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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예배설교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

 

 


말씀 : 요20:19~21

제목 :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

 

1.매순간 부활의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주일은 지난 주일만이 부활주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부활주일이고 다음 주일도 부활주일이고 매주일 아니 매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난 주일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심령 속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가운데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이 매일 매순간 함께하며 힘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니까 이천여년전의 그때만 아니라 또 매년 돌아오는 부활절 뿐 아니라 우리는 매순간 부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주일 하루만 주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다. 와! 대단하시다. 이런 구호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여 부활의 주님이 내 삶을 지배함으로 매일 매순간 부활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이 그냥 그 옛날 이천여년전에 부활하신 주님으로 끝나버린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역사적 사실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성, 경험, 과학, 지식, 논리를 초월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인류의 유일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세주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인정한 다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지금 나와함께 계신 부활의 주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그 은혜와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인정은 행동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나팔은 불기 전까지는 나팔이 아니며, 노래는 부르기 전까지는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걸 따라가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려면 마땅히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고 교제하고 대화하고 사랑하며 경배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주님이 온전히 내 심령속에 거하게 됨으로 자연히 부활의 주님의 그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충만하게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20:38절에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심령속에 모신 사람은 그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여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이시며 그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사람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함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는 정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내 심령의 왕좌에 모셔 들이고 그 주님과 온전히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늘 주님과 가까이 대화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통치자, 나의 주권자, 나의 인도자로 온전히 인정하고 그 부활의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 때에 저와 여러분은 진정 살아있는 자로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주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어떤 능력이 임하게 됩니까?

 

2.세상의 모든 슬픔을 이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면 우리 모든 슬픔과 아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당연하고 지금 여기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의 모든 어두 것들을 넉넉히 이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 즉 마귀 사탄, 어둠의 권세, 무덤의 권세,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기지 못할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오늘 말씀 바로 앞부분에 보면 너무나 큰 슬픔에 빠져 있던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요20: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였는데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지금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너무나 큰 아픔과 슬픔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눅23:27절에 보겠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가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마27:56절이나 막15:40에 보면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이 그 모진 고문과 멸시천대와 채찍질을 당하시고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피를 흘리며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고통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마27:61절에 보면 아리마대 부자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지내 드릴 때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3시였는데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 여섯시 장례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 세 시간동안 빌라도에게 가서 허가를 받고 예수님의 시신을 끌어내려 무덤까지 모시고 가서 몸을 씻겨 드리고 향품을 바르는 등 모든 절차를 제대로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장례는 서둘러 대강대강 진행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던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 모진 고통과 멸시천대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만도 너무나 마음이 아픈데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가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다가 안식일이 끝난 첫새벽에 부랴부랴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수님의 무덤가를 찾은 마리아는 또다시 좌절감에 빠집니다. 어떻게 향품이라도 한번 발라드리려고 잠도 못자고 기다리다가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건만 이번에는 그마나 그 시신마져 없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셨는데 그나마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드리지 못하여 향품이라도 어떻게든 발라드리려고 가져왔는데 시신마져 없어졌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슬픔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20:1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부활하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인자하신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그제서야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랍오니’하고 대답합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오 주님, 주님 맞습니까? 오, 선생님. 정말 선생님이시네요. 이런 이런 정말 주님이시네요. 주님이 정말 살아나셨군요. 오 주님,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선생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살아계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슬픔에 잠겨있었으니.. 오 주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의 슬픔은 단번 싹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따랐던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을, 근심대신 찬송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61:3 상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이런 은총이 주어집니다. 슬픔 대신 기쁨을 주십니다. 근심대신 찬송을 주십니다. 절망 대신 소망을 주십니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망권세, 어둠 권세 모두 이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도 남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 혹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근심과 염려가 있을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찾아오셔서 마리아야! 조목사야, 김장로야, 이권사야! 박집사야! 아무개야! 하면서 불러주십니다. 그러면 그 한마디면 끝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 염려 슬픔 다 물러갑니다. 아무개야! 걱정말아라. 슬퍼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잖니? 내가 너를 도우마. 내가 네게 힘을 주마. 내가 너를 건져주마하시며 다가오셔서 우리로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절망속에 빠져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그 모든 근심 걱정 슬픔 절말 한방에 싹 물리쳐 주신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갈 때에 그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어렵고 힘든 일들을 다 이기고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19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와, 우리 선생님 대단하시다. 와, 우리가 이 굉장하신 분의 제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인가! 와, 이런 분이라면 우리가 목숨을 바쳐도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했던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로마병정들에게 당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시자 그들은 그만 겁에 질려 모두 도망가 버렸고, 죽어도 모른다고 부인했고, 고향으로 돌아기도 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대대적으로 환영했던 군중들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니 도망가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인 저들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려움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문을 잠겨져 있는데 예수님이 불쑥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무슨 말씀입니까? 왜 두려워 하느냐? 보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보라 내가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이 다시 살아났느니라. 나는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내가 너희가 힘을 주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를 만져보라. 나를 의지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평강을 주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2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두려움과 절망 속에 꽁꽁 묶여 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을 묶고 있던 두려움이 끈이 풀린 것입니다. 절망의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토록 믿었던 주님,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그토록 의지했던 주님을 잃고 실의와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생명의 빛이 찾아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고 좌절과 슬픔속에 빠져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기쁨을, 근심 대신 찬송을 주셨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실의와 좌절과 두려움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동일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로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처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승리자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세상의 두려움과 약함과 핍박을 이기고 주님의 평강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영원한 생명뿐만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용기와 담대함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슬픔 두려움 절망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다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께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평강이 나와 함께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6:3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사노라면 때로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대적자들의 도전으로 환난을 당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면 너희 또한 세상을 이길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평안을 누릴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약함과 추함과 죄와 어둠과 지옥과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천년전에 부활하셔서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부활의 주님과 늘 가까이서 교제하며 대화하며 의지하며 신뢰하며 믿고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약하고 부족하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더럽고 추한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이기고 주님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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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부흥하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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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예배설교] 참된 성탄준비

