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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주일낮예배설교-Sunday worship preaching

  


 


말씀 : 마13:3-9

제목 : 마음을 옥토로 만듭시다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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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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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낮예배설교]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제목 : 잃어버린 자아를 찾읍시다.

본문 : 행2:1-4

 

1.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특히 겨울밤에는 마실이라고 해서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방학 때는 이웃집에 놀러가 함께 놀다오곤 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텔레비전을 보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든지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 게 없었죠. 그래서 동지 섣달 긴긴 밤에 별로 할 게 없으니까 마실을 가곤 했는데 때로는 좀 늦게까지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아이들은 그만 잠이 들기도 했는데 이 때 아이들이 짓궂게 불침이라는 걸 놓곤 했었습니다.

불침이라는 것 혹시 놓아 보거 맞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성냥개비를 반쯤 태우고 나서 숯처럼 만들어 끝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 침을 발라 자는 아이의 다리 같은데 세워 놓으면 불이 숯을 타고 내려가 살에 닿으면 물론 아주 센 불은 아니어서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자던 아이가 그만 기겁을 하고 벌떡 일어납니다. 그렇게 놀라서 일어나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곤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니라 우리 영혼도 불침을 한번 맞아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잠이 깊이 들어있으면 곱게 깨우면 안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업어 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금방 일어납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뜨거운 맛을 보든지 아니면 반대로 찬 맛을 보면 됩니다. 즉 불침을 한방 놓든지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벌떡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잠만 아니라 영적인 잠이나 정신적도 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은 잠이 들어 있으면 웬만한 충격으로는 깨어나질 않습니다. 그야말로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죽어라고 왜곡되고 변질되고 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악한 생각과 경험과 이성과 가치관을 고집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는 아홉 번씩이나 끔찍한 재앙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마침내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참혹한 꼴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심령에 충격을 받고 이스라엘을 보내게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간의 심령이 얼마나 어둠과 무지 속에 굳어져 있는지 그 영적 정신적 잠에서 깨어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게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맨날 보고 듣고 배우고 말하고 행동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맨날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살며 재미있게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들만 생가하며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육체적 물질절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들이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런 가치관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게 본래의 모습인 줄 알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놀고 그저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더 좋고 너 낫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도 아니고 거기에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너무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육체적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것만으로는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지 못하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마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1: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러분, 보세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이라니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형상은 없으시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 정신적 감정적 지적 의지적 형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하신 모습을 닮아 영적 정신적 감정적 의지적 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선과 사랑과 의를 행하며 영육간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려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모습도 심히 좋았고, 그 목적도 심히 좋았고, 그 마음도 영혼도 육체도 모든 것이 심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리며 아름답게 가꾸는 가운데 사랑과 기쁨과 선과 의를 행하며 영육 간에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어리석게도 그만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어둠과 무지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것을 인생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본래의 모습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이와 같이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에 길들여져 온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 이상 그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며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망을 채우고 거기서 인생의 기쁨과 목적과 행복을 찾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아래로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랑과 선과 의를 행하며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본래의 인생의 모습이고 그럴 때 당연히 진정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4:22~24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 정말 더욱 겸손히 그리고 열심히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함으로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불방망이를 맞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본래의 그 아름답고 가치있고 생명력이 충만한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방법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우리 인생이 본래 죄와 무지 가운데 있으니 우리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안됩니다. 천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이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언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게 쉽게 깨지겠습니까? 단단한 쇳덩어리가 웬만한 충격을 주어서 깨지겠습니까?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쉽게 깨지겠습니까? 영적 정신적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것들은 웬만해선 안 깨집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지고 무디어진 것들을 능히 깨트릴만한 강력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딴딴하고 질기게 굳어진 그 왜곡되고 무지하고 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악하기까지 한 그 무지하고 강퍅한 심령을 깨트릴 수 있는 무기는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의 역사하심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불망이로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납니다. 우리가 멍하게 앉아 있거나 졸려서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을 때에 뒤통수를 한번 얻어맞든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뜨거운 불 맛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성령의 불방망이를 한번 맞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세상에서 굳어진 것들이 정말 끈질기게 내 안에 달라붙어 있어서 자꾸 그 잘난 이성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좀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고 세상의 것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되고 그래서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떤 분들은 아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옛날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하는 식으로 복이나 구하면서 종교생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는 여기서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거니와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성령의 불망이를 한번 얻어 맞고 잠들어 있던 영혼이 깨어나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 정망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도 정말 호된 충격을 받고 정신을 번쩍 들어 인생의 방향전환을 한 사람입니다. 일차적으로 저 자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왔었습니다.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쇠약 같은 증세도 좀 있었고 특히 신경성 위염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자녀를 통해서 큰 충격이 왔습니다. 큰 아이가 큰 질병에 한달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영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 잘나서 내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내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구나. 내가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찾아 울고불고 눈물콧물 흘리며 회개하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내 심령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와 감격과 기쁨이 수없이 교차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참 빛, 생명의 빛이 내 심령 속에 채워지며 내 속에 있던 모든 부정적이고 추하고 어리석고 악한 것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신경성 위염이나 신경 쇠약 증세도 함께 쫓겨 나갔고, 결국 아이의 병도 나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새로운 세계가 환하게 보였습니다. 영광의 나라가 보였습니다. 지금까지의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은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리고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회사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충격을 받고 자아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똑바로 보입니다. 환하게 보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나 자아의 껍질이 깨지지 않으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씨앗이 껍질을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 새 생명을 싹틔울 수 있겠습니까? 계란 껍데기를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 병아리가 이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애벌레가 껍질을 벗어 던지지 않고 어떻게 나방이 되어 훨훨 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자아와 경험과 이성과 지식의 틀을 깨트려야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안 그러면 맨날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안 그래요? 내 지식과 경험과 이성의 틀을 깨트리지 않고 여전히 그 안에 있으면 어떻게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걸 깨트려야 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게 여간해서는 잘 안 깨집니다. 우리가 몇십년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져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이 단단한 껍질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알량한 경험과 지식과 이성의 껍질이 나를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깨트려야 합니다. 깨트려야 변화가 옵니다. 이걸 깨트려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해 비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의 불 맛을 한번 봐야 합니다. 성령의 불망이로 우리의 심령을 두들겨 부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강력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능력있게 은혜가운데 신앙생활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빛으로 충격을 받고 깨졌습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이 비추더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때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자리에 엎어지고 눈이 멀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의 영혼과 마음에 단단한 껍질처럼 붙어 있던 껍데기가 벗겨져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180도 궤도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던 삶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던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엄청만 충격 앞에서 그의 자아는 완전히 깨어지고 성령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온전히 거듭나 제자다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좀 길지만 전체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무리 120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쓸 때에 성령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같은 것이 들리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불이 거기 모인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각자 따로따로 성령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확 뒤집어 진 것입니다. 심령이 뜨거워지고 감격과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능력을 받고 자신들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다 내놓고 유무상통했습니다. 지상의 메시아 왕국을 꿈꾸던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던 비겁한 자들이 십자가의 순교를 택하는 진정한 용기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던 삶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적인 큰 충격을 받아 옛자아가 완전히 깨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영혼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악하고 독한 것들이 온전히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세상의 욕망과 유익과 기쁨을 따라 살던 삶에서 돌이키고, 세속에 얽매이고, 물질에 얽매이고, 육신에 얽매이고, 상황과 조건에 얽매이던 삶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로서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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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은혜받는 믿음

