 길을 좇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신다면, 우리가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면, 더욱이 여러분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기를 원하신다면 진리 편에 서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편에 서 계시기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면 열심히 좁은 길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을 부인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여 생명을 향하려 세상의 조류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모두 세상적으로나 하나님나라에서나 진정한 성공자가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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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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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행복한 인생

 

 

 


제목 : 행복한 인생

말씀 : 골4:2~4

1.행복은 마음에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멕시코의 어느 바닷가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전갈에 물려 병원을 찾아갔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전갈에 물린 부위를 입으로 빨아 독을 빼내고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진주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진주가 들어 있는 조개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야말로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갈에 물린 아들을 문전박대하던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치료해 주겠다고 하고, 그를 업신여기며 따돌리던 동네 사람들도 너나 할 것없이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였습니다. 또 평소에는 왕래도 없던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고,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성당의 신부도 은근히 큰 헌금을 기대하여 부담을 주었고, 각지에서 장사꾼들이 몰려와 협작하여 진주를 헐값에 사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고민하다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장사꾼들이 헐값에 진주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어 결국 그들이 손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도 그들을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진주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존스타인 벡은 소설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난리를 치지만 오히려 돈 때문에 도리어 서로 싸우고 속이고 심지어는 죽이며 그래서 결국 행복은커녕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도 아니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순입니다. 그래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니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지니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겨울에는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봄은 건조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고독해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다.”고 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4: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슬픔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감사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진정 복된 마음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있는 죄와 무지를 해결해야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이것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와 무지를 물리칠 때만이 진정한 은혜와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즉 꼭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계속해야 한다. 계속하는데 특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요, 영적인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때려치우거나 옛날에 많이 했다고 중단하거나 응답이 없다고 그만 두거나 하지 말고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강도 계속적으로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조금하다 말면 소용없습니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잘하려면 매일 꾸준히 공을 차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매일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야 합니다. 공부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기도도 계속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잘 안 들리는 것 같아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계속 기도해야 주님과의 교통이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져 계속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 않고는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가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끈질기게 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실험을 했습니다. 빈민촌에 들어가 열집을 선택해서 현관에 매일 50불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첫 날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돈을 집어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열흘 쯤 지나니까 사람들은 그를 기다렸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돈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20여일 지나니까 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돈이 오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어 돈을 갖다놓지 않으니까 ‘왜 오늘은 돈을 안 가져오는 거야. 뭐야 우릴 놀린 거야 뭐야. 주려면 계속주지 왜 주다 마는거야?’하면서 비난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보자 ‘여보, 오늘은 왜 돈을 안 주는 거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건 당연한 일 아니요?’하면서 마치 빚쟁이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무언가 은혜를 끼쳤을 때 처음에는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일상화되면 감사는커녕 도리어 무슨 빚쟁이처럼 내놓으라고 하고 안주면 난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인데 계속 너무 많이 주시니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남보다 조금 덜 받았다고 생각하면 불평불만을 토하고 하나님께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자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꽤 괜찮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였습니다. 거기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있었고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과 클링턴 전 미국 대통령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클링턴 미국 전 대통령이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중 하나인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연합기구 중의 하나인 GCF(녹색기후기금)의 한국유치가 확정되었습니다. 세계경제10개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확산 되어 문화강국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자유와 질서가 잘 잡힌 나라도 그닥 많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선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3인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지도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을 정말 어떻게 하면 세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물고 뜯고 과거에만 집착하여 흠집내고 할퀴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축복의 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감사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에 감사하며 더욱 나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정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절 말씀 다시 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 기도하라. 특별히 감사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것이 많지만 감사할 것만큼 많습니까?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고 말하고 숨쉬고 걷고 뛰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평안이 임합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면 마귀가 역사하고 어두움이 임하고 미움과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신자입니다. 최고의 기도, 최고의 영성은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귀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자존감 가운데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은둔형 외톨이는 밖에 잘 나오지 않고 방에 틀어 박혀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인은 주로 가정 파탄, 부모의 폭행, 집단에서의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많은 경우 우울증, 성격장애, 강박증, 공격성 등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이들로 인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정 붕괴, 부모의 폭행,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은 외적인 요인이고 내적인 요인은 그런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살아감으로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하게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대한 반항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져야하기 때문에 남을 헐뜯고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존감은 남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지도 않습니다. 나 자체로 귀한 존재니까 그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과 남을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내가 너무나 귀한 존재니까 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추하게 사용하지 않고 귀하게 아름답게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답고 복되며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스스로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거룩하고 귀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다는 분명한 자긍심 가운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여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귀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귀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겠습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우면 그 삶에 또한 얼마나 만족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귀한 사역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습니까? 이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럽겠으며, 그러면 또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만족함이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국회의원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 신분이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좋고 가장 행복합니다. 그까짓 세계 권력과 명예와 부에 관심없습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나 이런 기관에서의 무슨 감투 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저 목사라는 신분 하나에게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신문사설에서 폴리페서 즉 정치교수들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폴리페서는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의미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로서 교수본연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고 정치에 뛰어들어 명예를 얻으려는 교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수들이 그렇게 세상적인 명예를 좇으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노벨상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수라면 교수라는 신분에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 감투하나 씌워준다고 낼름 교수직을 포기하고 정치에 뛰어들고 한다면 결코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학문에 열정을 쏟아야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열정을 쏟을 때에 본인도 행복하고 나라의 미래도 더욱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 구원의 이 귀한 사명을 가진 자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이 생명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큰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도 적극 참여함으로 높은 자존감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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