 

 

 


제목 : 진정한 성탄 준비

말씀 : 요17:14-17

1.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물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되새기며 주님을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약 왕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어떻게 왕의 예우를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또 만약 왕이 나에게 높은 자리라도 하나 주려고 왔는데 난 높은 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돈이나 한보따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나 지위는커녕 왕의 분노만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참 뜻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실망과 좌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성인군자라고 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어떤 경우는 건강이나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집안이나 거리나 상점이나 교회에 여러 가지 장식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정작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되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성탄축하프로그램도 하고 외부장식도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들도 도우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도 당연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성탄절이웃초청잔치도 하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하며 성탄절 헌금의 거의 전부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주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로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배 만배 억배 중요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마1:21절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류가 이 땅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원토록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발달해도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대강절을 맞아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이 넘침으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마6: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진대 어떻게 악 가운데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악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은혜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도 모든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많은 인생들이 이걸 몰라서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 안에서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가운데 살아갈때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인데 오직 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면서 악한 방법으로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할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틈이 벌어져 갈등과 불신과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는커녕 갈등과 불화와 상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행하면서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다음에는 진정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누리며 주님의 향기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고 믿음과 사랑과 의와 선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달콤하고 교묘한 유혹과 도전과 왜곡된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이 우리 심령 속에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되고 악한 것들에게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간파하고 즉시 물리치게 됩니다. 감히 마귀 따위가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겁 없이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아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환경과 왜곡된 가치관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만한 분별력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 향락주의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게 되고, 악을 분별하며 거부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감으로 거룩한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대부분이 미동도 안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모입시다. 기도합시다. 예배드립시다해도 꿈쩍도 안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또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선과 의와 진리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면서 주님이 오신 참뜻을 바르게 알고 진실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이 왜곡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 아직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여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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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 어떻게 사랑할까요?

 

 

 
찬송 : ‘하나님은 외아들을’ 294장(통 416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요한일서 4장 7∼11절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해관계를 따지고 이유와 조건을 붙인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첫째로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심으로 친히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추하고 더러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셨으며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조건 없는 사랑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행해야 합니다. 이 조건 없는 사랑이 자신과 가정, 교회와 사회를 더욱 밝게 합니다.

 

둘째로 손익 계산 없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사귈 때 손익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계산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때문에 공생애 3년 동안 완전한 헌신과 봉사,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피와 눈물, 땀 한 방울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철저한 희생을 하셨습니다.

손익 계산 없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시고 영육이 병든 자를 고쳐주셨으며 죄인들을 구원하심으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계산이 없습니다.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키우면서 계산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식을 키우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거울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빚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계산 없이 갚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 땅에 왔습니다. 한마디로 모두가 다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도 차별 없이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롬 10:12)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차별 없이 구원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세리도 사랑하시고 창기도 사랑하셨으며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차별이 없는 사랑으로 이 사회의 아픔을 치료하여 서로가 화합하는 평화의 현장으로 만들어야겠습니다.

 

기도 : 인류를 구원코자 독생자 외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와 저주, 멸망에서 건져주시고 조건 없이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주께로 인도하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김요셉 목사(선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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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고난의 의미

 

 

 

제목 : 고난의 유익

말씀 : 롬5:1-4

17세기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며, 거의 성자에 반열에 오를 큼 훌륭한 목사였던 죤 번연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사실 신학을 전공한 분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분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의 직업은 함석이나 쇠붙이 등을 붙이고 때우는 땜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고 수십번씩 성경을 읽으며 기타의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세상적인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그는 목사가 되었으며(침례교에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음.) 기독교 교리서와 기도문 등의 많은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천로역정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읽혀져 많은 도전과 소망을 주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파란만장했다. 그는 침례교의 설교자였는데 국교파의 모함을 받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만하다가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찍 하나님품으로 가고 말았다. 큰 딸 메리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두 아들은 번연만큼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불후의 명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기독교인이라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가?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치기 힘든 질고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물론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류가 고통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고통의 현실에 직접개입하지 않으실까? 물론 무언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1.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열심히 부모를 찾는다.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열심히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멀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벌써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지나며 점점 멀어져 그때부터는 별로 찾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힘없고 빽없고 혼자 살기 어렵고 고통의 현실이 있으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쉬운 게 없으면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통과 어려움과 아쉬운게 없이 평안해지면 슬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평안히 거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고역으로 힘들어지자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가정적으로도 평안할때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여하튼 무언가 시련과 고통이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아시기에 여러번 평안하고 형통할 때 조심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31:20,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 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환난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세의 노래 즉 이스라엘의 배교를 경고한 노래를 통하여 비로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어리석어서 평안할 때 주님을 멀리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으로 경고를 보내신다.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엎드리라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 마는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 인생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혹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축복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 앞에 더욱 엎드리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도리어 복의 기회로 만들어가자.

