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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송구영신예배 빛의 은혜가 가득한 새해(잠6:20-24)

말씀 : 잠6:20-24

제목 : 빛의 은혜가 충만한 새해

1.빛의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또다시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도 여러분과 가정과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들과 여러분들의 자녀와 우리가 교회와 이 나라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 온 땅위에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옆에 분들과도 축복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화와 건강과 풍성함이 넘치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냥 희망과 위로를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소망과 위로가 있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잠4:18절 보세요.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보세요.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돋는 햇살, 아침 햇살이지요. 어둠을 뚫고 태양이 솟아오를 때처럼 마침내 빛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태양이 점점 떠올라 마침내 온 세상이 말 그대로 대낮같이 밝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빛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의인이 누굽니까? 주님을 따르는 자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른다고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빛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빛과 같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말씀을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려면 오직 말씀따라 가야 합니다. 그게 가장 안전한 길이고 복된 길이고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길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누리려면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빛을 향해 가지 않고 어둠을 향해 가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과연 빛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빛입니까? 오직 말씀 밖에 더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무엇이 인생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까? 과학이 등불이 될 수 있나요? 지식이나 문화나 철학이 등불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명의 도를 압니까? 어떻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압니까? 어떻게 영적 정신적 윤리적 육체적 물질적 모든 문제를 알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충만하셔서 우주만물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고 하실 수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충만하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우주와 생명과 인간이 어떻게 출발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의 실상은 어떤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으로 갔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시고 그곳으로 인도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그걸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등불인 것입니다.

오늘 23절을 보겠습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보세요.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는 생명의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에 보면 사람들이 뭐 좀 안다고 속된 말로 까불고 있습니다. 뭐 좀 알게 되었다고 교만해져서 꼴난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경험을 성경위에 두고 그래서 성경을 아예 무시하거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적용하며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들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할 수 있다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합니까? 이 광활한 우주만물 속에서, 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기들이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데, 하나님이 훅 불면 한방에 훅 가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런 어리석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귀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세상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한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오직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을 등불로 삼았으면 이제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안 그래요? 말씀을 등불로 삼고 그걸 따라가지 않으면 소용없지 않습니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지 않습니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만 말씀말씀 하면서 안 따라가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등불인 말씀을 따라 가야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우리의 심비에 완전히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말씀이 나를 인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말씀이 내 심비에 콱 새겨져 있어야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말씀이 내 마음에서 희미해지지 않고 그 말씀 따라 살 것 아닙니까? 만약 말씀이 내 영혼 속에서 희미하고 도리어 세상의 것들이 각인되어 있으면 말씀따라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의 것을 따라 살게 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내 마음 속에 말씀이 새겨져 있지 않고 세상의 돈과 명예와 세상 즐거움과 부귀영화가 새겨져 있다면 무얼 따라가겠습니까? 말하나마나 세상 따라 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21절을 보십시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돌에다 철필로 새기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심비에 새겨 넣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세상 즐거움이나 향락이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말씀이 희미해지지 않고 자신을 인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말씀을 심비에 새겨 넣음으로 환난이나 핍박이나 조롱이나 그 어떤 시험 앞에서도 그 말씀이 자신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네 목에 매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가까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이 눈앞에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그냥 말씀이 항상 눈앞에서 어른 거려 결코 딴 짓을 못하고 늘 말씀을 따라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란 물론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죽어도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말씀 그대로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나 세상 즐거움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김으로 오직 말씀 안에서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데 그 안에 있어야 생명의 은총을 누릴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올 한해를 살아갈 때에 오직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말씀이 심비에 콱 새겨져서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씀 안에서 말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감으로 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상황과 도전과 위협과 왜곡된 가치관을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위로와 소망과 승리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말씀 안에 살아갈 때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 안에 살아가는 자는 분명히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22절을 보겠습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보십시오.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에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할 것이다. 잘 때에 보호한다.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심지어 우리가 잠이 들어 있어도 그 말씀은 잘들지 않고 우리를 보호합니다. 말씀과 은혜가 우리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잘때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칩니다. 잠자리가 평안합니다. 꿈도 행복한 꿈이 꿔집니다. 그러나 심비에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이 새겨져 있으면 마귀의 꿈을 꾸게 됩니다. 깨어 있을 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깰 때에 더불어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씀 그대로 말씀이 심비에 새겨져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를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것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새겨져 있으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사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고 보호함으로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무엇이 너를 지킬 것이라고요? 명령, 법, 훈계 즉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유혹에서 건지고, 악에서 지켜주어 생명의 길로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심비에 콱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감히 어떤 어둠의 세력이 속된 말로 까불겠습니까? 설령 까불어도 한방에 때려 눕힐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속삭여도 대번에 알아채고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치며 쫓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가도록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심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등불이며 빛이며 진리이며 안내자이며 보호자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도전과 시련과 환경과 상황을 주님의 권능과 지혜로 이기고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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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설교 - 영적인 눈이 열리다.
 

