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생명의 말씀] 주일오후설교

제 목 : 겸손한 자가 받는 은혜

본 문 : 벧전5:5,6

1.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물론 믿음은 기본이고 믿음과 더불어 가지고 있어야 할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덕목은 무엇이냐하면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쁘고 재력있고 빽좋고 능력있는 사람 좋아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기준이고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이 올바른 사람, 특히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경배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러면 자신도 생명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남에게도 기쁨과 은혜를 주는 복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말 낮은 자세로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이 거대한 우주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저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십시오. 그전에 내 자신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신비합니까? 얼마나 굉장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그 굉장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반면에 내 안에 얼마나 죄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까?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 존칼빈 선생은 “내 안에 들어있는 죄악의 1/100이라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롬3:10-12절에서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렘13:23절에서는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상대적인 선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온전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겸손하게 엎드리지 않고 내가 다 안다고, 내가 의롭다고,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교만하게 자기 생각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기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엎드려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그 은혜로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5절 후반절에서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생각하며, 반면에 우리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낮춥니다.

겸손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약함과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 가보면 예수탄생교회가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약400평 정도 되는데 출입구는 단 하나 뿐이고, 게다가 그 문은 높이가 1.2m, 폭은 80Cm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불리는데 그 교회는 허리를 최대한 굽히고 한 사람씩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구부려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의 이성 경험 지식 명예 권세 자존심 내려 놔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무지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도와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받아주세요. 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만나고, 그렇게 예수님 만나면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4:6절에서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약함과 무지함과 한계와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림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겸손한 사람은 열심히 기도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기도가 뭡니까? 주님과 대화하는 거잖아요. 주님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요구하는 것이잖아요. 또한 주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정말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라고 묻는 거잖아요. 지금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 저는 무지해요. 어리석어요. 저는 약해요. 힘주세요. 능력을 주세요. 분별력을 주세요. 마귀사탄의 유혹을 이길 힘을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국 주님의 도우심이 별로 아쉽지 않다는 거지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거지요. 내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의롭게 살고 있다는 거지요. 선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 얼마나 교만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세요. 우리 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26: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 모든 약함과 무지를 이기고 은혜의 충만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4.겸손한 사람은 말씀을 열심히 배웁니다.

겸손한 사람은 열심히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어찌 배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지혜로우시고 그 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는데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말씀을 열심히 배우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 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생명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무지하고 연약한데 그래서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데 어찌 주님 앞에 엎드려 그 말씀을 경청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이나 문화나 기술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과 능력과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그래야 거짓에 속지 않고, 마귀에게 우롱당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 몸과 영혼과 마음을 지켜 주고, 힘과 평강과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여러분, 열심히 배우십시오. 주님께 배우십시오. 그 말씀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지혜를 얻고 분별력을 얻고 능력을 얻어 그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5.겸손한 사람은 순종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순종하는 것이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냥 따라 가는 것입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그냥 믿는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성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순진하게 주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에도 그냥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침 받으려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이성적으로는 정말로 웃기지도 않는 지시를 따랐을 때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빙빙 돌라는 웃기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따랐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적군 앞에 찬양대를 앞세워 찬양을 했을 때 적군이 전멸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어 밀었을 때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백배 천배 만배 수입억배 더 지혜롭고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사55:8,9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개역성경)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냥 주님 따라 가십시오. 설마 하나님이 우리만 못하시겠습니까? 설마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사정과 형편을 모르시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그냥 따라 가십시오. 거기 생명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순진하게 주님의 지시를 따라 온전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의 은혜 가득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겸손한 사람은 높임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낮추시고 비천하게 하시고 멸시당하고 천대받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높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요,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정말 약하고 부족하고 죄많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지혜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선과 의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안에 거하면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그 안에 거하게 됩니까? 겸손한 자입니다. 교만한 자는 제멋대로 합니다. 제 생각대로 합니다. 제 소견에 좋은 대로 합니다. 그래서 죄의 길로 갑니다. 무지한 길로 갑니다. 그래서 결국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분별력을 갖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를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습니다. 그래 존경 받고 그래서 높아집니다. 그래서 진정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3: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오늘 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의 죄와 무지와 한계와 연약함과 부족함고 미련함을 기억하며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 분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며 기도하며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
반응형