 

 

 

 

말씀 : 막5:25-34

제목 : 은혜받는 믿음

 

1.주님과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화나 토론을 하다보면 정말 서로 안 통할 때가 있죠? 어떤 때는 정말 작은 문젠데 서로 죽어도 자기 생각이 맞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아 갈등이 생기고 큰소리가 나오고 그래서 서로 간에 틈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치관이나 중요성이나 우선순위의 차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못난 자아 때문입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이 상대방의 뜻이나 방법을 인정해 주면 자기가 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양보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서로 끝까지 자기 주장을 하다가 상처를 주고 공동체의 힘을 빼기도 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거 뭐 좀 방법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르더라도 그냥 서로 받아 주고 타협하면 될텐데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그거 때문에 서로 굽히지 않고 그래서 교회일을 추진하는데도 협조하지도 않고 너 잘하면 네가 다해라 그러면서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여 대화가 잘 통하게 해야 합니다. 끝까지 자기 잣대를 고집하며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비판만 하지 말고 겸손히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세워지고 모두가 함께 평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그렇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더더욱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여 나와 주님 사이에 막힘이 없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이성과 고집을 따라 행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막혀 주님 나 사이에 벽이 생깁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면 누구 손햅니까?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뿐이지요.

성경에도 보면 그런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를 보세요. 예수님이 베드로야, 내가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너희가 살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그럽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이 땅위에서 메시야 왕국은 누가 건설합니까? 그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지요.

또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그래야 너희가 참 자유인이 될 것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본래 자유인인데 뭘 또 자유인이 된다고 하십니까? 그렇게 대답하지요.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종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육체적인 종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국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순진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우리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가 죽어야 살고,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내가 살아서 움직이고, 또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와 예수님 사이에 대화가 잘 안되고 갈등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주님안에서 그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11:39,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죽은 지 나흘이 지났든 백일이 지났든 백년이 지났든 무슨 상관입니까? 주님이 그냥 그러라면 그러는 것이지요. 내 말을 들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상황이든 환경이든 경험이든 지식이든 이런 거 따지지 말고 그냥 말씀대로 하라는 게 아닙니까? 그러면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부터는 정말 상황, 환경, 조건 이런 거 따지지 말고 아집, 고집, 편견 이런 것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정말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 구원의 주님, 그 주님과 온전한 교제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상황이나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또한 자신의 고집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먼저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이런 순진한 믿음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이성적, 경험적 생각이나 고집이나 아집이나 이런 것 다 버리고 주님 앞에 순진하게 나아가 결국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덧입게 됩니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했던 여인입니다. 이 혈루증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병이 당시로서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요, 불치병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25,26절의 말씀을 보세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여인은 혈루증에 걸려 12년간 고생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하면 종합병원도 찾아가 보고, 한방병원도 찾아가보고, 민간요법도 써보고, 식이요법도 해보고, 벌침도 맞아보고 해 볼 것은 다 해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병이 낫기는커녕 힘만 들고 재산만 다 탕진하고 도리어 병은 점점 중해 갔던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이 여인의 고통은 단지 이런 육체적,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의 더 큰 고통은 주변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혈루증을 앓게 되면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됐고,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이혼사유가 되는 병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모든 게 절망이었습니다. 육체도 망가지고, 재산도 다 탕진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희망의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지방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27,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절망 속에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 즉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중풍병자, 눈먼 자, 귀먹은 자, 앉은뱅이 등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며 그 말씀이 권세 있는 자의 말씀과 같다던 그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귀가 번쩍 뜨이고, 눈이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시는 그 예수님이 오신다고! 그렇다면 그분을 만나봐야지. 그분에게 가면 이 문제가 틀림없이 해결 될거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이까짓 병고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문제는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예수님 앞에 나오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진리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마음이 치료받고, 육신이 치료받고, 영혼이 치료받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틀림없는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해결됩니다. 틀림없이 해결됩니다. 육체의 문제, 마음의 문제, 물질의 문제, 영혼의 문제 다 해결됩니다. 다만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믿고 그 분께 의뢰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민11: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허튼 소리를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여러분, 말씀대로 해 보십시오. 왜 안 되겠습니까? 말씀대로 하면 다 해결됩니다.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든 부자가 안되어도 행복하게 살든, 육신의 병이 다 낫든 병이 안 나아도 감사와 기쁨으로 살든 다 해결됩니다. 가정의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시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되게 하시고, 해결되지 않아도 사랑과 은혜로 다 덮게 하시든 여하튼 반드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 바랍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실로 주님안에서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과 육신과 정신이 치료함을 받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길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와같이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믿었으면 믿음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믿으면 믿은대로 행동해야 그 믿음이 진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 믿는다고 하면서 안 따라가면 그게 뭐가 믿는 거겠습니까?