 


말씀 : 왕하6:14-17

제목 : 영적인 눈을 활짝 뜹시다.

우리 사람의 눈은 세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육안입니다. 말 그대로 육신의 눈입니다. 이 눈은 물질적인 눈이므로 물질을 보는 눈입니다. 자연을 보고, 길을 보고, 사람을 보고, 글씨를 봅니다. 그러므로 이 눈도 밝아야 좋습니다. 육신의 눈이 밝지 못하면 실족하기 쉽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가 없고, 글씨도 읽기가 어려우니 불편합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적인 눈입니다. 이 눈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지식의 눈, 윤리적 눈, 문화의 눈, 과학의 눈, 예술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도 밝아야 좋습니다. 윤리와 도덕에 밝아야 하고, 지식이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문화적인 안목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좀더 풍성한 삶을 사는데 유리합니다.

그 다음 마지막 눈이 영적인 눈입니다. 소위 영안이라고도 하고 신령한 눈이라고도 하는 눈입니다. 이 눈은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눈입니다. 물론 다른 눈들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눈들입니다.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영적인 눈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그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육적인 눈과 정신적인 눈을 통합하여 인간존재의 전체적인 면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안목으로 영과 육과 정신을 통괄하고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을 초월하여 엄청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어떤 눈이 인간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겠습니까? 육적인 눈입니까? 정신적인 눈입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한 눈도 인간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생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 영원한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은 영안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진정한 생명의 세계를 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누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영안이 활짝 열려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기억하였기에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인들 앞에 있는 자신들이 메뚜기같다고 말할 때, 그 거인들과 강한 성 때문에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을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에 우리는 분명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이 보고 말했던 그대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복지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말했던 그대로 광야에서 메뚜기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들에서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약 이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금 예수님을 찾아 따라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즉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먹고 입을 걱정은 안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을 주기 위하여 즉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모두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적인 눈을 밝았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눈은 밝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눈인 영적인 눈은 완전히 감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난 군중들 틈에서 빌라도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가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그러한 인생에게만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눈과 귀가 활짝 열린 사람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두 종류의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는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있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져 있는 사람은 선지자 엘리사요, 감겨져 있던 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아람나라는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계획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가기만하면 어떻게 알았든지 귀신같이 나와서 방비를 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계속하다가 결국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들의 침공에 대비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나라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서는 저 엘리사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4절에서 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그 성을 에워쌌다는 것은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그가 머물고 있는 도단 성에 많은 군대를 보내어 그 성을 포위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람의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성위에 올라가 보니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성이 적군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게하시는 너무 두렵고 놀라 허겁지겁 선지자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아아,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아람군대가 저렇게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습니다.’라고 외칩니다.