주일오후예배설교 /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

 

 

 

제목 :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

말씀 : 슥5:1-4

1.두루마리 환상의 개요

오늘 말씀은 스가랴 선지자가 본 여덟가지 환상 중 여섯 번째로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에 관한 말씀이다. 앞에서 본 다섯가지 환상들은 모두 소망과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관한 내용이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총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 환상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되어 심판과 저주가 선언된다. ⑥두루마리 환상 ⑦에바속에 있는 여인의 환상 ⑧네 병거의 환상이 그것이다. 두루마리 환상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이고, 에바속에 앉은 여인은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악인은 결국 결박되어 쫓겨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네 병거의 이상은 이 땅을 심판하러 온 하나님의 사자들을 상징한다.

두루마리 환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커다란 두루마리가 공중을 날아가는 환상이다.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양피지로 길이가 무려 20규빗(약9m)이고 넓이가 십규빗(약5m)나 되는 아주 커다란 것이었다. 그 큰 두루마리가 완전히 펼쳐져서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이다. 이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의미를 알려주시는데 이 두루마리는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의 말씀대로 모든 인류가 심판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성경에는 분명히 놀라운 생명과 은혜와 소망과 축복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소망과 축복을 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동시에 저주와 심판과 형벌에 관한 말씀들도 기록되어 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성경에 기록된대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고, 불신과 악에 묻혀 사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믿음과 의가운데 사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불신과 죄가운데 사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사랑의 하나님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도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하며 할아버지가 손자를 귀여워 해주면 버릇이 없어져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 뜯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도 경외심도 없이 제멋대로 살아가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말씀에 거역하기 쉽게 되고, 쉽사리 죄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그러면 순종이 나오고 성결한 삶이 나오고 사명을 감당하게 되고 은혜풍성한 삶이 전개되는 것이다.

창22:12절을 보라.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순종하는 것으로 경외하는 줄 알았다. 즉 경외하며 순종하고, 순종하면 인정받고 축복받고 은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늘 기억하며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가운데 주신 역할도 잘 감당하여 구원받고 은혜받고 축복받는 삶을 살아가자.

2.두루마리 환상의 구체적 의미

1)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 받는다.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과 저주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대로 구원받고 축복받고 은혜를 받는다. 동시에 이 말씀대로 심판을 받는다. 오늘 3절을 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고 하셨다. 즉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다.

구원과 심판의 근거는 무엇인가? 축복과 저주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말씀이다. 어떤 인간적인 인격이나 지식이나 교양이나 선이나 규범이나 도덕이나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구원받고 상급받고 축복을 받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 아무리 잘나고 선하고 그럴듯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면 심판받는다.

그러므로 오직 말씀대로 믿고 따르라. 세상에서 무슨 헛소리를 한다해도 거기에 휘둘리지 말라. 착하게 살면 된다느니 아무거나 잘 믿으면 된다느니 그저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된다느니 하는 그럴듯한 거짓말에 속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슴, 생명의 말씀따라 살아가라.

2)하나님의 심판은 그 무엇도 피할 수 없다.

이 두루마리는 하늘을 날아다녔다.(1절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러면서 3절에 보면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 두루마리가 날아다닌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아무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날아다닌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고 가두어 둘 수도 없다는 뜻인 것이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어느 지역, 어느 시간, 어느 인종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을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거부한다고 나와 관계없는 것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어느 누구도 성경을 피해 갈 수 없다. 오직 성경대로 심판을 받을 뿐이다. 도망가도 소용없다. 멀리가도 소용없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과학으로도 막을 수 없다. 미국으로 도망가고 소용없고 러시아로 도망가도 소용없다. 모른다고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없다. 대들어도 소용없고 따져도 소용없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멀리한다. 마치 성경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줄로 여기며 살아간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성경을 피해갈 수 없다. 세계만민들이 오직 모든 심판의 근거인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선언되는 것이요, 불신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기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선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 말씀을 멀리하지 말고 거부하지는 더더구나 말고 오직 겸손하게 엎드려 바르게 알고 믿고 따름으로 축복을 선언받고 은혜가운데 살아가자.