오늘 27~29절까지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여인이 예수님의 옷데 손만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온갖 장애물을 헤치고 실제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곧 병이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과정을 잘 보세요. 이 여인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결사적으로 주님의 옷을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나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 들였으면 이제는 액션을 취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전력을 다해 주님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는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상황을 보세요. 지금은 예수님께 접근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31절 보세요.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즉 무언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아시고,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셨을때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아니 주님, 이 많은 무리가 이렇게 아우성을 치며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데 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런 말이지요. 즉 예수님이 그곳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이 여인뿐 아니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서로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기 위하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이 예수님께 접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사생결단하고 예수님께 다가갔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사적으로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이 빠져나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가만히 계셨는데도 이 여인의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중요합니다. 나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분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을 만지기만 하면 낫는다. 그러므로 가다가 밟혀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분을 만나야 하겠다. 그분을 만져야 하겠다. 이런 각오와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전심전력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을 터치했을 때 결국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예수님을 만진 사람이 어찌 이 여인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려고, 말씀을 들으려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그래서 서로 예수님께 가까이가기 위하여 에워싸고 밀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 스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여인의 만짐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받는 만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깃을 스쳤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인만이 주님의 옷자락 끝을 겨우 잡았을 때 거기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왜 이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여인의 터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터치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터치했지만 그들의 터치는 무의미한 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터치는 완전한 신뢰와 믿음의 터치였습니다. 확신의 터치였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믿는 터치였습니다.

좀전에 보았던 말씀, 28절 보세요.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어떻게 만졌다고요?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만졌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손이 아니라도 좋다. 이분의 발이 아니라도 좋다. 이 분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다. 이 분이라면, 이 분과 연결된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좋다. 그분과 연결된 지푸라기 하나라도 만져도 그분과 연결되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만졌을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의 이런 터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진정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진정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아니 주님께 연결된 지푸라기라도 잡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사적으로 반드시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그런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곁을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피상적으로 주님 곁을 맴도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녕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믿으며 그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향해 손을 뻗을 때에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속에 역사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러자 결국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29절 말씀을 보세요.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이 여인이 그런 믿음으로 예수님을 터치했을 때 그 순간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해 보아야 할 말씀은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부르심의 음성을 보십시오. ‘딸아...’ 그렇게 부르십니다. 여러분, 자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것과 ‘아들아...’ ‘딸아....’ 그렇게 부르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부모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집니까? 물론 이름을 부를 때도 사랑으로 부르겠지만 웬지 ‘아들아, 딸아’ 그렇게 부르면 더 정감이 있고, 더 진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바로 이 여인에게 그렇게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이제는 평안할 것이다. 이제는 행복할 것이다. 이제는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이 여인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이제는 더 이상 영적 무지의 자리에 앉아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 온전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인이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며 사생결단하고 주님 곁으로 왔듯이 주님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오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주변에서 맴돌았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주님 곁에 맴도는 인생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님을 터치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녕 주님의 능력을 덧입으시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약한 것들과 어려운 것들을 이기고 주님의 평안과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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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인생의 황금비율

 

 

 

 

 

 