물론 뒤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아,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습니다. 저 많은 말과 병거와 군대를 좀 보십시오. 저렇게 우리를 에워싸고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가 살길이 어디 있겠습니까하는 절망적인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겁에 질려 두려워하고 있는 게하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게하시의 눈 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산 주위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아람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성안에 하나님의 군대인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람군대는 물러가고 말았고, 그 이후 얼마동안은 이스라엘을 침공해오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이 열렸을 때와 감겼을 때의 차이입니다. 먼저 게하시를 보십시오. 그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육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육적인 눈으로, 감각적인 눈으로, 세상의 경험적인 눈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 눈으로 볼때는 상황은 분명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숫적으로 월등히 열세입니다. 전력이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지적으로 아무리 따져보고 또 따져봐도 아니 따져 보나마나 척 하면 삼천리라고 이건 도저히 게임이 안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죽었다고, 이제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똑 같은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분명 사람의 논리나 경험으로 봐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분명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었습니다. 적군이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그냥 맞붙어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함락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 말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절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기 때문이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물론 우리가 손으로 만질수 있고 실제적 육체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인 말과 병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군대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너희를 안전히 보호해 주겠다는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사실은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숫적으로 우세하고, 전력이 월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분명히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결론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지도 않았습니다. 멸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다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망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적인 눈으로 결론 내렸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와 경험과 지식과 과학적 사고에 의하여 두려워하면서 이제는 끝장이라고 절망에 빠졌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지 않으면 상황만 보이고, 물질만 보이고, 조건만 보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적인 힘의 논리만이 있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의 재물만 보입니다. 세상의 권세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것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목숨을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실패를 경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게 됩니다. 마치 빙산이 8/9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는 육적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결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아니 그 영광의 나라가 분명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의 눈이 열린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환경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조건에 붙잡히지도 않습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와 향락의 노예로 전락하지도 않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절망의 수렁속으로 빠져 들지도 않습니다. 보다 멀리, 보다 온전히, 보다 아름답게, 보다 소망가운데, 보다 영광스러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을 이기고, 조건을 이기고,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어둠의 세력들과 모든 유혹자들을 이기게 됩니다. 진정한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가 또다시 밝아 왔습니다.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작년이나 올해나 동일하게 흘러가지만 그러나 그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결국은 승리하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정녕 지배할 수 있는 자는 곧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 시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지배하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영안이 활짝 열린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그러므로 이 시간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더욱 활짝 떠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귀가 더욱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안에서 하나님안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상황을 보고 조건을 보고 환경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눈으로 모든 환경과 상황과 약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과 어두운 것들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말씀안에서 인도하심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가난과 미움과 증오와 염려와 낙심과 절망을 이기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이 한해에는 더욱 기쁨과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아름다운 한해가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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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송구영신예배설교 : 영적인 눈이 열리는 새해

 

 


말씀 : 왕하6:14-17

제목 : 영적인 눈을 활짝 뜹시다.

우리 사람의 눈은 세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육안입니다. 말 그대로 육신의 눈입니다. 이 눈은 물질적인 눈이므로 물질을 보는 눈입니다. 자연을 보고, 길을 보고, 사람을 보고, 글씨를 봅니다. 그러므로 이 눈도 밝아야 좋습니다. 육신의 눈이 밝지 못하면 실족하기 쉽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가 없고, 글씨도 읽기가 어려우니 불편합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적인 눈입니다. 이 눈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지식의 눈, 윤리적 눈, 문화의 눈, 과학의 눈, 예술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도 밝아야 좋습니다. 윤리와 도덕에 밝아야 하고, 지식이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문화적인 안목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좀더 풍성한 삶을 사는데 유리합니다.

그 다음 마지막 눈이 영적인 눈입니다. 소위 영안이라고도 하고 신령한 눈이라고도 하는 눈입니다. 이 눈은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눈입니다. 물론 다른 눈들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눈들입니다.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영적인 눈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그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육적인 눈과 정신적인 눈을 통합하여 인간존재의 전체적인 면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안목으로 영과 육과 정신을 통괄하고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을 초월하여 엄청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어떤 눈이 인간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겠습니까? 육적인 눈입니까? 정신적인 눈입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한 눈도 인간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생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 영원한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은 영안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진정한 생명의 세계를 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누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영안이 활짝 열려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기억하였기에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인들 앞에 있는 자신들이 메뚜기같다고 말할 때, 그 거인들과 강한 성 때문에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을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에 우리는 분명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이 보고 말했던 그대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복지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말했던 그대로 광야에서 메뚜기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들에서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약 이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금 예수님을 찾아 따라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즉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먹고 입을 걱정은 안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을 주기 위하여 즉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모두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적인 눈을 밝았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눈은 밝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눈인 영적인 눈은 완전히 감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난 군중들 틈에서 빌라도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가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그러한 인생에게만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눈과 귀가 활짝 열린 사람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두 종류의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는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있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져 있는 사람은 선지자 엘리사요, 감겨져 있던 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아람나라는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계획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가기만하면 어떻게 알았든지 귀신같이 나와서 방비를 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계속하다가 결국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들의 침공에 대비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나라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서는 저 엘리사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4절에서 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그 성을 에워쌌다는 것은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그가 머물고 있는 도단 성에 많은 군대를 보내어 그 성을 포위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람의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성위에 올라가 보니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성이 적군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게하시는 너무 두렵고 놀라 허겁지겁 선지자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아아,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아람군대가 저렇게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습니다.’라고 외칩니다.