3)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영역에서 너무나 분명히 이루어진다. 시간적 공간적 윤리적 도덕적 영적 물질적 모든 영역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4절을 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인류의 대표적인 두가지 죄악이 거론된다. 첫째는 도적이요, 두 번째는 망령되이 맹세하는 죄이다. 도적이란 윤리적인 죄의 대표적인 죄를 말한다. 도적이란 인간의 내부속에 들어있는 탐심과 시기와 질투에 의하여 노력은 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며 남의 것을 훔쳐오는 것이다. 결국 도적에게는 인간의 모든 죄성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탐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고 아픔과 고통을 주는 행위이다. 폭력과 사기와 뇌물과 전쟁과 모든 거짓된 행동이 이런 마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한다는 것은 영적인 죄에 대한 말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지킬 마음도 없고 그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며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시하며 맹세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께 경솔하게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당연히 자신이 할 수 있는 하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약속을 지키고 나아가 말씀대로 살아야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면 어찌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니 주신 명령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성결하게 살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모든 윤리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도 버리라. 하나님을 결코 경홀히 여기지 말고 경외하며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라.

4)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준엄하게 이루어진다.

4절을 다시 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모든 윤리적, 영적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 심판의 정도는 너무나 준엄하다. 죄가운데 사는 집에 들어가 그 집의 나무와 돌을 사른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얼마나 혹독한지 돌마져 사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도 없고, 그 심판에서 살아남을 자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누가 그 심판을 피하겠는가? 그 심판의 불앞에 견뎌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무것도 누구도 없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금덩어리도 초호화판 저택도 다 불살라진다. 심지어는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사라지고 지구도 별들도 태양도 다 녹아 내린다.

벧후3:10절을 보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마지막 주님이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하실 때는 이 지구를 비롯해서 해와 달과 별과 우주의 모든 것이 불에 녹듯 사라진다는 말씀이다. 그 하나님의 심판을 불을 피할 자가 과연 누가 있겠는가? 무엇으로 막으며, 어디에 피할 공간이 있겠는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임과 동시에 심판의 말씀, 경고의 말씀이기도하는 것을 명심하자.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자. 오직 말씀만이 심판의 잣대임을 기억하고 말씀에 순종하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되 절대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지 말고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
반응형

[ 주일오후설교 ] 가장 안전한 길

 

 


제목 : 가장 안전한 길

말씀 : 잠3:5,6


사람이란 어차피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젊음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여하튼 나는 그냥 내 존재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어떤 참람한 사람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미련한 중에 미련한 인생이요, 불쌍한 중에 불쌍한 인생이다. 그까짓 주먹이 세면 얼마나 셀까? 오래가면 얼마나 오래갈까?

대통령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라야 고작해야 5년인데 5년 임기가 끝남과 함께 그가 의지하는 것도 사라진다. 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돈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돈과 함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지식이나 명예와 권세나 과학이나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다. 가장 큰 능력 자, 가장 지혜로운 자, 가장 사랑이 충만한 자, 가장 인자한 자, 가장 영원한 자 이런 자를 의지해야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가 누구일까? 물어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1.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

오늘 5절 말씀을 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네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요, 가장 복된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인가?

1)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依賴하여야 한다.

본문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방법론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이 마음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란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좀 풀어 말한다면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중심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 어느 한 영역이라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감정,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이성, 우리의 육체, 우리의 능력 등 하여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분을 총동원하여 그 어느 부분이라고 빠짐이 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떤 영역을 남겨놓고 어떤 부분은 맡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하면 이것은 무언가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는 온전한 믿음의 관계속에 있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런 오류속에 살때가 많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감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적인 것과 이성적인 부분을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긴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은 아무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과 시대의 흐름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그야말로 갓난아기가 하나님만 졸졸 따라 다니는 것 같이 우리의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자.