제목 : 인생의 황금비율

말씀 : 요삼1:2~4

1.인생의 황금비율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여 모든 성도 여러분과 고향을 찾은 모든 성도여러분의 가족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온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혈육 간에도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와 기쁨을 마음껏 나누는 복된 설 명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먼저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자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다섯 개의 사각형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이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약간 다를 수 있지만 십중팔구는 5번을 꼽는다고 합니다. 이 사각형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약1.6:1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집을 지을 때나 텔레비전을 비롯한 모든 공산품을 만들 때도 적용되고, 사람도 배꼽을 기준으로 하체와 상체의 비율이 1.6:1에 가장 가까울 때 가장 균형이 잡히고 아름답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1.6:1이라는 이 비율을 황금비율이라고 합니다. 황금비율이란 수학, 기하학, 미술, 건축학, 과학 등에서 두루 통용되는 법칙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해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비율을 말합니다. 이 비율이 대략 1.6:1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인생은 어떨까요? 우리 인생에게도 분명히 이런 황금비율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외형적으로도 가장 어울리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안정적인 비율이 있는 것처럼 내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가장 아름답고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비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황금비율은 꼭 1.6:1은 아니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상적인 조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비율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럼 인생의 황금비율이 뭡니까? 그건 영과 육과 혼이라고 하는 인간의 전인격체의 가장 이상적인 조합을 이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영적인 영역과 육적 혹은 물적인 영역,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비율대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고 따라서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만약에 돈은 엄청나게 많은데 인격이 엉망이거나 반대로 인격은 좋은데 돈이 너~무 없어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어찌 생명력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혹은 지식은 많은데 인품이 엉망이거나 반대로 인품은 괜찮은데 아는 게 너~무 없다면 과연 풍요로운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혹은 육체는 건강하고 잘생기고 좋은데 정신이 온전치 못하거나 반대로 정신은 온전한데 육신이 병들거나 하면 어떻겠습니까? 혹은 지식도 돈도 인품도 건강도 좋은데 신앙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과 육과 혼이 아름답고 고귀하고 멋있고 신비롭게 조화를 이룬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영역이 골고루 발달하여 잘 조화를 이룰 때 그 인생은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비롯한 짐승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짐승들에게도 본능적인 욕망이 있고 약간의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무슨 윤리니 도덕이니 품격이니 가치니 영성이니 이런 거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먹을 것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야말로 전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윤리와 도덕과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문화적 물질적 정신적 욕구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을 만날 준비도 해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어느 한쪽이 탈나면 그 인생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보십시오, 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범사에 잘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그대로 모든 게 잘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경제가 잘되고, 타인과의 관계가 잘 되고, 육신이 건강하고 그래서 살아가는 데 문제거리가 없이 일이 잘 풀려 나가는 것입니다. 강건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신적으로 건전하고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혹이나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림이 없이 굳건하게 서있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적으로도 건강하여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황금비율인 것입니다. 몇 대 몇 대 몇이라고 딱히 정해진 비율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영역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영과 육과 혼이 균형있게 발달될 수 있도록 힘쓰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죽어라고 일만하시는 분도 계신데 여러분, 그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반대로 어떤 분은 죽어라고 일하기 싫어하고 편하게 놀고 먹고 살려고 하는데 그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어떤 분은 죽어라고 육신의 건강을 챙기느라고 시간을 거기에 다 투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몸 가꾸는데 정열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또 너~무 몸을 안 가꾸고 소홀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바보같은 일입니다. 또 어떤 분은 세상의 것은 무가치하고 속되고 심지어 악하다고 하면서 그저 도만 닦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송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면 장땡인줄 아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과 혼과 육을 균형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균형있게 발달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생활과 말씀 생활과 기도생활에도 힘써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영과 육과 정신이 균형있게 발달될 때 그 인생은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풍요롭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정말 영혼을 풍성케하는 일과 물질적인 필요를 채움받기 위한 일과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 골고루 균형있게 사용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영과 육과 혼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대로 황금비율을 이룸으로써 여러분의 삶이 안정되고 편안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됩니까?

2.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황금비율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우주만물에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대로 잘 유지될 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게 깨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황금비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연계도 보십시오. 태양과 지구 사이에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거리가 있고, 공전 시간과 자전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만약 그게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게 되면 지구는 멸망합니다. 지구 내에서도 그렇습니다. 바다와 육지가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지구의 온도와 습도가 적정 수준이 유지되어 지구가 유지됩니다. 또한 공기 중의 여러 원소들이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땅과 물이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합니다. 