2.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다지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부족한 것도 없다면 천국이 무에 그리 그리워지겠는가? 그저 세상의 것에 빠져서 무사안일하게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 하신 것이다. 먹고 배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 천국이 그렇게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의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고, 천국을 사모할때에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더욱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천국을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천국의 은혜를 앞당겨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3.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현실을 허용하신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

그래서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했다. 또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그 앞에 엎드리자.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인생의 구렁속으로 몰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앞에 더욱 엎드려 살아갈때에 어떤 어려움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자.

4.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살고 있는 땅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산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성장하여 아주 단단하게 되었고 뿌리도 깊이 내려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뿌리도 깊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더위나 추위나 습도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기 쉽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고통의 현장속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심지어는 환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수 있는가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비록 고통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결국 이겨내고 은혜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할때에 결국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훈련되어지고 그렇게 잘 훈련될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를 더욱 소망위에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에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고난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고난은 분명히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쓴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혹시 고난의 현실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더욱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기 위한 것이든, 더욱 우리를 소망위에 세우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혹시 우리의 죄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케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현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하여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누릴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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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하나님의 사람의 감사 찬양

 

 


제목 : 하나님의 사람의 감사찬양

말씀 : 삼하23:1~5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어차피 인생살이 재미도 없고 소망도 없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했을 걸, 저렇게 했을 걸 하면서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후손들에게 좋은 유훈을 남겨 주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만하면 족하다고 나름대로 자부심과 만족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사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다 죽어가면서 무슨 감사찬양이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감사찬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습니까?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을 받았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무엇보다도 예수님 만나 천국백성이 되었고, 이제는 남은 것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일뿐인데 어찌 감사찬양이 없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다윗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임종을 앞두고 하나님께 감사찬양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는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이렇게 찬양 할 수 있었습니까? 무엇을 찬양했습니까?

1.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감사찬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 전체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감사찬양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보십시오. 높이 세워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높아지고, 왕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왕이 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왕으로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즉 다윗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감사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다면 감사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민 가운데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심에 감사찬양해야 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존귀한 신분을 주신을 기억하며 감사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과거에 우리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마귀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속에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영광을 돌리고 얼마나 찬양할 일입니까? 세상에 이보다 귀한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잘나고 똑똑하고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축복 속에 살게 된 것을 늘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은 순간까지도 감사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2.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에 감사찬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찬양하고 이어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을 찬양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러니까 다윗은 왕으로 세움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도 인정받게 되었음을 고백하며 감사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론 이것은 다윗이 자신을 자랑하거나 혹은 그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때로는 실수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최선을 다해 나라를 다스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으로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최대한 준행하며 살게 된 것을 감사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도 정말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찬양해야 합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하여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이나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아직도 너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하나님 두려운 줄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았더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를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주시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영광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을 기억하며 감사찬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3.성령 안에서 활동하며 감사찬양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윗은 또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주님과 동행한 것을 감사찬양했습니다. 2절 말씀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다. 즉 이 말씀은 그냥 자기 생각이나 소원대로 의지대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은혜를 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늘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100%는 아닙니다. 그도 때로는 엄청난 실수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세상의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10년이 지나도록 온갖 설움을 견디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도 오히려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도 그에게 손을 대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을 때 선지자 나단이 찾아가 비유로 양 아흔 아홉 마리를 가진 사람이 손님이 찾아오자 자기 것을 아끼고 한 마리 양밖에 없는 가나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고 하자 그런 놈은 당장 죽여야 한다고 하니까 그게 바로 당신이라고 책망하자 즉각 겸손히 엎드려 눈물로 침상을 띄울 만큼 울면서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거의 절반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행13:2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여러분, 인생의 성공의 조건은 얼마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느냐, 얼마나 성령이 충만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하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악을 분별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십니다. 어둡고 칙칙하고 더러운 것들이 물러가고 희망과 소망 속에서 살게 됩니다. 용기와 담대함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그 뜻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평안하고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이 나오고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모든 원망 불평 좌절 미움 증오 시기 질투 따위가 사라지게 됩니다.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받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 앞에서도 감사찬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더욱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찬양하며 살아갈 때에 더욱 성령충만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약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고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평안과 소망과 찬양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미래의 축복을 믿고 감사찬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기쁨으로 감사찬양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과거에 이렇게 축복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영원히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누가 그렇다는 것입니까? 3절의 말씀처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은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인도하셨거니와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원한 언약을 지키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셔서 모든 소원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임을 믿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지금도 인도하시고 또한 자손만대로 복을 주셔서 돋는 해와 같이 빛나고 복된 인생이 되게 하실 것을 믿고 감사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은혜 주신다는 믿음,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다는 믿음, 자손이 복을 받는 길이 무엇이냐, 정말로 복되고 아름다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이냐, 가정이 잘되고 교회가 잘되고 국가가 잘 되는 길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따르며 주님과 동행할 때라는 믿음, 오직 하나님 안에 행복이 있고 거기 축복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뭐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복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오직 그 안에 우리 인생이 가야할 길이요 있고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복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수없이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자에게 복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 약속을 믿고 주님 말씀따라 살아가는 자에게 얼마나 복을 주시겠습니까? 그 삶에 얼마나 감사찬양이 넘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 인도해 주신 하나님, 축복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늘 감사찬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지금도 인도하시는 하나님, 미래에도 축복해 주실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 오직 우리의 유일한 등불이며 생명의 빛이신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으로 죽는 순간까지 감사찬양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흡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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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헌신예배]영광스러운 사명