2)人間에 대한 信賴를 버려야 한다.

오늘 본문의 5절 말씀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너무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마6: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지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자기지식이나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의지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그것을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다.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다. 하나님은 권능자이시지만 인간은 약하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둘 중에 무엇을 따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해야한다. 그래야만이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래야 만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도 깊이 되새기며 나보다는 하나님 편을 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3)凡事에 하나님을 認定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했다. 이 말씀도 정말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정말 깊이 묵상해보자.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중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범사라는 말에 주목해 보라. 과연 범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말을 따르는가?

여기서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이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걸어가야 할 모든 길, 인생항로의 전체, 인생길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하였는데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안다면 그 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안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정말 이해하는가? 이 사실을 정말 아는가? 정말 인정하는가? 그러면 맡기라. 정말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깨닫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자. 어떤 부분은 인정하고 어떤 부분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자.

범사라는 말을 다시한번 주목하라.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우리는 범사에 그를 올바르게 알고 오직 그 뜻만을 좇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씀만이 유일한 잣대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2.하나님을 依賴하는 자가 받는 福

그래서 오늘 본문 6절 하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다.

여기서 지도하다는 말은 「평탄하게 하다, 곧게하다, 똑바르게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혜, 능력, 경험, 이성 의지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셔서 평탄케해 주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모든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것들을 평탄하게 하셔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의 현실들을 이기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똑바르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시다. 전지자이시다. 사랑과 능력의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신다. 그 분만이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완전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자.

우리의 알량한 명철도 의지하지 말라. 경험도 의지하지 말라. 지식도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한 것들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라. 주님을 의지하되 마음을 다하여 의지하라. 전인격을 다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그리하여 선한 목자되시는 주님의 지도하심가운데 은혜와 평강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
반응형

[주일오후설교] 포기와 행복

 

 

 

말씀 : 마5:1-12

제목 : 행복과 포기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부딪치는 문제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있으나 막상 교회에 가려고 해도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희생해야 부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일종의 취미생활이나 계모임 혹은 인격수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투자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얻는 것에 비하여 잃는 것이 너무 많다고 여겨져 잘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은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갖는 생각인지 모른다. 처음에야 어차피 영적인 생명의 진리,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알지 못하고 있음으로 단순히 인격수양이나 혹은 질병의 고침이나 혹은 마음의 위안 등등의 목적으로 나오기가 십중팔구인데 그것을 위한 투자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솔직히 나도 그랬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전에는 취미생활로 서예와 바둑을 주로 했었다. 이 취미생활은 둘 다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서예를 처음 배울 때는 먹 갈기를 배우고, 그 다음에는 수직 긋기와 수평 긋기, 사선 긋기 등을 수없이 반복하는데 그냥 쭉쭉 긋는 것이 아니다. 붓 끝에 힘이 들어가야 힘 있는 글씨가 되기 때문에 붓 끝에 힘을 실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먹을 갈고, 줄긋기 연습하고 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물론 모방이다. 남의 글씨를 계속 반복해서 쓰는 것이다. 한 글자를 제법 비슷하게 흉내를 내려면 천 번을 써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만번을 쓰면 그 글씨에 통달하여 자신의 글씨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엄청난 시간과 정열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서예이다.

바둑도 그렇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도 있듯이 바둑을 두다보면 지면 열이 받아서 또 두어야 하고, 이기면 기분이 좋아서 또 두게 되고 그러다보면 서너 시간은 언제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밥 먹으러 빨리 안온다고 잔소리도 제법 들었다. 또 낚시도 제법 다녔고, 볼링도 좀 쳤다.

