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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아펜셀라의 인천상륙과 의료사업-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The Hartgard Inter Seminaryconvention)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처음에는 일본에가려고희망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려고 했던 친우인 워드윌쓰(J.S.Wodaswoth)가 모친의중병으로 국내에 남아있을 사정이 되어 그를 대신하여 한국행을결심하게된 것이다.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동경에 들려 선배 선교사인 매클레이 목사를 만났으며 3월 5일에는 뜻깊은 선교예배를 올렸다. 이때 매클레이 목사는 시편 121편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는 구저를 읽고바울이 선교사업을 위해 맡은 일터로 떠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면서 한국을 향하여 선교사들의 장도를 격려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H.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매클레이 감리사의 의견이 [여러사람이 함께 한국에 들어가면 의심을받을염려가 있으니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아펜셀라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와 함께 일본 나가사끼를 떠났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한국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남해안과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드디어 인천에 도달하였다.

 

얼마나 한국행을 갈망하였던지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땅위에 엎드려먼저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을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빛과 자유를 베풀어주시옵소서] (R.S.Maclay,Comen cementof the Korea MethodistEpiscopal Mission,The Gospelin All Lands for 1885,P,328) 아펜셀라 목사는 선교회에 보내는 보고문 가운데 위의기도문을 실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상륙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내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 (Harry A.Rh-odes,The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P 78)라고 아펜셀라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는 함께 한국을 찾아왔으나 한국내의 실정은아직까지 외국인 여자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펜셀라 목사는 부득이 부인을데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언더우드목사만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포오크 (George C.F-oulk)가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서울에서양인 여자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사정인고로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가 있다가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펜셀라는 인천에 도착한지 9일만인 4월 13일에 부인과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 다음날인 4월 18일청국의 대표 이홍장 과 일본 대표 이또오가 중국에서 텐진조약을 체결하여우리나라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때에는 여둑으로 건강을상한 부인의 치료로 아펜셀라목사의 한국 입국은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가서야 아펜셀라 목사는인천에 또한번 상륙하였고 서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천주교에서 한국에 선교하면서는 한국 고대의 전통 의식이나 문화양식을고려하지 않고 거의 독단적인 선교방법으로 강행하다가 오해와 박해와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선 매사에 극히조심스럽게 태도를 취하였고 최대한으로 충돌을 회피하면서 한국민의 호감을 사고 선교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그러기위하여 우선 의사를 보냈다. 이들은 육신의 병을 고쳐주어 친밀감을 느끼게 하였고 한국인의 신임을 얻으면서 복음을 전달할 기회를 포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도 난관과 애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의사들의 시기와 멸시가있었고 환자들의 오해와 불평이 뒤따랐다. 선교본부로부터의 후원의빈약과때로는 선교의 의사들 사이에서 선교방법과 의견의 불일치로 어 려움을 격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것들이 바야흐로 열린 선교의 문호를 닫지는못하였다. 개척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한국민에게 과학문명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한국선교의 본격적 사업을 위한 시발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선교사에 의한 의료사업은 네가지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로 외국의영사관 직원들과 거류민을 위하여 치료를 베풀었고 다음은 국왕과왕실을포함한 한국민들을 치료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셋째로는 정부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 관리해야 했으며 그리고 넷째로는의학 교육을 베풀어 의사를 양성하는 일까지 담당해야 했다.

광헤원은 정부 소속의 병원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 선교회와의 합작운영이었던 관계로, 육의 병을 고치면서도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 영장이었다고 보아 당연하다 하겠다.

 

알렌은 원장겸 의사의 책임을 맡고 바쁜 일과를 보냈다. 그는 일반 환자를 위하여 분주하였지만 왕실을 위하여 더 분주했다. 국왕의 시의가 된 그를 위하여 참판이라는 벼슬이 1885년 7월 19일에 내렸다. 알렌은벼슬을 받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국왕의 시의는 절대로 놀고먹는 직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엄하게책임을 추궁당해야했고 한의사들의 시기를 참아야 했다. 입시 하나는명령은밤 12시가 지나 더 늦게도 있었고, 그런 명령이 올 때에는 요란스럽게 가마를 보내와서 왕명이라는 고함 소리에 모두가 잠을 깨곤하였다. 더욱이 이나라의 관습은 정장하지 않고서는 국왕을 알현하지 못하는 법이 있어 반드시예복을 입고 입궐해야 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H.N.Allen, Things Korean,PP,193-195)

 