 

 


말씀 : 시69:30-32

제목 : 영광스러운 사명

1.영광스러운 사명, 찬양의 직분

여러분, 무언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려면 물론 필요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것은 기독교적인 용어로는 소명감이고 사회적인 용어로는 사명감입니다. 소명감이란 무엇인가를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의식이고, 사명감이란 무언가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책임감입니다. 이러한 소명감 내지는 사명감이 분명할 때 그 일에 열정을 낼 수 있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이 하는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아니면 시시하다면 누가 그런 일을 위하여 열심을 낼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자신이 하는 일이 정말로 너무나 귀한 분이 맡겨주신 너무나 중요하고 귀하고 복된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열심을 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성가대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성가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얼마나 예배에 은혜를 끼치는 일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가대원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책이었습니다. 대하5:12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은 성가대장들이고 그 아들들과 형제들은 성가대원입니다. 즉 레위자손 중에서, 그것도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이라는 가문을 구별하여 이들을 성가대장으로 세우고 이들의 후손들을 구별하여 세마포 옷을 입혀서 찬양하는 직무를 감당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찬양은 하나님께서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고 너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특별히 구별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옷을 입혀 찬양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오늘 말씀 30,31절을 보세요.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제물보다 찬양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물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제물에 담긴 진정한 신앙 고백, 감사, 헌신의 마음이 중요한데 찬양은 바로 그런 신앙의 고백이요 감사와 헌신의 표현이기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찬양을 기뻐하시면 사43:21절에서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겠습니까? 성가대원은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는 찬양사역을 맡았기 때문에 너무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직책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원 여러분, 여러분들이 감당하는 이 찬양의 사역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기억하며 정말 감사하며 영광으로 알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기쁨으로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사명보다도 귀한 사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이 사명을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여러분도 더욱 은혜 가운데 신앙생활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찬양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도 찬양을 좋아하시고 찬양하라고 강조를 하고 계십니까?

2.가장 중요한 신앙고백, 찬양

이거 정말 여러번 강조해서 말씀드렸지만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은혜와 사역을 인정하며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사랑, 자비로우심을 생각하면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분의 그 절대적인 사랑과 능력 앞에 찬양이 안 나올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 엄청난 우주만물을 보십시오. 일월성신을 보십시오. 사람을 보고 식물과 동물을 보십시오. 사람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새들의 노래를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세요. 얼마나 신비합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게 만들어 질 수 있습니까? 누가 만들 수 있습니까? 저절로 되었다?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또한 날마다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은혜들을 생각해 보세요. 저 해와 달과 별과 시냇물과 맑은 공기와 물과 땅과 아름다운 대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들을 생각해 보세요. 나아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세요. 나 같은 죄인 위해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서 건져 내시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심을 생각해 보세요. 어찌 찬양 안 하겠어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찬양과 믿음은 비례합니다. 물론 찬양 잘하는 사람이 다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반드시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습니까?

시150:1,2절을 보세요.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을 생각할 때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자비와 거룩함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기억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며 큰 은혜 가운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별히 성가대는 이 너무나 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정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믿음을 다하여 찬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에 은혜를 끼치고, 여러분도 더욱 큰 은혜를 받아서 더욱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케 하는 찬양

여러분, 그렇습니다. 찬양은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찬양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1)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대하 5:13절 보세요.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언약궤를 옮겨 놓을 때의 장면입니다. 언약궤를 옮겨 놓으며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이 찬양할 때에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양할 때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니 거기 영광이 가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니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찬양의 은혜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2)찬양할 때 악령이 물러갑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데 감히 어떤 어둠의 세력이 거기 머물러 있겠습니까? 삼상 16:23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찬양할 때에 귀신이 물러갔던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예수님을 진정으로 고백하고 찬양하는데 감히 어떤 마귀가 겁도 없이 대들겠습니까?

3)찬양할 때 대적이 물러갑니다.

대하 20: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행16:25,26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찬양은 신앙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높여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든 대적자들은 물러가게 됩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절망 등 모든 어둠은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4)찬양할 때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시105:2,3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찬양은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찬양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찬양하는 영혼은 은혜가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찬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성가대는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은혜 충만한 예배를 위한 필수요소, 찬양

1)예배 전 찬양을 통해 은혜를 받음

여러분, 성가대는 적어도 20분전에 예배당에 들어와야 합니다. 들어와서 가능하면 성가대 지휘자가 준비찬양을 인도해야 합니다. 물론 찬양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만 기왕이면 찬양도 잘하는 게 훨씬 은혜롭습니다. 특별히 인도자가 은혜롭게 찬양을 인도하면 하나님께도 더욱 큰 영광이 돌려지고 함께 찬송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훨씬 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에는 장로님들이 예배 전 찬양을 인도하시다가 요즘에는 어쩌다가 찬양을 잘 못하는 제가 하게 되었는데 사실 우리 장로님들이 저보다 훨씬 찬양 잘 하십니다. 저보다 음도 정확하고, 음성도 좋고, 은혜롭게 잘 부르십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너무 처지고 감상적인 곡을 위주로 하셔서 좀 밝고 씩씩하고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분위기로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몇 번 말씀 드렸더니 그만 장로님들이 안 하시는 바람에 제가 떠안게 되었는데 사실 이거 성가대가 할 일입니다.