그래서 이러한 취미생활을 즐기다보면 신앙생활을 잘하기가 어렵다. 때로는 교회가 너무 사람을 옭아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평안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도리어 속박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헌금 생활도 그렇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다. 회사생활하면서 십일조, 감사헌금, 기타 다른 헌금 계산해 보면 그것을 계속해서 적금을 붓는다면 노후대책이 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 먼저 들어 올바른 헌금생활 시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사실은 처음 믿음 생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갈등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교회에 다니려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쉽지 않다고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일까?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그것은 더 좋고, 더 유익하고, 더 기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인간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더 좋고 더 기쁘고 더 즐겁고 더 평안하고 더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확실하고, 유일한 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생활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많고 구속당해야 할 것도 많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세상 살다보면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즐기고 싶은 일도 많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입고 싶은 것도 많다. 이것 저것 눈치보지 않고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런데 사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러한 생활가운데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아마도 남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술, 담배의 문제일 것이다. 지금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좀 바뀌어 있지만 옛날에는 술 담배를 못하면 사회생활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가 술 담배를 못하면 사람이 째째해지고 좁쌀 영감처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화투놀이도 그렇다. 일반인들 사이에 화투놀이로 재미거리를 삼는 사람도 많다.

회사에 다닐때도 끄떡하면 회식이다, 무슨 경조사다 하여 회사 동료들이 모일 기회가 많았고, 모였다하면 의례히 술⋅담배와 함께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또 어느 곳에 모여 앉아서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처음에 남자들이 교회에 올 때 많이 느끼는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 재미로 살았는데 그런 것 다 포기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는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낙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런 낙을 포기하면 도대체 인생의 낙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취미생활이 아니더라도 아까 말했다시피 바둑이나 서예나 낚시나 등산, 가족 나들이 등등의 건전한 취미 생활도 그렇다. 사실 신앙생활하다보면 이런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신앙생활하지 않을 때는 주일날을 잡아 등산도 가고 낚시도 가고 가족간에 나들이도 가고 마음놓고 앉아서 바둑도 두고 글씨도 쓰고 하는데 주일날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면 도대체 내 생활은 언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좀더 넓고 높은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좀더 나은 것을 위한, 좀더 가치있는 것을 위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위한 가장 현명한 투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그것이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고, 보람있고,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라면 당연히 거기에 투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보라. 우리는 분명 무언가 나은 것을 위하여 투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도둑질이나 강도짓이나 간음이나 이런 적극적인 악을 행하는 사람도 무언가 나름대로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쨌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무언가 자신에게 유익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해가 되고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될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잠시잠깐이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유익한 것들도 그렇다. 진정 가치있는 것은 무언가 희생과 투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농사도 그렇다.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는 봄부터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제거해주고, 거름과 물을 주고, 병충해를 방제해주면서 뙤약볕 아래서 많은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야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 다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못먹고 열심히 힘써야 하는 것이다.

박사도 그렇다. 정말 제대로 된 박사노릇하려면 정말 힘들다. 심지어는 가정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벌 사장도 그렇다. 물론 호의호식하며 대접받으며 사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직장의 중역만되어도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어 버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수많은 투자와 인내와 자기포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치가 높으면 높은 만큼 더 많은 투자와 더 많은 자기포기와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다면 신앙생활은 어떨까? 물론 동일하다. 신앙생활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어서 보다 행복하게 보다 기쁘게 보다 소망가운데 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익하고 좋은 것을 위해서 무언가를 투자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위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앙생활의 유익은 세상에서 얻는 다른 어떤 유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돈과도 명예와도 권력과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유익을 준다. 기쁨을 준다. 은혜를 준다. 생명의 풍성함을 준다.