땅과 숲과 강과 바다와 동물과 식물과 사람이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생명력이 넘치는 지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물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정말 풍요롭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살도록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유지해야 할 황금비율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잘 유지하면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 되지만 이 비율이 깨지면 생기를 잃게 되어 이 세상에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가장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정해주신 황금비율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7:1, 10:1의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7:1의 법칙이 뭐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주일성수와 관련된 것으로 적어도 우리 시간의 1/7은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은 하나님께서 순전히 우리를 위하여 정해 놓으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의 양식과 평안과 은혜를 공급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과 육과 혼이 안식을 누리며 풍요로움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주님 존전에 나와 예배드리며 영의 양식과 은혜를 공급받아야 우리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바르게 지키면 영과 육이 균형을 이루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이 날을 범하면 이 황금비율이 깨져 뒤뚱거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실상은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주일을 바르게 성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우리의 심령을 채우면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가치관과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점점 영적인 생명력을 잃게 되고, 그러면 더욱 세상의 물결에 떠내려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서양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원인이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음으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10:1의 법칙이란 뭐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일조 헌금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물질의 황금비율을 말합니다. 십일조 헌금은 물질적으로 균형잡힌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최소한의 비율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최소한의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는 신앙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를 원하는 소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릴 부분은 드리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 사용할 것은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이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존중과 신뢰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할 때에 정말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이웃에게도 기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그래서 자신의 삶도 아름답고 뿌듯하고 가치있고 의미있고 또 그렇게 할때에 세상은 정말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20: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사람에게 대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것입니다. 또 눅6:38절 전반부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줄 것을 주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과 사랑의 고백을 보시고 복을 내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산다고 풍요롭고 가치있고 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과 사람앞에 볼품없는 인생이 됩니다. 오히려 드리는 삶, 줄줄 아는 삶이 넉넉하고 풍요롭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을 위해서 올바르게 분할하여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사랑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며, 자신의 삶도 더욱 멋있고 아름답고 귀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사람과의 관계에서 황금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선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황금비율을 잘 지켜야 하고 그 다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황금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과의 사이에서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를 주고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황금비율 못지않게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황금비율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과의 사이에서의 황금비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인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진정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그들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적정한 수준에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극단적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 덫에 걸려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생각하고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왜곡된 모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도 다 번거롭다고 하며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 말하기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유인즉 차라리 자식이 없으면 정부에서 먹여 살려 주는데 자식이 있어서 생활보호대상자도 안되어 정부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자식도 돌보지 않아서 생계가 곤란하신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딱 잘라 이런 비율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는 가족과 이웃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물질과 시간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황금비율을 적용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돈과 명예가 있다해도 그 인생은 절름발이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아니 그냥 인정받지 못할 뿐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명절이 대단히 의미있고 좋은 날이라고 봅니다. 물론 민족이 이렇게 대이동을 하며 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기름값도 많이 들고, 또 특히 여성분들은 음식 준비다 설거지다 하여 힘든 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계기를 통하여 평소에 바빠서 혹은 너무 멀어서 찾아보지 못했던 사랑하는 가족들을 찾아 서로 만나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오랜만에 만나 사랑과 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고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고 어려움을 이기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습니까? 또 좀더 시야를 넓혀서 이럴 때 쓸쓸하고 외롭게 지내시는 이웃을 돌아볼 수 있다면 이 명절이 얼마나 훈훈하고 아름답고 복된 날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막12:31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또 딤전5: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모든 이웃을 사랑하되 가족은 특별히 더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다 가족의 사랑과 희생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인류 사회의 핵으로 가족 간에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잘 형성되면 결국 인류사회 전체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설명절을 맞이하여 정말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더욱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간에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와 기쁨을 나누는 복된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오늘 설 명절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 전체가 오늘 명절과 같이 늘 기쁨과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황금비율을 잘 지키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어느 한쪽만 발달하고 다른 한쪽은 퇴화되어 있는 절름발이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건전하고 아름답게 잘 발달하여 황금비율을 이루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나와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께 드릴 것은 드리고, 이웃을 위하여 사용할 것은 사용하고, 자신을 위하여 사용할 것은 합리적으로 사용함으로 진정 가장 아름다고 균형잡힌 황금비율을 이루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강건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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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복된 만남을 위하여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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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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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영광의 면류관을 위하여