성가대 지휘자가 때로는 주님의 은혜를 조용히 되새기며 은혜롭게, 때로는 활기차고 힘찬 찬양을 통하여 예배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가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심령이 열리고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말씀도 꿀맛처럼 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예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는 조금 일찍 와서 일찍 연습을 마치고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성도들도 좀 일찍 오시기 바랍니다. 일찍 와서 조용히 기도하고 성가대의 인도가운데 은혜롭게 찬양함으로 마음을 열고 은혜를 받음으로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예배 중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성도들에게 은혜.

성가대의 핵심 사명은 예배 순서에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드리는 것을 말씀 들으러 왔다고 생각하시는데 물론 말씀 듣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무엇을 얻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1차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말씀 못지않게 예배의 핵심적인 요소이고 그러기에 성가대의 사명은 막중한 것입니다.

물론 예배 중에 우리가 다 같이 찬송을 합니다. 낮 예배시에는 네 번, 기타 예배시는 보통 두 번 찬송을 통하여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성가대의 찬양은 특별한 찬양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여러 사람 가운데 특별히 뽑아내어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열심히 준비하여 드리는 찬양입니다. 그래서 성가대의 찬양은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찬양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뽑아내서 열심히 연습을 시켜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노래를 불러주는 것과 어느 편이 더 기쁘고 흐뭇하겠습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가대원은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준비해서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우리가 함께 은혜 받고 은혜가 충만한 예배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성가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배 순서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영광, 성도들에게 은혜.

여러분, 성가대는 찬양 뿐 아니라 예배 순서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묵도시에 성가대 주악으로 시작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기도송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헌금 시 헌금송을 부르고, 폐회시에 폐회송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성가대가 이런 묵도송, 기도송, 헌금송, 폐회송을 부를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성가대가 순서에 합당한 찬송을 부름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리고 나아가서 성도들이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다듬게 되고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심령의 문을 활짝 열리게 하고 그래서 더욱 큰 은혜를 받게 되어 살아있는 예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32절을 보세요.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곤고한 자 즉 힘들고 지쳐 주를 바라보는 자들이 찬송 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소생함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을 통하여 은혜를 받게 되고, 예배 순서를 찬양으로 도움으로 모든 예배 순서 속에 더욱 은혜가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원 여러분, 정말 성가대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며 감사함으로 역할을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열성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들 돌리고 예배를 은혜롭게 만들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는 우리 성가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최상의 찬송이 되도록 정성껏 준비해야 함.

찬양은 사람에게도 은혜를 끼치는 노래이지만 우선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노래보다도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준비해서 최상의 찬송이 되게 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만약 대통령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준비한다면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하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여러분, 성가대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웬만한 교회는 평일날 별도로 모여서 연습합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에 일찍 와서 연습하고 또 예배 마치고 연습하고 최소한 서너 시간은 연습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워낙 수준이 높아서 별로 연습 안해도 잘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좀 더 해야 합니다. 아무리 못해도 주일 아침에 30분, 예배 마치고 30분 모두 한시간은 해야 합니다. 물론 이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만 정말 최소한도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시48:1절을 보세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극진히 찬양을 받으신다. 즉 힘을 다해, 전력을 다해, 온 정성을 다해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극진하게 찬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무엇이든 최상의 것을 최우선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성가대원 여러분, 찬양은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시는 일이고, 큰 능력이 있어서 어둠을 물리치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고, 우리의 심령에 감동감화와 즐거움과 평안을 줍니다. 그러므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더욱 은혜 충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성가대원들은 이 귀한 찬양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이 사역을 감당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열심히 준비하여 최상의 찬양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성도들에게는 큰 은혜요, 여러분들에게는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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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설교] 예수님 부활의 증거

 

 

 

말씀 : 고전15:1-8

제목 : 부활의 증거들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만해도 그렇습니다. 이성적, 논리적, 과학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이 세상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법칙에 의하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나거나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물질도 생명도 질서도 절대로 저절로 생겨 날 수 없습니다.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면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나도 세상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과학적으로는 절대로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그냥 저절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세상의 어떤 것도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저절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대답은 하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의 모든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니 모든 이성이나 지혜나 과학이나 질서나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모든 과학과 지성과 이성과 경험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상식과 이성과 경험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행2: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결단코 사망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의 부활은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직도 이성과 경험안에 갇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1)성경과 예수님이 증거입니다.

부활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4절을 보겠습니다.“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은 미리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53:5절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16:10절에서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여기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즉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고하였고, 주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이 뭐가 되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허무맹랑하고 휘황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정신 이상자가 기록한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희대의 거짓말장이요, 과대망상자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그만큼 강조해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의 증언과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거짓된 소리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성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나는 죽을 거다. 살아날 거다 말씀하셨는데 성인으로 믿는다면 따라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과대망상주의자, 정신이상자로 몰아가야 정상 아닙니까? 또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그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성경이 어떻게 200여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수십억권이 팔린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하여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따르든지 아니면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있는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쓰레기 같은 것으로 여기든지........