물론 뒤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아,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습니다. 저 많은 말과 병거와 군대를 좀 보십시오. 저렇게 우리를 에워싸고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가 살길이 어디 있겠습니까하는 절망적인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겁에 질려 두려워하고 있는 게하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게하시의 눈 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산 주위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아람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성안에 하나님의 군대인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람군대는 물러가고 말았고, 그 이후 얼마동안은 이스라엘을 침공해오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이 열렸을 때와 감겼을 때의 차이입니다. 먼저 게하시를 보십시오. 그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육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육적인 눈으로, 감각적인 눈으로, 세상의 경험적인 눈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 눈으로 볼때는 상황은 분명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숫적으로 월등히 열세입니다. 전력이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지적으로 아무리 따져보고 또 따져봐도 아니 따져 보나마나 척 하면 삼천리라고 이건 도저히 게임이 안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죽었다고, 이제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똑 같은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분명 사람의 논리나 경험으로 봐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분명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었습니다. 적군이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그냥 맞붙어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함락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 말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절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기 때문이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물론 우리가 손으로 만질수 있고 실제적 육체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인 말과 병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군대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너희를 안전히 보호해 주겠다는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사실은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숫적으로 우세하고, 전력이 월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분명히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결론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지도 않았습니다. 멸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다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망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적인 눈으로 결론 내렸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와 경험과 지식과 과학적 사고에 의하여 두려워하면서 이제는 끝장이라고 절망에 빠졌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지 않으면 상황만 보이고, 물질만 보이고, 조건만 보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적인 힘의 논리만이 있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의 재물만 보입니다. 세상의 권세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것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목숨을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실패를 경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게 됩니다. 마치 빙산이 8/9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는 육적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결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아니 그 영광의 나라가 분명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의 눈이 열린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환경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조건에 붙잡히지도 않습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와 향락의 노예로 전락하지도 않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절망의 수렁속으로 빠져 들지도 않습니다. 보다 멀리, 보다 온전히, 보다 아름답게, 보다 소망가운데, 보다 영광스러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을 이기고, 조건을 이기고,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어둠의 세력들과 모든 유혹자들을 이기게 됩니다. 진정한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가 또다시 밝아 왔습니다.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작년이나 올해나 동일하게 흘러가지만 그러나 그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결국은 승리하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정녕 지배할 수 있는 자는 곧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 시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지배하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영안이 활짝 열린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그러므로 이 시간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더욱 활짝 떠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귀가 더욱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안에서 하나님안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상황을 보고 조건을 보고 환경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눈으로 모든 환경과 상황과 약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과 어두운 것들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말씀안에서 인도하심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가난과 미움과 증오와 염려와 낙심과 절망을 이기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이 한해에는 더욱 기쁨과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아름다운 한해가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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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 빛의 은혜가 가득한 새해

 

 