 

 


제목 :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말씀 : 고전9:24~27

1.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의 농구 코치 중 꽤 유명한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치 노릇을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못해서 유명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사람이 맡은 팀마다 계속해서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찌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치가 한번은 시합에 임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져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오늘도 이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이겨서 챔피언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코치와 선수들이 비장한 각오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그 게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겼다고요? 미안하지만 또 졌습니다. 그래서 코치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게임을 합니까?” 이때 한 선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실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정신력이나 마음의 자세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과 실력이 딸리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부도 안하고 난 시험을 잘 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다고 시험을 잘 칠 수 있겠습니까? 농구도 안 해본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농구선수들에게 덤벼든다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훈련과 노력과 투자를 통해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덮어놓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없는 등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기도만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건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적 이성적 육체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열심히 노력할 때에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1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끊어버릴 것은 너희가 끊어 버려라. 너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가라. 그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자칫하면 이래서 저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못합니다. 하면서 변명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끊을 것은 내가 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내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힘써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2.귀하고 복된 일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훈련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은 귀한 일에 쓰임 받겠다,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한 삶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나아가 그런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잘 참고 견디며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선하고 귀한 일에 열심도 낼 수 없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며 무사안일 속에 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왜곡된 가치 속에 휩쓸려 다니며 잘못된 길로 가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별볼일없는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하여 가치있고 의미있고 고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그래서 자신도 남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풍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때 부와 명예를 얻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했을 때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주님께 부름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였을 때 사도라고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사도 바울을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씀은 버림받아 천국에 못가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망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천국에 못갈까봐 두려워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충성스럽지 못한 종이 되어 주께서 넌 더 이상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 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그 직분 내놔라. 그러실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런 일을 만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넌 더 이상 쓸모없어. 가치가 없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반대로 당신은 정말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에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어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사람들에 유익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요.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히 쓰임받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그저 자신의 안일함과 물질적 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겠다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싶다는 그런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 받고 귀히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그러면 가장 귀하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복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져야 하는데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25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목적을 두고 썩어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썩지 아니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며 힘써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또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물론 상을 받는 사람이 여럿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같이 달리기를 해도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최선을 다한다고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 목표를 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야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요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나 소망이나 목표가 아닙니다. 무조건 열심히 해서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것이 소망과 목표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소망이고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이 땅에서도 진정한 평안과 은혜와 부요함을 누리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목표를 가지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졌어도 또 그것을 향해서 아무리 힘써 달려갔어도, 그래서 혹시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어도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빈 쭉정이 인생이 되어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거나 혹은 아예 버림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최종적인 목적을 두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을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나아가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다음에는 그 열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일에 열망을 가졌어도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말씀 그대로 나는 지금까지 방향도 없이 달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허공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주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힘써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달리기 선수가 출발 총성을 듣고 힘껏 달려가는데 도착점을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권투 선수가 주먹을 열심히 휘두르는데 계속 허공을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라고 뛰고, 죽어라고 주먹을 휘둘러봐야 말짱 도로아미타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인생의 경주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이나 목적지도 없이 세상 물결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달리기는 달리는데 썩어 없어질 것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헛고생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은 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혹시 사람에 인정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하여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진정하고 영원한 소망도 열망도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어리석은 삶이 되디 않기를 바랍니다. 또 그 귀하고 온전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말고 혹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면서 주저 앉아있지 말고, 주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의 선한 역사에 힘써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즌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 그것은 절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갈 수도 없고, 또 설령 열심히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파리 한마리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꿀단지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핥아먹던 파리는 달콤한 맛에 정신이 팔려 점점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배를 채운 다음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려고 날개를 파닥였지만 날개가 꿀 속에 잠겨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방 한 마리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꿀단지 속에 들어가면 그럴 줄 몰랐더냐? 욕심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나방은 보란 듯이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잠시 후에 이 나방은 파리가 발버둥치고 있는 꿀단지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나방이 환히 빛나는 등불을 향해 날아가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한쪽 날개가 불에 타서 추락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파닥거리는 나방을 보고 파리가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나방아, 불에 가까이가면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네 불장난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결국 파리도 나방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과 유혹이 파리와 나방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좋은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야 하지만 자신을 잘 다스려 유혹과 욕심을 물리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좋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나 정치인도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나 직업인이나 직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잠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일하고 언제 훈련을 하겠습니까? 또 실컷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다음에 진탕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다면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가고 싶은 곳 다가면서 언제 예배드리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언제 헌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설령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밖에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논다면 기껏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25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자신을 잘 다스려 모든 유혹과 욕심과 욕망을 이겨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나쁜 것을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좋은 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일의 노예로 전락하여 영혼과 육신과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음식도 좋은 것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몸을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답시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입니다. 맨날 철야기도 한다고 직장에 가서 졸고 앉아 있다면 이것도 책망 받을 일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올바른 목표와 열망을 가지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끊을 것은 끊고 삼갈 것은 삼가고 피할 것은 피하고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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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열매 풍성한 인생