지난 주일에 전도를 하다보니까 윗마을 버스 정류장 밑에 집 할아버지가 자기네 가문에서 사회로 진출했으면 판검사는 넉넉히 하고도 남을 제일 똑똑한 두 놈들이 하필이면 목사가 되었다고 한탄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할아버지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십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다시 오신다. 예수님 믿어야 죄용서받고 천국간다. 당신네들은 그걸 미친소리라고 하는데 그 똑똑한 두 놈이 바보 멍청이 천치라서 그걸 믿고 그걸 전하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분명히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진정 유일한 부활의 주님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시오, 심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빈무덤이 증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무덤이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냈을 때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다가 감춰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릴 것을 우려하여 무덤입구를 큰 돌로 막은 다음에 바위와 무덤 양쪽 벽에 밧줄로 여러 번 동여매고 진흙을 발라 인봉을 했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을 세워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밧줄 아니라 쇠사슬로 백번천번만번을 묶어놔도 소용없고, 진흙 아니라 쇳물을 부어놔도 소용없습니다. 경비병 아니라 경비병 할아버지를 세워놔도 소용없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는 무덤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임으로 무덤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28: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천하없는 사람이라해도 다 무덤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망권세 앞에 그 어떤 조그마한 저항도 한번 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80세에 식중독으로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져 무덤에서 끝났습니다. 공자는 곡부성의 사수언덕에 안장되어 커다란 무덤을 남겼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은 62세에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무덤을 박차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무덤이 성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덤의 권세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서는 생명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무덤에 갇힌 자가, 사망 권세에 진 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셨기 때문에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덤에 집착하지 마세요.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연속극에 보면 무덤 앞에 가서 막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데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부질없는 짓입니다. 거기 뭐가 있습니까? 생기가 있습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있다면 썩어 냄새나는 시체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무덤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만 생명과 희망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 천하없는 것이라해도 다 무덤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진정한 생명과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시고 살아가면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래서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들앞에 나타난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만해도 16번이나 됩니다.

오늘 본문 5-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심어는 500여명이 모여 있는 곳에도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확인하였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러다가 500여명의 문도들이 보는데서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 보았고, 귀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산증인이 되어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제자들의 삶이 증거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만 해도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하나같이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일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분안에 있는 생명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다고 증거하다가 하나같이 다 순교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바보가 거짓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요새 말로 총 맞았습니까? 안 그래요? 혹시 돈이나 한보따리 안겨 주든지 무슨 큰 권세나 하나 준다면 몰라도 돈이나 명예는커녕 환난과 핍박과 죽음만이 돌아올 그 일을 위해서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래서 잠시 잠깐 있는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더 소중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춘다고 감춰질 일이 아닙니다. 내가 믿지 못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이 안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 화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알량한 이성과 지식과 경험속에 갇혀 거짓말이다, 환상이다, 신화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과연 정말 부활할 수 있을까하면 의심하거나 잘 믿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걸어나올 수가 있지?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가 있지? 어떻게 물이 갈라져 벽처럼 설 수가 있지? 여러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경험의 한계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주님의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약한 것들과 절망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 모든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그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다 이기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의 촉구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내 작은 이성과 지식과 경험의 틀을 깨트려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약한 것들, 부족한 것들, 어려운 것들, 죄된 것들 다 이기시고 영원한 승리자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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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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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가장 큰 지식

 

 

 

제목 : 가장 큰 지식

말씀 : 벧후3:14~18

우리는 물론 가장 좋은 것, 가장 행복한 것, 가장 기쁨을 줄 수 있는 것, 가장 멋진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바라본다. 그래서 금은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장식하게 되면 한 번 더 보게 된다. 멋지게 지어 놓은 집이 있어도 한 번 더 보게 되고, 차도 크고 멋진 차가 지나가면 보게 되고, 예쁜 꽃이나 예쁜 사람이 있어도 눈길이 한 번 더 가게 된다. 왜 그런가? 웬지 그런 것들이 좋아보이고, 또 뭔가 기쁨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일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 기쁨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정말로 행복하게 하는 게 뭘까? 물론 주님이시다. 주님이 주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이다. 물론 세상의 것들도 기쁨을 주긴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다. 진짜 기쁨도 주지 못하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지도 못한다. 도리어 그런 것들 바라보다가 실망만 느끼고 거기에 얽매여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와 질투에 빠지기 쉽고 그러다가 진짜배기는 놓치고 헛것만 따라다니다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기 십상이다.