말씀 : 잠6:20-24

제목 : 빛의 은혜가 충만한 새해

1.빛의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또다시 201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도 여러분과 가정과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들과 여러분들의 자녀와 우리가 교회와 이 나라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 온 땅위에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옆에 분들과도 축복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화와 건강과 풍성함이 넘치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냥 희망과 위로를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소망과 위로가 있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잠4:18절 보세요.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보세요.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돋는 햇살, 아침 햇살이지요. 어둠을 뚫고 태양이 솟아오를 때처럼 마침내 빛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태양이 점점 떠올라 마침내 온 세상이 말 그대로 대낮같이 밝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빛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의인이 누굽니까? 주님을 따르는 자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른다고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빛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빛과 같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말씀을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려면 오직 말씀따라 가야 합니다. 그게 가장 안전한 길이고 복된 길이고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길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누리려면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빛을 향해 가지 않고 어둠을 향해 가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과연 빛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빛입니까? 오직 말씀 밖에 더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무엇이 인생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까? 과학이 등불이 될 수 있나요? 지식이나 문화나 철학이 등불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명의 도를 압니까? 어떻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압니까? 어떻게 영적 정신적 윤리적 육체적 물질적 모든 문제를 알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충만하셔서 우주만물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고 하실 수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충만하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우주와 생명과 인간이 어떻게 출발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의 실상은 어떤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으로 갔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시고 그곳으로 인도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그걸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등불인 것입니다.

 

오늘 23절을 보겠습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보세요.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는 생명의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에 보면 사람들이 뭐 좀 안다고 속된 말로 까불고 있습니다. 뭐 좀 알게 되었다고 교만해져서 꼴난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경험을 성경위에 두고 그래서 성경을 아예 무시하거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적용하며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들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할 수 있다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합니까? 이 광활한 우주만물 속에서, 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기들이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데, 하나님이 훅 불면 한방에 훅 가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런 어리석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귀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세상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한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오직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을 등불로 삼았으면 이제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안 그래요? 말씀을 등불로 삼고 그걸 따라가지 않으면 소용없지 않습니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지 않습니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만 말씀말씀 하면서 안 따라가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등불인 말씀을 따라 가야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우리의 심비에 완전히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말씀이 나를 인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말씀이 내 심비에 콱 새겨져 있어야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말씀이 내 마음에서 희미해지지 않고 그 말씀 따라 살 것 아닙니까? 만약 말씀이 내 영혼 속에서 희미하고 도리어 세상의 것들이 각인되어 있으면 말씀따라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의 것을 따라 살게 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내 마음 속에 말씀이 새겨져 있지 않고 세상의 돈과 명예와 세상 즐거움과 부귀영화가 새겨져 있다면 무얼 따라가겠습니까? 말하나마나 세상 따라 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21절을 보십시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돌에다 철필로 새기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심비에 새겨 넣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세상 즐거움이나 향락이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말씀이 희미해지지 않고 자신을 인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말씀을 심비에 새겨 넣음으로 환난이나 핍박이나 조롱이나 그 어떤 시험 앞에서도 그 말씀이 자신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네 목에 매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가까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이 눈앞에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그냥 말씀이 항상 눈앞에서 어른 거려 결코 딴 짓을 못하고 늘 말씀을 따라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란 물론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죽어도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말씀 그대로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나 세상 즐거움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김으로 오직 말씀 안에서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데 그 안에 있어야 생명의 은총을 누릴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올 한해를 살아갈 때에 오직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말씀이 심비에 콱 새겨져서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씀 안에서 말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감으로 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상황과 도전과 위협과 왜곡된 가치관을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위로와 소망과 승리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말씀 안에 살아갈 때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 안에 살아가는 자는 분명히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22절을 보겠습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보십시오.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에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할 것이다. 잘 때에 보호한다.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심지어 우리가 잠이 들어 있어도 그 말씀은 잘들지 않고 우리를 보호합니다. 말씀과 은혜가 우리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잘때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칩니다. 잠자리가 평안합니다. 꿈도 행복한 꿈이 꿔집니다. 그러나 심비에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이 새겨져 있으면 마귀의 꿈을 꾸게 됩니다. 깨어 있을 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깰 때에 더불어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씀 그대로 말씀이 심비에 새겨져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를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것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새겨져 있으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사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고 보호함으로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무엇이 너를 지킬 것이라고요? 명령, 법, 훈계 즉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유혹에서 건지고, 악에서 지켜주어 생명의 길로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심비에 콱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감히 어떤 어둠의 세력이 속된 말로 까불겠습니까? 설령 까불어도 한방에 때려 눕힐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속삭여도 대번에 알아채고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치며 쫓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가도록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심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등불이며 빛이며 진리이며 안내자이며 보호자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도전과 시련과 환경과 상황을 주님의 권능과 지혜로 이기고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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