 

 

 

 
제목 :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 : 눅13:6~9

 

1.책임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기독교 잡지에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딸이 주고 받은 편지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딸에게 편지를 썼는데 ‘딸아, 나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구나. 술은 나에게 유일한 낙으로 이것마져 없으면 나는 살아갈 아무 낙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단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딸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우선 아빠 자신을 포기함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저의 인생에도 심각한 상처와 고통을 주는 무책임한 인생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렇게 상처받고 고통 받는 엄마와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딸의 편지처럼 이 아버지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아내와 자녀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도 아니요, 환경이나 상황의 문제도 아니고, 믿음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요, 가치관의 문제인 것입니다.

누군가 이 시대를 가리켜서 3무(無)의 세대라고 했습니다. 3무. 세가지가 없는 즉 무책임, 무관심, 무감각 세대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책임의식이 결여 되어 있고,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자녀로서의 책임 의식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주님의 뜻에 대하여 무감각할 때가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국가의 미래에 대한 책임의식이 부족하고, 경제인들은 국가 경제에 대한 책임의식이 부족하고, 국민은 국민으로서의 책임의식이 부족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책임의식이 부족하고, 교회의 직분자들은 직분에 대한 책임의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정치인으로, 기업인으로, 예술인으로,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성도로 세우신 것은 주어진 자리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함으로 열매를 맺어 세상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25: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어떤 사람은 물론 하나님,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종들은 모든 인생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소유를 우리에게 맡긴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잘 관리하도록 맡기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맡기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다할 때 우리는 잘 했다 칭찬받고 상급을 받아 누릴 것이요, 그렇지 못할 때는 책망 받고 심하면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무화과나무는 마땅히 무화과 열매를 맺어야 할 책임이 있는데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 쓸모없게 되어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각의 자리에서 주어진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해야 쓸모있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가 됩니다. 자신도 풍성해지고 남도 유익하게 하며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그 형편이 어떠하든 그 현실 속에서 성실하게 책임과 의무를 다함으로 아름다운 열매 풍성하게 맺어 우리 자신의 삶도 더욱 풍요롭고 남에게도 유익을 주고 주님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열매 없는 무화가 나무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땅만 버리는 쓸모없는 나무라고 책망하시면서 찍어버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열매없는 무화과나무가 이렇게 혹독한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2.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이렇게 혹독한 책망을 받은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는 관상용이나 건축용으로 심은 것이 아니라 무화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심히 거름도 주고 물도 주고 풀도 뽑아주면 가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는 본래 무화과 나무이기 때문에 무화과를 맺어야 했고, 열심히 가꾸었기 때문에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화과열매를 맺지 못했으므로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뽑아버리라는 준엄한 경고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성도로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세우신 것은 그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함으로 열매를 맺어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고, 자신도 복되고 기쁨이 충만하고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15장은 예수님이 3년 공생애를 마치며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당부와 위로의 말씀을 주고 계신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과 3년 동안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고 나서 이제 때가 되었으니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3년을 구하되 구하지 못했다. 여기서 3년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힐만한 때가 된 이후로 3년입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는 심은지 한 2,3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었는데도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년을 더 기다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열매가 없자 찍어버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이나 식물이나 때가 되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몇 년 정도 지나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3년간 양육하신 다음에 열매를 요구하셨고, 그래서 때가 되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도 3년을 기다려 주다가 안되니까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지 3년 정도 지나면 뭔가 좀 예수님의 자녀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직분을 맡은 지 3년이 지나면 뭔가 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3년이 좀 짧다면 5,6년이면 뭔가 좀 책임있는 역할을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 어떤 일을 시작한지 한 3,4년 지나면 도사는 못되어도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는 않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는 강제성이 없어서 그런지 교회 다닌지 몇 년이 지나도, 심지어는 중직을 맡았어도 책임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강제성이 있거나, 뭔가 눈에 보이는 이득이 있거나, 뭔가 육체적으로 재미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온전치 못한 믿음이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누리는 기쁨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얻는 기쁨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성경 읽고 찬송하고 기도한다면서 교회에서의 책임은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도 모순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밥을 먹고, 왜 열심히 운동합니까? 물론 기본적으로는 살기 위해 먹고, 건강하기 위해 운동하지요. 그러면 그게 답니까? 아닙니다. 열심히 먹고 운동도 해서 건강한 육신을 가졌으면 열심히 성실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컷 먹고 운동만 하고 아무것도 안한다면 그렇게 먹고 운동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우선 내 영혼이 살고 건강하기 위해서이지만 그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영혼을 가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활동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 오늘 이 무화과나무가 어디에 심겼습니까? 만약 이 무화과나무가 저 광야에 있었다면 책임이 덜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포도원에 심겼기 때문에 책임이 더 많은 것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어디에 심겨졌습니까? 포도원입니다. 저 거친 광야가 아니고, 사막지대가 아니고 포도원입니다. 포도원이니 얼마나 살기가 좋습니까? 주인이 양분이 모자라면 거름도 주고, 병충해가 달려들면 병충해 방제도 해주고, 풀이 무성하면 풀도 뽑아줍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엄한 책망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디에 심겼습니까? 대한민국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위에 심겨졌습니다. 거기다가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동산에 심겨졌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책임이 많고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눅12:48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포도원에 심겨져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영적, 인격적, 물질적, 육체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여러분도 더욱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악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의 또 하나의 잘못은 주변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7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여러분, 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 땅만버리고 있다고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열매만 맺지 못한 것뿐 아니라 밭만 버리고 있다 즉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른 곡식도 못 심어 먹게 하고, 밭의 영양분만 다 빨아먹고, 주인에게 헛고생만 시키는 등 많은 손해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은 그냥 나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주변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들이 세금을 안내면 안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사람들까지도 세금 낼 마음이 없어지게 만듭니다. 국가 재정이 휘청거리게 됩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뇌물을 받고, 불법과 편법을 일삼으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실히 열심히 살아갈 마음을 사라지게 만들고 같이 불법과 탈법을 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직분자들이 주일성수도 안하고, 십일조 헌금도 안하고, 수요밤 예배도 안오고, 봉사도 안하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초신자들이나 직분이 없는 분들이 집사도 안 하는데, 권사도 안하는 데, 장로도 안하는데 하면서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라는 포도원을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같은 직분자들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내가 안하면 다른 사람까지도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같은 집산데 같은 권산데 같은 장론데 다른 사람은 안하는데 왜 맨날 나만 쎄가 빠지게 해. 하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안하면 그만큼 누군가가 더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저 예수쟁이들, 말만 잘하고 사는 건 제멋대로고 그럴 바에야 뭐하러 교회다니냐고 욕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모습으로 전도를 하면 너나 잘 다니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천국문을 막고 있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12:3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주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방해하지 않았지만 잘못된 본을 보이고, 좋지 않은 물을 들이고, 남까지도 맥 빠지게 만들어 결국 남까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방해한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에게 땅만 버리고 있다고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는 결코 책임 없이 행동함으로 그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어느 곳이든 주어진 삶속에서 책임있게 성실하게 임함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쳐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며 주님의 역사 이루며 주의 은총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심판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살펴보자면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7절 다시 봅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찍어버려라.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2,3년을 키우고 또 3년의 기간을 더 주었으면 할 만큼 한 것입니다. 충분히 무화과가 열릴 때가 된 거예요. 그런데 안 열려요. 그러면 이건 쭉정이예요. 쭉정이는 필요없는 거지요. 그래서 찍어버리라고 한 거예요. 그러자 과원지기가 1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8,9절이지요.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일년이면 기회가 몇 번 주어집니까? 한번입니다. 한번만 기회를 더 달라는 거예요. 일년동안 최선을 다해 가꿔 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만약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찍어버리셔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물론 이 후에 분명히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열매를 맺었다면 살아남았을 것이고, 불행히도 계속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결국 찍혀 불에 살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심판은 무한정 연기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회가 무한정 주어지는 줄 압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하겠지요.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요. 여유가 생기면 하겠습니다. 안정이 되면 하겠습니다. 늙어서 할 일 없어지면 하겠습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런 내일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그런 내일이 도래하여 그 내일에 충실했다해도 그건 내일의 할 일을 한 것 뿐이고, 오늘 내가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우리 각자가 심겨진 그 곳, 즉 가정과 직장과 마을과 교회에서 책임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어 나로 말미암아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가 더욱 아름답고 풍성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며 여러분 자신도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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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제목 :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말씀 : 고전9:24~27

 