1.인생의 궁극적 목적지, 목표

벧후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것을 바라보나니..’ 이것은 앞 절의 말씀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가 오직 바라보아야 할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씀.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기다리다, 찾다, 기대하다.’는 뜻으로 진정한 목표와 소망과 기쁨이 되는 대상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며 열심히 찾고 그야말로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렇게 목을 길게 빼고 소망하고 사모하고 기다리며 열심히 찾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씀이다. 당연하지 않나? 정말로 우리에게 생명의 풍성함과 은혜와 기쁨과 감격과 평안을 줄 것이 무엇이 있겠나?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건강이나 권세나 영광은 결코 우리에게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주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가지고 있는 동안도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주지 못하거니와 그야말로 다 쇠하고 썩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들이다. 우리의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지도 못하고 온전한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도 되지 못하고 그야말로 일장춘몽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들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 저 영광의 나라는 다르다. 그 나라는 시간적으로는 영원하고, 질적으로는 완전하고,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즉 전인격적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의 기쁨을 제공한다. 말 그대로 어떤 어둠도 아픔도 슬픔도 미움과 시기도 싸움도 죽음도 없는 곳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행복의 나라이다. 그래서 오직 이 영광의 나라만이 진정한 우리의 소망이고 희망이다.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도 평안과 기쁨과 위로 속에 살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모든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근심 걱정과 미움과 증오와 원망과 불평도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다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오직 예수, 오직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예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다가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의 삶.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새 하늘과 새 땅임을 말씀하신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들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흠없이 평강가운데 서도록 힘써야 함

벧후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은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가운데 주님 앞에 서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점이란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을 말하고, 흠이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점은 더럽고 속되고 추한 것이 추가된 상태이고, 반대로 흠이란 책임과 의무와 사명과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론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100% 안하고, 해야 할 것을 100%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면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이나 풍조와 습관이나 문화에 빠져 할 일을 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만 힘쓰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삶을 살도록 힘은 써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고 진실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주신 사명 감당해야 한다. 더럽고 추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써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향기를 나타내고 주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 앞에서 잘 했다 칭찬받고 상급 받는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인내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함

벧후3:15,16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이것은 주로 재림이 지연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씀을 묵상하며 재림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알라는 것은 앞의 9절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빨리 오시지 않는 것은 한 영혼이라도 더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바울도 그와 같이 썼고, 그 중에 풀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는 것은 바울 서신 들 중에서 특별히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들을 말한다.

실제로 바울은 살전후서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재림에 관하여 말씀했다. 특히 살전4:16,17절에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주님의 재림은 너무나 분명한데 그 과정이나 방법 등은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았고 너무나 신비로운 일이라서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대해서 혼자 연구를 하거나 무슨 이상한 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냥 말씀 그대로 믿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넘어가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특히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 백보좌 심판, 천국과 지옥에서의 삶의 모습들, 이런 것들은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 밖에는 우리는 알 수 없다. 어떤 목사님들이 요한계시록을 그럴듯하게 해석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도 하는데 그러나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 외에는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성경대로만 믿으면 충분하다. 공연히 영적 호기심으로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연구하다가 이단이 나오고 삼단이 나온다. 그래서 실족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래서 억지로 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떤 때보면 성경의 어떤 사건이나 말씀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따지기도 하고 의문을 품기도 하는데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결코 성경에서 넘어가면 안된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전4:5,6절에서 말씀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의 때나 방법에 대하여 혹은 천국과 지옥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혹은 성경의 여러 가지 사건이나 말씀에 대하여 그냥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만큼만 그대로 믿으라. 그것으로 생명력 있는 믿음 생활하기에 충분하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에 충분하다. 공연히 자기 생각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으로 억지로 풀어보려고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서 안 가르쳐 주신 것은 몰라도 된다. 몰라도 되기 때문에 안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냥 순진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씀그대로 믿고 그러 성실하고 진실하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감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운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섦으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미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

벧후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여 자신도 멸망의 길로 가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왜곡된 뜻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다른 사람까지도 미혹시켜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런 미혹자들을 잘 분별하여 절대로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것도 정말 조심해야 한다. 우리를 미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때로는 신학자들도 엉뚱한 소리를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사람들이 다 짜깁기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중에 어떤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것은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나님 운운하면서 성경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한다. 이단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어떤 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다가, 어떤 자들은 기도하다가, 어떤 자들은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시를 주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성경도 제멋대로 해석하여 그럴듯하게 꾸며낸다. 그리고는 신비한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유창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이런 영적인 미혹 뿐 아니라 왜곡된 사상과 가치와 관습과 문화와 과학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한다. 마귀사탄은 한편으로는 온갖 음모술수를 꾸며 공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사이좋게 놀자며 화전양면작전을 구사하며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 성경에 기록된 것 이외는 믿지 말라. 성경에서 넘어가는 것은 배격하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서,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만, 성경의 내용 그대로 믿으라. 누가 어떻게 미혹하고 유혹하고 별의별 소리를 다해도,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믿어야할 건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만이 완전히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안내자이다. 유일한 법전이다. 유일한 인간 사용설명서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의 검증을 받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대로 믿고 따름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4)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함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마지막 결론적 말씀이며 권면이다. 이것이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하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힘써야 하고, 무법한 자들이나 세상의 왜곡되고 잘못된 가치관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거짓 영들에게 미혹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해져야 하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혹은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가 가운데 자라라는 것은 더욱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하심과 인도하심과 지금까지 때를 따라 필요한 것들로 채워주신 그 은총을 바르게 알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 속에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맡기고 그 방법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은혜가 충만한 자의 모습이다. 그러면 우리 삶이 더욱 힘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고, 열심이 있고 감사가 넘쳐나고 그렇게 되면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게 된다. 그 은혜와 능력으로 대적자들의 미혹과 유혹을 물리침으로 승리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된다.