병원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알렌 혼자서는 도저히 외래환자를 치료할수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졌다. 알렌은 불원내한하여 동료가 되어줄 혜론(gohn W.Heron,)의사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스크랜튼(W.B.Sc-ranton)의사가 먼저 들어와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혜론 의사도 그뒤에도래하여병원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스크랜튼은 1885년 6월에 병원을사퇴하였고, 알렌은 1887년에 원장을 혜론에게 넘겨주고, 한국정부가 박정양을 미국에 초대 공사로 파견할 때 참찬관의 직을 받고 그를 수행하여 갔다. 그러나 알렌은 1889년에 다시 병원사업의 임무를 맡아 제중원의 원장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복음선교에 앞선 의료사업의 개시와 활동은 한국인들의 육의생명을 건지는데 공헌했을 뿐만아니라.그 마음을 사게하여 한국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금압정책을 완화케 하는데 결정적 효과를 올렸으며 전도의 길을 널리 개방하는데 크게 도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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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소명-

 

 

 

1884년 봄에 의사 헤론(John H.Her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일본 에서 때를 기다리게 하였고, 9월에는 중국에 파송되어 있던 알렌(Alle- n) 을 한국으로 옮겨 일하게한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그동안의한 국 선교에 대한 신중정책을 전환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의 정세가 호전된 점 도 있었겠지만, 직접적으로 언더우드(H.G,Under wood)목사와 같은 인물 이 선교사를 지원 한국행을 희망하여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을 찾게된 동기와 사정을 회상한 내용을 살표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 자들을 모아놓고 은사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 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에도불 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 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따 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 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 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 이 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문은 닫혀있는것 같았다. 나는 두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행 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이제 나에게는 본 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밖에 없는것 같았다. 나는이 렇게 머뭇거리는 상태에서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나는 이 청빙에 응하기로 하여 수락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 였다. 그 순간에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Not one for Korea)한국은 어찌할 터인가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 어왔다. 이때 나는 나도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 고 단숨에 중앙통에 있는 선교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수석서기인 엘린 우드(F.F.Ellin wood)를 만났다. 몇칠후 그에게서 받은 기별은 다음 회 의에서 내가 선교사로 일명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L.George Paik,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PP.100 101)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는 종래의 배외정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 는 확정을 하였고,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 교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미 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그가 일본으로 먼저 가게된 이유는 일본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기도 하고 또한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여 만반의 선교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었 으며, 혹 여의치아니하여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때 에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수 있게될 시기까지 일본에서 영어 학교 사업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동안 선배 선교사인 헤본(James C.H 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루미스목 사는 언더우드에 대하여 [그는 한국을 위한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 다. (The Foreign Missionary,Vol.44,No,1,P,34)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풍 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고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나라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 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손 에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 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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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옵페르트 남연군 묘소 도굴사건-

 

 

 

옵페르트(E.Gacob Oppert)라고 하는 유대계 독일인이 1854년부터 중국 상하이 체재하고 있었다. 그는 동양 여러나라를 여행하는 중, 중국과일 본 사이에 위치한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쇄국하고 있음에 이상한 흥미를 느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호를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866년 3월경 대원군의 박해가 한창 진해되고 있을 때 충청 도 가로림만을 다녀간 일이 있었고, 7월 10일에는 강화도 교동도를 찾 아와 무역 거래를 건의하였으나 실패하고 되돌아가 기도 했다. 옵페르트가 두번에 걸쳐 통상에 실패하여 낙심한 중에 있을 무렵,한국 주재 신부였던 페론(Feron)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옵페르트는 그와의대 화를 통하여 제3차 한국 탐방여행을 계획하였다. 그는 기선을 대절하여 대포 수문을 장비하고 페론 신부를 위시하여 8명 의 서양인과 한국 천주교인 최선인과 중국인 승무원 약 1백명을 태우고 1868년 4월 30일 중국 상하이를 출범하였다.그들은 5월 9일 아산만 행담 도에 도착했으며 8년간이나 이 지방 포교에 종사하여 지리를 잘 알고 있 는 페론신부의 지시를 받으면서 덕산이란 곳에 상륙하였다.

 

옵페르트 일행은 산길과 밭고랑을 더듬어가며 가야동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분묘가 있었다. 옵페르트 일행은 계 획했던 대로 도굴작업에 착수하였다. 급보에 접한 충청감사가 군인을 보 내 습격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작업을 포기하고 돌아간 뒤였다. 옵페르트 는 북상하여 영도도에 이르러 개국 통상의 교섭을 또 다시 제의하였다. 실제로 옵페르트는 도굴로 아무것도 소득한 것이 없었으며 또 그러한 행 위는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보복이라고 해명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말 이 조선정부에게 통할 까닭이 없었다. 옵페르트는 아무 성과없이 상하이 로 되돌아가야 했다. 당시 상하이 거류민 외국인들 사이에는 이 분묘 도굴사건에 대하여 풍 문이 널리 퍼져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화제로 등장하였다. 특히 옵페 르트의 도굴 계획의 목표가 어디에 있었던 지간에, 그가 분묘 안의 부장 품을 입수하여 대원군에 대해 보상금을 강요함으로 일확천금을 꿈꾼 해 적의 행위이었던가, 또는 그 부장품을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한국 천주교 의 신앙 자유 조건으로 한국 천주교의 신앙 자유 또는 통상의 약속을 대 원군으로부터 받아내려고 한 책략이었던 것인가. 하는 등등의 추측으로 자자하게 나돌았다.

