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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빛의 은혜가 가득한 인생

 

 


제목:빛의 은혜가 가득한 인생

말씀:요8:12-24

 


1.어둠속에 있는 인생

어느 날 해와 별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해가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을 머얼리 비추며 봐라, 내 빛이 얼마나 밝으냐 하면서 뽐냈습니다. 그러자 별이 말했습니다. 네 빛이 밝긴 하다마는 어둠속에서는 내가 최고지. 나는 밤이 되면 온 하늘을 영롱한 빛으로 수놓아 사람들에게 꿈과 사랑과 희망을 심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해가 말했습니다. ‘어둠이 도대체 뭐냐?’ 별은 그것도 모르냐면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며 해를 캄캄한 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해가 찾아가자 그만 밤이 사라져 어둠을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별은 다시 해를 커다란 동굴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동굴안도 역시 해가 들어가자마자 어둠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어둠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태양은 어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태양 앞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별은 자기 빛이 태양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태양앞에서 빛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별빛이나 달빛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태양을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둠은 어디서 왔습니까? 태양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깃드는 것이 어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그 어느 누구도 참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빛은 세상에서 유일한 한 절대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빛을 받지 못할 때 어둠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비춰주는 그 참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고 무엇인가가 그 빛을 가리면 가릴수록 그 인생은 어둠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생도 자기 빛을 자랑하지 말고 진정한 빛가운데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빛을 찾아 빛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인생이 밝게 빛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도 진정한 빛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도,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과학 문명이나 지식도 참빛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참빛이 아니요, 동시에 그 참빛을 받지 못하면 어둠속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길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어둠속에 있는지를 일깨워 주시면 주님 앞에 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소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에는 이런 사람은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처리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여인을 고소하러 왔던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슬슬 꽁무니를 빼더니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주신 말씀이 12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러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것은 사실 거의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 자신이 엄청난 어둠속에 있으면서, 너 자신이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네 어둠의 문제는 덮어 두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 모두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이나 진리나 생명의 길도 알지 못하고 죄를 행하며 원망과 불평속에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너 자신이 죄외 무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너 자신이 먼저 생명의 빛을 받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욕하기 전에, 세상의 잘못된 것에 대하여 비난하기 전에, 세상의 무슨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영광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인 나에게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죄로 말미암아 심각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우선은 물질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로 마치 우주나 생명에 대하여 정복할 것처럼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인간이 알고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주나 생명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그 신비에 대하여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나마 조금 알고 누릴 수 있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능력이나 지식조차도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여 도리어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식과 문화수준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도리어 더 많은 스트레스와 시기와 질시와 불안과 절망과 거짓과 교만과 욕심과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더더욱 심각합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섬기지도 않고 그저 자신과 물질과 헛된 우상을 섬기며 자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헛된 우상과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점을 치고 부적을 달고 다니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날짜와 글자에 얽매여 제 자식 이름 하나도 제 맘대로 못 짓고, 이사도 맘대로 못가고, 결혼식도 제 맘대로 못하고 귀신한테 물어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영원한 멸망의 장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13: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저마다 다 똑똑하고 잘났다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무지가운데 있어서 도대체 진리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생명의 길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천국을 보지도 못한 채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이 어둠속에 있고 지혜도 능력도 의지도 지식도 경험도 다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질고를 안고 있으면서도 병든 줄을 모르고, 마음과 눈과 귀와 영혼이 어두워져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결코 자신의 지혜나 경험이나 이성이나 지식을 따라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서 지혜를 찾고, 나아갈 방향을 찾고, 옳은 길을 찾고, 그것을 기준점으로 삼아 그 말씀 대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진정 하나님 안에 충만한 그 빛과 같은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 인생은 이와 같이 참 빛이 아니라 도리어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어서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모든 인류의 참 빛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앞에서 보았던 12절 말씀 다시 보겠습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유일한 참 빛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인간에게만 빛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에게 빛입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시간적, 공간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모든 존재에게 모든 시간 동안 모든 공간을 완전하게 비춰주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질적으로 양적으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만물에게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유일한 빛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인류와 우무만물을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완전한 생명의 빛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6:35절에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14: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과를 용서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모든 사망과 마귀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버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인류의 유일한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세상에 다른 어느 누구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해준 사람도 없고, 마귀의 영을 받아 미친 소리를 하는 이단사이비에 외에는 이런 일을 해 주겠다고 약속해 준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선생은 명심보감 천명편에서 “順天 者는 存이요, 逆天 者는 亡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계선편에서는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 즉 공자 선생은 자신을 잘 섬기는 사람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흥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면 공자선생 자신이 복이나 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나 화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석가모니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천사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성인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무엇입니까? 나는 깨달은 사람이오. 이것이 바로 그의 이름, 붓다 곧 깨달은 자인 것입니다. 즉 석가는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자신도 단지 한 사람의 깨달은 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너 자신의 등불을 켜고, 너 스스로를 피난처로 삼아라. 다른 곳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는 내가 너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너 스스로 열심히 도를 닦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 유일한 참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구주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죄와 어둠과 무지속에 있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와 의지와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온전히 내려놓고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온전히 안겨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모든 어둠의 세력이 쫓겨 갈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더럽고 추한 것들이 물러갈 것입니다.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있는 그 빛과 같은 은혜가 여러분 속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정오의 빛같이 밝게 빛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생명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과 육과 혼이 윤택하고 생기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빛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기 위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참 빛을 찾았으면 이제는 항상 그 빛에서 결코 멀리 떠나지 말고 그 빛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빛의 따스함과 밝음과 아름다움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그 빛 안에 있어야 합니다. 가까이 머물러야 합니다.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고 온기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기쁨을 누리려면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초상집에 가서 기쁨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잔치집에 가야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초상집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싸움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평화가 가득한 곳에 가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것도 동일합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온전히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위로를 충만히 누리려면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과 가까이서 교제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 나가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 살아갈때에 주님이 내 안에 기쁘게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기쁘시게 거하시게 되면 두말할 나위없이 그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 어떻게 살겠습니까? 물고기가 물을 떠나 땅으로 올라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자동차가 도로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달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오염된 공기가 가득차 있는 곳에 머물러서야 어찌 건강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발이 뜨거운 불덩이를 밟고서야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어둠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절대로 주님을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내 마음 내 생각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 품에 안겨 주님의 생명의 빛으로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약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써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어둠과 질고와 약한 것들을 다 물리치고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빛과 같은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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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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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복된 만남을 위하여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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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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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영광의 면류관을 위하여