그런데 은혜와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말씀 없이 은혜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은 말씀을 가까이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동시에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올바른 믿음 생활이 가능해진다. 말씀 없는 은혜는 자칫하면 속을 수도 있다. 올바르지 못한 신비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은사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자신의 신앙적 관점에서 은혜를 생각할 수도 있다. 마귀사탄은 이런 허점을 이용하여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말씀 위에 든든히 선 상태에서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면 진정으로 생명력이 넘치게 된다. 분별력 있는 신앙인이 된다. 속지 않는다. 그래서 마귀 사탄이 감히 덤벼들 생각도 잘 못하고 혹시 덤벼들어도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힘 있게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의 은혜와 말씀 안에서 자라나기를 힘써야 한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영광을 위하여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는 것보다 말씀의 바탕 위에서 은혜가 충만해지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힘써야 할 일이고, 정말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말씀과 기도와 예배에 힘씀으로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남으로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주님 앞에 나타나기를 힘쓰고, 내 방법,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대로 생각하지 말고 그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각자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하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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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 : 고전10:31-33

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인든 본래 그것을 만든 목적에 부합되는 상태를 유지하고 그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TV가 아무리 크고 디자인이 좋아도 영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자동차가 아무리 크고 멋있어도 잘 달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훤하고 키가 크고 능력이 많아도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식과 능력과 부와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그걸 본래의 목적에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유익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유익은커녕 도리어 그걸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삶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1.인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 뭐 있냐 잘 먹고 잘 놀고 잘살면 되지 그럽니다. 기왕이면 부귀영화도 누리고 명예도 누리고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그게 인생이지 그럽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부귀영화 누리면서 살다가 죽으면 대단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 맘대로 그게 인생이라고 그럽니까? 그건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인생이지 결코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목적은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만들어진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정합니까? 텔레비전이 자기가 목적을 정했나요? 밥그릇이 나는 밥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지 하면 자기가 목적을 정하고 만들어졌나요? 사람이 태어나면서 나는 이런 인생이 되어야지 하면서 스스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나요? 아닙니다.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정하고 우리의 목적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건 사43:7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같이 보실까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무엇이 인간의 목적이라고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첫째는 직접적인 의미로서 우리를 지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여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간접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게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도 자연도 하나님의 은혜를 흡족하게 누리며 살아감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의미와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은 인간은 무조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사랑과 은혜만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어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걸 모르는 인생이라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모르는 자로서 결국 하나님의 은총에서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세상은 가장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행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무엇을 하든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길을 따르게 됩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게 됩니다. 목적도 방법도 의도도 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고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내 생각과 방법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물론 옳은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답고 귀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지 못하고 잘못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기도 하고 헛된 것에 인생을 바치기도 하고 그저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위해 하다보니까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 결국은 서로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주는 어리석은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행할 때에 선과 진리와 의를 따름으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이나 세상의 왜곡된 풍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러분도 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인지 혹은 가리는 일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며 행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살기 위해서 먹는다거나 아니면 식탐을 채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음으로 건강을 유지하여 그 건강한 육신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의식주 생활도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방법으로 영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멀리까지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기도 합니다. 또 일인분이 몇 만원, 몇 십만원씩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기도 합니다. 혹은 몇 만원짜리도 수두룩한데 굳이 몇 십만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입기도 하고, 그저 삼십여평만 되어도 충분할 것 같은 데 굳이 몇 십 평짜리 집에 살면서 온갖 비싸고 좋은 것들로 장식을 하고 호화롭게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들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일까요? 어떤 분들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돈 잘 벌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왠 잔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능력도 지혜도 여건도 환경도 상황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필요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서 살며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므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능력이 있어도 적당한 수준에서 검소하게 의식주생활을 하면서 내 영광과 내 기쁨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뭐 기타 지식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은 드리고,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남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우리도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가장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말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직장 생활을 할 때나 결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고 여러분도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남을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일 중의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건 다름 아니라 남을 세워주는 자 즉 남에게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가져다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그 귀한 존재를 아프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또 그렇게 서로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넘어지게 하면 서로가 얼마나 힘들겠으며 또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겠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겠습니까?

오늘 32,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남을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자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 당연하지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유익을 줄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내 식구나 남의 식구나 할 것없이 누구라도 걸려서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가 아니라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의무이고 그게 우리가 서로 행복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반대로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위하여 남을 넘어뜨리고라도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기치고 도적질하고 싸우고 때리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줄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이건 우선은 교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는 행위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이런 우를 범하지 말고 서로 정말 사랑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자신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고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이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우리들도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영혼구원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을 가장 유익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익한 것입니까? 물론 생명이지 않습니까? 온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으며 이보다 기쁨과 유익과 은혜를 주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3절 다시 보십시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어찌하든지 남을 유익하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여 구원의 길로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즉 남에게 유익을 주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만약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병을 고쳐주는 일들은 그것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그런 일도 중요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그러나 단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 더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누려야 할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은혜도 누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인생을 전인적으로 영원히 유익하게 하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순절과 대강절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평소에도 해야할 일이고 또 평소에 사랑과 거룩과 진실과 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그 선하고 아름답고 의로운 모습을 보면서 주님품으로 오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결정적으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게 하고 예수님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요 이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유익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일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드리는 길이요, 이것이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가장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의 유익을 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 드리는 가운데 여러분도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하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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