 

이에 대하여 페론 신부가 한 말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대원군은 지 극히 미신적인 기질의 소유자로서 조상의 유물 확보가 섭정 자신과 가족 의 행운을 보장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고로 한국인 교도들이하는 말이 그의 조상의 유물만 점유하면, 대원군은 이 유물을 회구하기 위하 여 모든 일의 타협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Ernst Oppert;A F0 orbidden Land, London,1880) 그렇지만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별세 할 당시의 가세는 매우 가난하여 분묘 안에 부장품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도둘의 동기야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그 행동에 있어서 동양 고래의 조 상의 모시는 전통적 윤리를 파괴한 사실 그것만을 가지고도 지탄받기에 충분하다 하겠거니와, 그것이 국왕의 조부의 무덤이었다고 하는데 더할 나위없는 범죄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인 신부가 이러한 행 동을 안내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로도 변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은둔의 나라 한국](THE Hermit Nation,Korea)의 저자인 그리피스(W.E,G riffis)는 이를 [국제적 사체 도굴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여튼 이 사건은 서양인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켰으며 더욱이 종교의 선포를 사명으 로 하는 선교사가 가담한데 대하여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대원군을 비롯하여 한국의 조야는 이 이일을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분노 와 적대를 더욱 노골화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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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제1부 한국개신교와서양종교와의 접촉

 

 


제 1부 한국개신교 전래 이전 서양종교와의 접촉

 

한국이 서양문화와 언제 접촉하였으며 언제 서방에 알려졌는가는 많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이다. 특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계 역사의 큰 흐름에 한국이 등장한 시기에 대한 고찰은 세계사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고 바른 역사관을 갖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방 문화와의 접촉은 서양 종교와의 접촉과 결코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한국기독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을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1627년과1653년 표류로 인한 박연과 하멜의 입국, 그리고 1826년 머리 맥스웰 대령과 바실 홀 대력의 서해안 탐사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들 사건들은 종교사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스페데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종국 신부로 내한하고, 일본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 상당수의 예수회 신자가 생겨나면서 지극히 세속적인 임진왜란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제공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연과 하멜의 입국과 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 역시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서양문화, 종교와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갑작스런 배의 난파로 조선에 입국했다 돌아간 하멜이 출간한 표류기, 서해안 탐사를 위해 입국했다 돌아가 맥스웰과 훌이 출간한 조선 항해기는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비록 공식적인 선교사 입국 이전에 있었던 이와 같은 복음의 접촉은 직접적인 선교의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복음 전래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였다.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복음이 전래되기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조선에 복음 전파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동양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서양종교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를 통해서였다. 일찍이 예수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1601년부터 중국 북경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며 중국 정부와 민중으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던 이탈리아 귀족출신 마테오 리치 였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해 1601년 북경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8년 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던 마테오 리치가 이와 같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서양 과학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데다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동양문화와 민족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문화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유교의 경전 시경과 서경에 있는 천제와 천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주와 동질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기독교와 유교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 정부와 북경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마테오 리치의 작품 다수가 중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중 일부가 중국북경에 파송된 조선국왕의 사절인 부연사를 통해 조선에 입수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단순히 신앙만 전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도 함께 소개했기 때문에 북경주재 신부들로부터 부연사 일행은 천문, 지리, 역법 같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후 세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이 처음으로 서양 과학과 천주실의를 조선에 소개하고 1625년 인조 3년에 국왕에게 경제 개혁을 통한 국가 재건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1575년에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이 북경에서 세계지도와 게십이장을 가지고 돌아와 연구하고 실천에 옮긴 적이 있다. 1631년 부연사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파송된 사절 중의 “한 사람인 정두원이 과학 서적, 서양의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비롯한 서양 풍속, 지리, 천문학에 관한 서적들과 함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 후, 한 세기 동안 서학은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는 하나의 학문으로 조선 지식인의 사상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조시대에 서학은 전성시대를 맞았다. 특히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는 남인계 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서학은 조선에서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은 서학을 대변하면서 주자학 주도의 조선 사상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서양사상은 동양의 유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또한 종교나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학문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금기시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학에 대한 관심은 공리공론만 일삼는 주자학과는 달리 근대지향적인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것은 실학운동을 태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지원, 홍대용, 홍양호, 박제가, 이덕무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은 매년 3,4차례씩 파견되는 부연사의 일행에 끼여 북경를 방문하여 천주교 성당을 찾아 서양 신부와 교제하는 기회를 갖고 이들을 통해 서양 과학의 지식을 배우는 한편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100년 이상이나 계속해왔다. 따라서 천주교는 이와 같은 남인계 실학자들을 토해 서학, 천주학, 천학, 양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 뚜렷한 한 부류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북경을 통해 전래된 후부터 불란서와의 조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을 때까지의 조선천주교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국내의 수용과정에서 조선천주교는 처음부터 종교로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서학이라는 학문의 한 조류로서 수용되어 오다 천주학을 거쳐 천주교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 천주교가 선교사가 한 명도 없는 가운데서도 조선에 소개되고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그것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의 양반계층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되었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초대교회 때 기독교가 유대교의 보호를 받으며 저변 확대되었던 현상과도 유사하다.