그러므로 사실상 잃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다 더 좋은 것을 위하여 보다 덜 좋은 것은 당연히 포기함이 현명한 일이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치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12:24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져 썩으면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희생당하여 없어지는 것 같지만 더 많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원문의 의미는 「재산을 상실하고 불행속에서 방황하는 거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이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래서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엎드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 것 이것저것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인데 왜냐? 이런 사람은 세상의 것 대신에 천국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잃어버린 대신에 더 나은 천국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정말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4절도 그렇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무슨 말씀인가?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죄와 부족함과 미련함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 진정한 위로가 그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안식과 위로와 소망이 그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10절에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때로는 핍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복된 사람인데 왜냐, 바로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역설의 진리다. 진정 세상 것 욕심 부리지 않고 오직 진리 때문에, 생명의 역사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을 받는 자 그 사람이 부유하고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 천국을 소유하게 되니까,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저 천국에 가서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14:27에서 또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수없이 자기부인과 포기와 희생을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말씀들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고통스럽게 어렵게 무엇인가에 얽매어서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평안을 주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또 요8:32에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누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너무 잃는 것이 많지 않느냐고 묻거든 그것은 더 나은, 더 보람있는, 더 가치있는, 더 자유로운, 더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현명하고도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사실을 말해주자.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바르게 알자. 정말이다. 신앙생활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구속이 아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물론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다. 진정한 평안을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해서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포기해야 할 부분은 포기하고 드려야 할 것은 드리고 헌신해야 할 부분은 헌신하면서 그 안에서 정말이지 세상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
반응형

[주일오후설교] 지혜의 유익

 

 


제목 : 지혜의 유익

말씀 : 잠3:21-26

여러분, 세상에서 정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이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유일한 방법인 이 믿음보다 귀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아무 것도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아무것도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는 없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같이 본바와 같이 15절의 말씀에 보면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혜 즉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그 일이 진주를 갖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지혜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는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고 사모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정말 이 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이것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말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올바른 가치관이나 생각을 가지지 못한 정신 이상자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이 지혜의 유익과 지혜의 가치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는 16절에서 지혜는 장수와 부귀를 준다고 하였고, 또 17절에서는 지혜는 즐거움과 평강을 준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18절에서는 지혜는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지혜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다. 장수와 부귀, 즐거움과 평강, 영생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이상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지혜를 가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더나아가서는 그 지혜를 따라 살라야 한다. 공연히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이나 목표나 방향을 가지고 살것이 아니다. 우리의 방향, 우리의 가치, 우리의 목표는 하나다. 기준은 오직 지혜이다. 하나님안에 있는 지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다. 그것을 따라 살면 반드시 영과 육이 은혜를 받는 풍성함을 누린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역시 계속해서 이 천하보다 귀한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지혜를 얻으려면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의 유익을 말하기전에 먼저 지혜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으면 참 평안과 기쁨이 있을 것인데, 영과 육이 풍성함을 누릴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말씀을 읽고 묵상해야한다.(21절)

오늘 본문 21절 뒷부분에 보면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항상 우리 눈앞에 말씀이 있게 하라는 이야기다. 눈앞에 성경말씀이 있게 하라는 것은 물론 성경책을 눈앞에 놔두고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는 이야기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를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물론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판사가 되려면 헌법,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등의 법 서적을 부지런히 읽어야한다. 의사가 되려면 의학서적을 눈앞에 놓고 살아야 한다. 영어를 잘하려면 늘 영어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소설을 잘 쓰려면 늘 소설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한다. 생명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생명의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말할것도 없이 성경은 최대의 지혜서이다. 성경은 유일하게 생명의 구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성경은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지혜를 얻고, 생명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을 알게된다. 그래서 최대의 지혜를 소유한 사람, 생명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밤낮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 가장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2:1-3) 왜? 성경에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기쁨과 은혜의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진리의 길이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열매를 맺게 되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라. 묵상하라. 농촌에서 솔직히 농번기에는 읽기가 힘들다. 그러면 겨울철에 1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한번 시작해 보시라. 그리고 모든 공적인 예배에도 부지런히 참석하라.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심비에 새기라.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적용시키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풍성한 삶을 산다. 은혜의 삶을 산다. 반드시 복된 사람이 된다.

2)지혜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21절 전반절에 보면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삶속에서 적용시키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읽는 사람은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다. 도전을 받는다. 새로운 용기가 솟아난다. 그것을 따라서 살게 될 유익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 분명히 보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결단이 생긴다. 그래서 실행하게 된다. 실행하면 은혜가 온다. 은혜가 오면 더욱 신이나서 말씀안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는 자들은 반드시 복있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정말 복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바로 말씀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읽으며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읽으라. 묵상하라.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여 은혜를 받으라.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게 된다.