1.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의 농구 코치 중 꽤 유명한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치 노릇을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못해서 유명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사람이 맡은 팀마다 계속해서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찌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치가 한번은 시합에 임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져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오늘도 이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이겨서 챔피언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코치와 선수들이 비장한 각오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그 게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겼다고요? 미안하지만 또 졌습니다. 그래서 코치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게임을 합니까?” 이때 한 선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실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정신력이나 마음의 자세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과 실력이 딸리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부도 안하고 난 시험을 잘 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다고 시험을 잘 칠 수 있겠습니까? 농구도 안 해본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농구선수들에게 덤벼든다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훈련과 노력과 투자를 통해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덮어놓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없는 등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기도만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건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적 이성적 육체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열심히 노력할 때에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1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끊어버릴 것은 너희가 끊어 버려라. 너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가라. 그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자칫하면 이래서 저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못합니다. 하면서 변명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끊을 것은 내가 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내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힘써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2.귀하고 복된 일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훈련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은 귀한 일에 쓰임 받겠다,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한 삶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나아가 그런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잘 참고 견디며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선하고 귀한 일에 열심도 낼 수 없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며 무사안일 속에 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왜곡된 가치 속에 휩쓸려 다니며 잘못된 길로 가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별볼일없는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하여 가치있고 의미있고 고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그래서 자신도 남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풍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때 부와 명예를 얻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했을 때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주님께 부름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였을 때 사도라고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사도 바울을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씀은 버림받아 천국에 못가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망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천국에 못갈까봐 두려워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충성스럽지 못한 종이 되어 주께서 넌 더 이상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 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그 직분 내놔라. 그러실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런 일을 만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넌 더 이상 쓸모없어. 가치가 없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반대로 당신은 정말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에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어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사람들에 유익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요.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히 쓰임받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그저 자신의 안일함과 물질적 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겠다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싶다는 그런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 받고 귀히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가장 귀하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복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져야 하는데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25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목적을 두고 썩어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썩지 아니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며 힘써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또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물론 상을 받는 사람이 여럿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같이 달리기를 해도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최선을 다한다고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 목표를 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야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요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나 소망이나 목표가 아닙니다. 무조건 열심히 해서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것이 소망과 목표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소망이고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이 땅에서도 진정한 평안과 은혜와 부요함을 누리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목표를 가지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졌어도 또 그것을 향해서 아무리 힘써 달려갔어도, 그래서 혹시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어도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빈 쭉정이 인생이 되어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거나 혹은 아예 버림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최종적인 목적을 두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을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나아가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다음에는 그 열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일에 열망을 가졌어도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말씀 그대로 나는 지금까지 방향도 없이 달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허공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주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힘써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달리기 선수가 출발 총성을 듣고 힘껏 달려가는데 도착점을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권투 선수가 주먹을 열심히 휘두르는데 계속 허공을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라고 뛰고, 죽어라고 주먹을 휘둘러봐야 말짱 도로아미타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인생의 경주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이나 목적지도 없이 세상 물결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달리기는 달리는데 썩어 없어질 것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헛고생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은 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혹시 사람에 인정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하여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진정하고 영원한 소망도 열망도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어리석은 삶이 되디 않기를 바랍니다. 또 그 귀하고 온전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말고 혹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면서 주저 앉아있지 말고, 주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의 선한 역사에 힘써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즌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 그것은 절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갈 수도 없고, 또 설령 열심히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파리 한마리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꿀단지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핥아먹던 파리는 달콤한 맛에 정신이 팔려 점점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배를 채운 다음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려고 날개를 파닥였지만 날개가 꿀 속에 잠겨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방 한 마리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꿀단지 속에 들어가면 그럴 줄 몰랐더냐? 욕심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나방은 보란 듯이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잠시 후에 이 나방은 파리가 발버둥치고 있는 꿀단지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나방이 환히 빛나는 등불을 향해 날아가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한쪽 날개가 불에 타서 추락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파닥거리는 나방을 보고 파리가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나방아, 불에 가까이가면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네 불장난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결국 파리도 나방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과 유혹이 파리와 나방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좋은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야 하지만 자신을 잘 다스려 유혹과 욕심을 물리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좋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나 정치인도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나 직업인이나 직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잠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일하고 언제 훈련을 하겠습니까? 또 실컷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다음에 진탕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다면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가고 싶은 곳 다가면서 언제 예배드리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언제 헌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설령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밖에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논다면 기껏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25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자신을 잘 다스려 모든 유혹과 욕심과 욕망을 이겨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나쁜 것을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좋은 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일의 노예로 전락하여 영혼과 육신과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음식도 좋은 것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몸을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답시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입니다. 맨날 철야기도 한다고 직장에 가서 졸고 앉아 있다면 이것도 책망 받을 일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올바른 목표와 열망을 가지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끊을 것은 끊고 삼갈 것은 삼가고 피할 것은 피하고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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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랑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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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부흥하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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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예배설교] 참된 성탄준비

 

 

 


제목 : 진정한 성탄 준비

말씀 : 요17:14-17

1.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물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되새기며 주님을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약 왕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어떻게 왕의 예우를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또 만약 왕이 나에게 높은 자리라도 하나 주려고 왔는데 난 높은 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돈이나 한보따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나 지위는커녕 왕의 분노만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참 뜻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실망과 좌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성인군자라고 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어떤 경우는 건강이나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집안이나 거리나 상점이나 교회에 여러 가지 장식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정작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되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성탄축하프로그램도 하고 외부장식도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들도 도우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도 당연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성탄절이웃초청잔치도 하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하며 성탄절 헌금의 거의 전부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주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로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배 만배 억배 중요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마1:21절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류가 이 땅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원토록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발달해도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대강절을 맞아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이 넘침으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마6: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진대 어떻게 악 가운데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악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은혜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도 모든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많은 인생들이 이걸 몰라서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 안에서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가운데 살아갈때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인데 오직 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면서 악한 방법으로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할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틈이 벌어져 갈등과 불신과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는커녕 갈등과 불화와 상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행하면서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다음에는 진정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누리며 주님의 향기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고 믿음과 사랑과 의와 선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달콤하고 교묘한 유혹과 도전과 왜곡된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이 우리 심령 속에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되고 악한 것들에게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간파하고 즉시 물리치게 됩니다. 감히 마귀 따위가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겁 없이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아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환경과 왜곡된 가치관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만한 분별력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 향락주의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게 되고, 악을 분별하며 거부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감으로 거룩한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대부분이 미동도 안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모입시다. 기도합시다. 예배드립시다해도 꿈쩍도 안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또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선과 의와 진리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면서 주님이 오신 참뜻을 바르게 알고 진실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이 왜곡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 아직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여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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