 

둘째, 그러다 조선천주교는 천주의 신앙과 제사 제도가 배치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대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리이다.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 저변 확대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던 이들이 배교하고, 지도자의 공백 상태에서 조선천주교는 한편으로는 박해에 대처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배도를 극복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전과 위협 속에서도 신앙적인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이들이 생겨나면서 비로서 조선천주교는 신앙 단체로서의 자리를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의 제사 금지는 토착화 선교 정책을 택했던 예수회의 전통부다는 카톨릭 내 프란스스칸 및 도미니칸 선교회 전통을 따른 것으로, 1936년 5월 25일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면서 일본,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교황청이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가적인 예의이기 때문에 신사에 참배해도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선언이 나올 때까지 조선천주교는 신사참배와 제사 제도를 수용하지 않는 것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하였다.

 

넷째, 황사영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이 조선천주교는 외세의 개입, 정치적인 압력, 심지어 전쟁을 통해서라도 종교적인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정부로부터 반정부단체, 반미족단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의 태도는 기왕에 갖고 있는 제사 제도 거부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에 천주교의 박해가 제사 제도 거부라는 순수한 신앙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면, 후기에 접어들면서 야기된 천주교의 박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발단되었다는 사시이다. 그리피스가 언급한 것처럼 황사영으로 대변되는 “로마 카톨릭의 조선 전도방식의 도덕적 약점”은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닌 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분명히 개신교와 다른 선교 정책이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 천주교인들이 교황의 권위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최고 권위에도 순종하도록 그들을 바르게 가르쳤어야 했다.

 

복음의 전래라는 측면에서 고찰 할 때 확실히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랐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침략군을 지원하기 위해 입국했던 일본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보여 준 것처럼 선교가 정치적 패권주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격과 정도는 다르지만 이 점에서 조선의 천주교도 어느 정도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벨로네가 1866년 7우러 13일 불란서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어떤 귄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조선의 파송된 선교사들은 정부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조선 천주교의 패권주의적 선교 정책이 직, 간접적으로 1866년에 발생한 불란서 원정과 연계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순수복음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학문으로, 후에 예전과 제도로 출발한 조선 천주교가 정치적인 성향을 띠면서 이들을 보는 정부의 시각이 달라졌고, 그 결과 정부로부터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조선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우리는 조선천주교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했는지를 평해야 할 것이다. 성경 번역은 고사하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고, 지나치게 정치적인 활동에 관여했으며, 제도적인 교회 조직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조선천주교 지도자들과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천주교 교세 확장과 세력 확장이라는 면에서는 생명을 아끼지 않았지만 복음을 충실하게 전달하려고 한 면에서는 너무도 미흡했다. 해리 로즈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 개종자들에게 외국 세례명을 부여한 것, 서구로부터 외국의 간섭을 끌어들인 것, 비밀스럽고 때로는 거짓된 방법으로 선교 활동을 펼친 것, 신자들에게 성경을 배포하지 않은 것”등 초기 조선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박해와 옥에 갇히는 것과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천주교인들이 영웅적인 순교적 신앙에 찬사를 보내야 하지만 순교가 일종의 공로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고, 또한 그 결과 천주교 선교는 자연히 믿음으로 만의 구원이라는 성경과 개신교의 근본 이라는 물론 교회 복음 본래의 사명과 대 사회적 문화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에 성경적 신앙을 그 모토로 했던 개신교 선교와는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비록 당시의 사회적인 제약과 장벽으로 한계가 있었겠지만 조선천주교가 천주교의 순수 신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복음에 충실했다면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개신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에게 조선개신교 선교의 방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성향을 배제하면서 복음 본래의 순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이었다. 후에 조선개신교는 정치적인 성향을 처음부터 자제하고 복음 전파, 교육, 의료사역, 그리고 자선사역과 함께 복음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성경 번역 및 복음 전파라는 직접선교뿐만 아니라 교육 및 의료선교 등 간접 선교를 통한 문화 변혁을 동시에 추구하였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조선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성경 번역과 직, 간접 선교의 균형을 통해 왕실의 마음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 가운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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