2.지혜를 얻는 자의 유익

지혜를 얻은 자의 유익은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가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도 또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왜 자꾸만 강조할까? 물론 먼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렇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강조할 리가 없다.

그리고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또 하나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을 잘 안듣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두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한번 말하면 그만이다. 우리 자녀들이 한번 말하면 알아서 하면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이 안되면 했던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자꾸만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중요해서 말을 해도 잘 시행이 안되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은 성경에서 강조해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다. 귀를 기울였으면 이제는 실제로 그 말씀안에서 살자. 그럼 정말 지혜자가 된다. 복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또 강조하고 있다.

1)생명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18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18절 전반절에서는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늘은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라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좀 다르지만 의미는 똑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은 자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예수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즉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거기서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의 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이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오직 성경안에만 생명의 도가 있다. 진리의 길이 있다. 영생복락의 길이 있다. 구원의 길이 있다. 물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때에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또 요20:31에서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하고 믿게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까이 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영생복락을 누린다. 복의 길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길도 아니다. 다만 믿고 따르면 된다. 말씀을 하나님을 주님을 가까이 하면 된다.

2)아름다움과 은총을 누린다.

본문 22절 하반절에 보면 “네 목에 장식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장식이란 「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그것을 지켜 살면 은혜와 은총과 아름다움속에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아름다워 진다. 그 말이 아름답다. 그 인격이 향기로워 진다. 그 마음이 넉넉해진다. 정말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워진다. 심령의 평안함을 누린다. 모든 추하고 더럽고 허물많던 모습들이 사라진다. 모든 이기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욕심과 저주가 사라진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너그러워진다. 왜 진리와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님이 인도해주시니까. 성령님이 나를 이끌어가니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가장 은혜로운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외양이 아니다. 능력도 아니다. 지식도 아니다. 권세도 아니다. 부귀도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맑고 깨끗한 영혼이다. 가식도 미움도 증오도 질투도 거짓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마음이며 그러한 아름다운 마음들이 밖으로 표출될 때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갓난아기가 아름다운 것은 왜인가? 그야말로 어둠의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다. 미움도 증오도 없다. 순수하다. 깨끗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사는 자는 바로 이런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살아가면 성령이 역사하신다. 말씀이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속에 찌꺼기를 제거해 주신다. 태워주신다.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없이 해 주신다. 그러면 그 영혼이 투명해진다. 정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은혜를 누려보지 않으려는가?

3)평안을 누리게 된다.(23-25)

오늘 23, 24절에서는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안에서 진리안에서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고,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밤에 잠자리에 누울때에도 아무 근심걱정이 없어서 평안히 잠잘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근심걱정이 없다는 이야기다. 근심 걱정 불안 공포 미움 증오 욕심이 있으면 잠이 잘 안온다. 잠이 잘 안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형이 깨졌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무엇인가 평안의 상태에 문제가 생기면 잠이 잘 안오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도 별로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주신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평강을 주신다. 그래서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육체적인 것이든 세상의 조건과 무관한 평강을 채워주셔서 모든 근심 걱정 물리쳐 주시고 잠자리도 평안케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 127:2에서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믿고 따르는 자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소망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이나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25,26절에 보면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이다.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아니라 설령 우리가 넘어질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넘어지 않게 하심으로 평강을 누리고 설령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것을 이기게 함으로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는 멸망의 순간에도, 급작스런 위기의 순간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 역사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기에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앞에서도 겁 낼 필요도 없고,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정녕 나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기만 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순탄하며 순탄한대로 풍파가 있으면 풍파가 있는대로, 살면 사는대로 죽으면 죽는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요14:27에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빌4:6,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을 정리한다.

여러분, 근심하지 마시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도 말라. 다만 주님을 믿으라. 말씀을 묵상하라. 기도하라. 맡기라. 다만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따르라. 그러면 반드시 주님이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그러면 은혜를 누린다. 평강을 누린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우리 온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며 오직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좇아 살때에 진정 지혜로운자로써 주님의 평강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를 바란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