 

 


제목 :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말씀 : 고전9:24~27

1.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의 농구 코치 중 꽤 유명한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치 노릇을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못해서 유명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사람이 맡은 팀마다 계속해서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찌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치가 한번은 시합에 임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져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오늘도 이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이겨서 챔피언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코치와 선수들이 비장한 각오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그 게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겼다고요? 미안하지만 또 졌습니다. 그래서 코치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게임을 합니까?” 이때 한 선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실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정신력이나 마음의 자세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과 실력이 딸리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부도 안하고 난 시험을 잘 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다고 시험을 잘 칠 수 있겠습니까? 농구도 안 해본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농구선수들에게 덤벼든다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훈련과 노력과 투자를 통해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덮어놓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없는 등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기도만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건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적 이성적 육체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열심히 노력할 때에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1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끊어버릴 것은 너희가 끊어 버려라. 너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가라. 그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자칫하면 이래서 저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못합니다. 하면서 변명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끊을 것은 내가 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내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힘써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2.귀하고 복된 일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훈련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은 귀한 일에 쓰임 받겠다,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한 삶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나아가 그런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잘 참고 견디며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선하고 귀한 일에 열심도 낼 수 없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며 무사안일 속에 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왜곡된 가치 속에 휩쓸려 다니며 잘못된 길로 가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별볼일없는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하여 가치있고 의미있고 고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그래서 자신도 남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풍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때 부와 명예를 얻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했을 때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주님께 부름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였을 때 사도라고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사도 바울을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씀은 버림받아 천국에 못가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망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천국에 못갈까봐 두려워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충성스럽지 못한 종이 되어 주께서 넌 더 이상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 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그 직분 내놔라. 그러실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런 일을 만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넌 더 이상 쓸모없어. 가치가 없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반대로 당신은 정말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에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어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사람들에 유익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요.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히 쓰임받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그저 자신의 안일함과 물질적 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겠다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싶다는 그런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 받고 귀히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그러면 가장 귀하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복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져야 하는데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25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목적을 두고 썩어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썩지 아니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며 힘써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또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물론 상을 받는 사람이 여럿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같이 달리기를 해도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최선을 다한다고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 목표를 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야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요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나 소망이나 목표가 아닙니다. 무조건 열심히 해서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것이 소망과 목표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소망이고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이 땅에서도 진정한 평안과 은혜와 부요함을 누리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목표를 가지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졌어도 또 그것을 향해서 아무리 힘써 달려갔어도, 그래서 혹시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어도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빈 쭉정이 인생이 되어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거나 혹은 아예 버림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최종적인 목적을 두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을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나아가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다음에는 그 열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일에 열망을 가졌어도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말씀 그대로 나는 지금까지 방향도 없이 달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허공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주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힘써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달리기 선수가 출발 총성을 듣고 힘껏 달려가는데 도착점을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권투 선수가 주먹을 열심히 휘두르는데 계속 허공을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라고 뛰고, 죽어라고 주먹을 휘둘러봐야 말짱 도로아미타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인생의 경주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이나 목적지도 없이 세상 물결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달리기는 달리는데 썩어 없어질 것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헛고생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은 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혹시 사람에 인정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하여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진정하고 영원한 소망도 열망도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어리석은 삶이 되디 않기를 바랍니다. 또 그 귀하고 온전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말고 혹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면서 주저 앉아있지 말고, 주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의 선한 역사에 힘써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즌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 그것은 절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갈 수도 없고, 또 설령 열심히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파리 한마리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꿀단지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핥아먹던 파리는 달콤한 맛에 정신이 팔려 점점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배를 채운 다음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려고 날개를 파닥였지만 날개가 꿀 속에 잠겨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방 한 마리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꿀단지 속에 들어가면 그럴 줄 몰랐더냐? 욕심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나방은 보란 듯이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잠시 후에 이 나방은 파리가 발버둥치고 있는 꿀단지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나방이 환히 빛나는 등불을 향해 날아가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한쪽 날개가 불에 타서 추락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파닥거리는 나방을 보고 파리가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나방아, 불에 가까이가면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네 불장난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결국 파리도 나방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과 유혹이 파리와 나방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좋은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야 하지만 자신을 잘 다스려 유혹과 욕심을 물리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좋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나 정치인도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나 직업인이나 직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잠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일하고 언제 훈련을 하겠습니까? 또 실컷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다음에 진탕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다면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가고 싶은 곳 다가면서 언제 예배드리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언제 헌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설령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밖에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논다면 기껏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25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자신을 잘 다스려 모든 유혹과 욕심과 욕망을 이겨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나쁜 것을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좋은 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일의 노예로 전락하여 영혼과 육신과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음식도 좋은 것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몸을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답시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입니다. 맨날 철야기도 한다고 직장에 가서 졸고 앉아 있다면 이것도 책망 받을 일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올바른 목표와 열망을 가지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끊을 것은 끊고 삼갈 것은 삼가고 피할 것은 피하고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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